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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슬 Oct 02. 2022

한 달을 정리하는 데 걸리는 시간



 “버스 타려면 어디로 가야 해?”


횡단보도 앞에 서 있는데 할머니 한 분이 물으셨다. 나는 길을 건너서 오른쪽으로 올라가면 된다고 말씀드렸다. 그러자 할머니는 길을 건너지 않고 타는 곳은 어디냐고 물으셨다. 나는 왼쪽을 가리켰다.


 “이쪽으로 쭉 내려가시면 돼요”


할머니는 인사도 없이 왼쪽으로 가셨다. 그리고 난 그제야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았다. 지도도 안 보고 길을 안내해주다니. 서울에서 4년을 살아도 못하던 일이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내가 언제부터 이곳을 이렇게 잘 알았지. 강릉에서 버스 타는 게 언제 이렇게 익숙해졌지.



택배로 보낼 짐을 싸는데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강릉에서 한 경험만큼 짐이 늘어났고, 강릉에서 느낀 감정만큼 챙겨갈 것이 많았다. 테트리스 하듯이 쌓아 봐도, 상자 하나가 더 나올 것 같았다. 서점에서 산 책, 엄마께 드릴 커피 드립백, 동생들에게 줄 배지, 한 번도 신지 않은 러닝화, 오래된 카메라를 박스에 넣었다. 여행을 처음 시작할 때의 두려움, 날마다 달랐던 바다의 빛깔, 강릉에서 맞이했던 7월, 마침내 마주한 <녹색광선>, 푸른 여름밤에 들었던 노래는 마음에 담았다. 그리고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 한 장을 썼다.


 한 달은 정말 짧았지만, 이곳에서 느낀 감정의 길이는 결코 짧게 끝날 것 같지 않아. 나의 세계가 없는 곳에서 나의 것을 만들어가는 것은 잊지 못할 경험이었고, 강릉에서 내가 얻은 것들이 앞으로 내 삶에 어떤 모양으로 드러날지 기대가 돼!


당근마켓에서 산 선풍기는 다시 당근으로 나눔 했다. 다이소에서 산 작은 테이블은, 이곳에 살게 될 그 누군가를 위해 남겨두기로 했다. 그 누군가도 맛있는 점심을 먹기를, 소나무 숲을 보고 감탄하고, 걸어서 해변에 가기를, 안온한 한 달을 보내기를 바랐다.


짐은 거의 다 쌌는데, 마음 정리는 쉽게 되지 않았다. 혼자 여행을 가고 싶다고 생각한 4년 전, 졸업을 하고 돈만 벌었던 5개월, 숙소를 예약한 날, 혼자 기차에 올랐던 순간, 계속 머물고 싶다는 생각, 이제는 떠날 때가 되어 아쉬운 마음까지. 짐 싸듯이 한 번에 정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강릉에서의 마지막 날. 2022년 7월 13일의 나는, 혼자 여행을 가고 싶다고 생각한 4년 전 나에게 편지를 보낸다.


걔는 분명히 떠난단다, 너는 분명히 떠날 거야. 어디로든, 어디로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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