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싼 Aug 01. 2024

미스터 말고, 콜미 제프

미국 초등학교 교장선생님 이야기

  2학년 담임교사 배정을 통보받고 인사 차 학교를 찾았던 날. 머리가 하얗게 센 할아버지 교장선생님을 처음 만났다. 적어도 일흔은 돼 보이는 용모와 목발은 짚지 않았지만 계속 절뚝거리는 다리가 많이 불편하신 것 같았다. ‘콜 미 제프’로 쿨하게 끝난 자기소개. 고등학교 때 이민을 와서 꽤 미국 문화에 녹아들었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진한 동방 예의지국의 피는 속이지 못하는 걸까. 연세가 지긋하신 교장선생님을 친구 부르듯 이름으로 부르는 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아 계속 ‘미스터’를 성 앞에 붙여 불렀더니 호탕하게 웃으시며 편한 대로 하라고 하셨다. 교직원들 중에 본인을 그렇게 부르는 건 나 말고는 같은 아시아계인 수위아저씨밖에 없다고. 


  한국에서 보아왔던 교장선생님들은 대개 장년 층의 남성에 양복을 입고 범접하기 힘든 권위적 카리스마를 풍겼던 기억이 있는데, 미국에서 만난 교장선생님들은 하나같이 말을 하지 않으면 그 위치라고 보기 힘들 정도의 차림새와 말투, 나이로 날 당황하게 했다. 내가 그동안 만났던 미국 초등학교 교장선생님들은 대부분 백인 여성, 40대 초반의 나이였다. NCES 통계에 따르면 현재 미국 전역 초등학교 교장 평균 나이가 47세라고 하니 어쩌면 미국인들 사이에서는 크게 놀랄 일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교장, 교감선생님들은 특별한 행사를 제외하면 늘 후드티나 청바지를 입었는데 소위 말하는 “문제 학생”들을 잡으러 다니거나 예기치 못한 일들을 처리하느라 활동하기 편한 복장이어야 한다는 사실은 나중에 차차 직접 두 눈으로 목격하며 알게 되었다. 


  미국에서 보통 교장, 교감 선생님을 묶어서 admin (운영진)이라고 표현하는데, 같은 미국 내에서도 주에 따라 보수적 성향이라면 아직 권위적인 이미지가, 진보 주라면 온갖 궂은일을 도맡는 관리인의 역할이 더 부각되는 것 같다. 교사의 1.5배, 많게는 2배 정도의 봉급을 받는데 교사들 중에서는 2배가 아니라 3배, 4배를 주더라도 행정일은 절대 못하겠다는 사람들이 많다. 그도 그럴게 미국 내 모든 직종을 통틀어 업무량이 많기로 악명 높은 교사들 조차 혀를 내두를 정도의 업무량과 스트레스를 감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행정 공무원들과 교무부, 연구부, 학생부 등 여러 부서들이 나누어서 할당된 몫을 해내는 반면, 워싱턴주 공립 초등학교들은 교장과 교감이 매 해 부서들을 조직하고 통솔하며, 매번 바뀌는 주 교육청의 가이드라인에 따라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관리해야 하는 시스템이다. 물론 오피스(대개 행정실장 정도로 번역할 수 있는 office manager와 학적을 담당하는 registrar 두 명이 전부)와 평교사들로 구성된 각종 committee (행정부서), 학교에 따라 dean (학장/교감)이나 counselor (상담교사)가 행정 및 운영에 도움을 주는 부분이 있지만 중앙 교육구에서는 큰 틀만 제공할 뿐, 전적으로 학교장의 재량에 맡기는 영역들이 많아 그만큼 업무량과 책임감이 크다고 할 수 있다. 


  교사들의 불만은 또 어떻고? 교생시절, 교육구에서 이미 정해진 사항을 전달하는 것뿐인데도 교사들 눈치를 보며 안절부절못하던 여자 교장선생님의 눈빛을 잊을 수가 없다. 30대 후반 비교적 어린 나이에 평교사 경험 없이 덜컥 교장직에 채용되었다던 그 선생님은 내 기준에선 참 일을 잘하는 야무진 분이셨는데도 불구하고 2,30년 차 베테랑 교사들에게 안 좋은 낙인이 찍혔던지 전체교사회의를 할 때마다 총알받이로 온갖 불만과 비난을 감수해야 했다. 그때 교육구는 특히 union (노조) 힘이 셌는데, 때문에 교장이 나한테 이런 요구를 해도 되는 거냐며 노조에 확인해 보겠다는 교사부터, 교장의 발언이 다분히 정치적이었다며 노조에 보고하겠다는 교사까지, 옆에서 지켜보며 참 힘든 직업이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교사의 입장에서 보면, 교내 직위를 인정받고 내 권리에 대해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것은 분명 좋은 일이다. 하지만 그 자유와 권리가 악용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 씁쓸하다. 그리고 이렇게 자유를 존중하는 시스템이 얼마나 효율적이고 생산적인지에 대해서도 계속 고민하게 된다.


  어쨌거나 이렇게 쉽지 않은 교장직을 30년 가까이 지켜내셨다고 하니 나는 제프 교장선생님에 대한 존경심이 마구 샘솟는 걸 느꼈다. 물론 이 교장선생님의 참모습을 보는 계기가 그 후로 몇 번 있었지만 그건 차차 앞으로의 에피소드에서 풀어보도록 하겠다.


이전 03화 반 배정을 이런 식으로 한다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