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무언가를 두려워한다는 건(1)

열입곱번째 이야기

by 오 광년

(우성의 집)


“전화 중?”


화려한 서울의 야경 가운데로 짧은 커트머리의 세련된 중년 여성이 얼비쳤다. 급하게 우성은 들고 있던 폰을 내리고 놀란 눈으로 고개를 돌렸다.


“ 어머니? 언제 오신 거예요?”


우성의 어머니, 최민재. 이성그룹 총수인 최창호의 외동딸로, 현재 그룹의 권력 2위다. 그녀에게는 두 살 많은 오빠가 있지만, 그는 식물인간 상태로 경영권에서 완전히 밀려난 지 오래다. 만약, 그렇게 손쉬운 조건이 붙지 않았다 해도, 민재는 자신의 능력만으로도 지금의 자리에 올랐을 여자다. 웬만한 남자들보다 배포가 크고, 그 특유의 냉철함과 집요함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기 때문이다.


“부산 백화점 다녀왔다고? 박 사장, 부산에서 잘 적응하고 있더니?”


그녀는 투명한 마티니 한 모금을 마시며 소파에 기댄 채로 물었다. 다채로운 비즈 장식으로 뒤덮인 진회색 상의가 불빛에 비쳐 얼굴 아래를 번쩍였다.


“ 네.... 얼굴이 좋으시더라고요. 그런데 밀라노에서 1주일 더 있다가 오실 줄 알았는데?”


“ 박 사장이 이제 서열 정리가 끝났나보구나. 너한테 덤비는 일은 당분간은 없을 거다. 밀라노는 어느 정도 정리돼서 온 거고. 너, 얼굴이나 잠깐 보려고 온 거야. 그렇게 긴장할 거 없다.”


그녀가 미소를 짓자 눈초리에 매혹적인 주름이 생겼다. 그 순간만큼은, 민재의 날카로움이 우성에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스타카토만큼이나 짧게 머물다 사라진다. 목이 짧은 글라스에 3분의 2정도 남은 마티니가 찰랑거렸다. 검정색 퍼를 어깨 위로 걸친 민재는 현관 쪽으로 향하다 말고, 살짝 고개를 돌려 우성을 쳐다보았다.


“ 아, 그런데...너. 재림이랑 연락은 하지? 재림이가 전화 왔더라. 네가 많이 바쁜 것 같다고. 오는 전환 웬만하면 받아줘. 그럼 간다.”


문이 닫히고, 단단하게 굳어있던 우성의 어깨가 그제야 풀린다. 어머니가 자신에게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었는지 파악이 된다. 재림이와의 약혼을 더는 미루지 말라는 뜻이다.


“ 후우우--”

자신도 모르게 깊은 한숨이 새어 나온다. 턱밑까지 조여 오는 기분이다.


보고 싶다..

우성은 낮은 목소리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자신을 향해 사방의 벽들이 밀려오는 느낌에 숨이 막힐 것 같은데, 이 순간에 복자가 떠올랐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목소리라도, 좀 더 욕심내서 5분이라도 그 얼굴을 보고 싶었다. 그녀를 보면, 복잡한 생각에서 잠시라도 해방될 수 있을 것 같았다. 다시 통화 버튼을 눌렀고, 천천히 신호음이 흘렀다.

“여보세..??”


- 꺄아아아!!!!/ 아...씨발... 뭐야 저 새끼... 여자만 있다고 한 거 아냐? 개새~ 야야!!!!!/ 퉁....탁!! 쨍그랑!!! ....


뚝.


전화는 그렇게 끊겼다.

온몸의 피가 빠져나가는 기분이다. 아주 짧은 순간, 우성의 동공이 심하게 떨렸다. 그러나 곧 그는 어딘가로 전화를 걸며 키를 찾아 밖으로 뛰쳐나갔다. “지금 바로 이 번호 위치 추적해줘.” 번호를 보내고, 거친 숨을 몰아쉬며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었다.


지금 대체 어떤 일이 생긴 걸까? 그건 분명히, 복자의 비명소리였다. 찢어질 것 같은. 입술을 깨문다. 금방이라도 욕지기가 튀어나올 것 같았다. 침이 마르고, 몸 안에 심장 덩어리 하나만 남은 것처럼 전체가 두근거린다. 전화가 울렸다.


- 전무님. 종로구 안국동 531-.. 그 출판사 건물이네요. 김복자씨가 근무하는. 저도 그쪽으로 지금 가보겠....


부서뜨릴 듯 전화기를 누르고, 차의 시동을 켰다. 늘 침착해야 한다고 35년 동안 교육 받았고, 이성적으로 모든 걸 계산하라고 세뇌받았다. 어떤 사태 앞에 흥분하는 건 하등 도움 되지 않는다고 배워왔지만, 제길.제길.제기랄.

할퀴어 물어뜯듯이 검정색 페라리가 밤의 도로를 뚫고 질주한다.



“ 읍!!!!!!!!”


누군가 강하게 뒤에서 복자를 감싸며 입가를 손으로 막아버린다. 단단하고 매끈한 느낌이었다. 복자는 스스로 서른이 꽤 많은 나이라 여겼는데, 막상 죽기엔 너무 아깝단 생각이 들었다.


그 때, 그녀의 귓가로 “쉿. 안심해...”라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뒤를 보니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낯익은 윤곽이 드러났다. 제이다.


말도 안 돼. 니가 왜 여기에. 이런 급박한 상황에서 마주친 그를 확인하니 요동치던 마음이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호흡이 부드러워지고, 눈가에 빠르게 눈물이 차올랐다. 무섭고 불안한데 이상했다. 제이의 눈빛이 다 괜찮을 거라 말하고 있었다. 그 말에 전적으로 믿음이 가는 게 우스웠다.


“ 당신은 이 안쪽에 숨어 있어. 절대 나오지 말라고.”


제이가 낮게 깔린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는 몸을 최대한 낮게 낮춰 파티션 밖으로 나가더니 팀장실 방으로 가기 전, 코너 벽 뒤로 붙었다.


우당탕탕, 퍽..... 쨍그랑


소화기가 테라스 유리창 중앙에 꽂히면서 와장창하고 문 유리창 전체가 박살났다. 귓속으로 파고드는 날카로운 소리가 폭우처럼 내렸다. 곧이어, 아까 눈빛이 날카로웠던 중학생이 모습을 드러냈고 그 뒤로 덩치 좋은 남자 세 명이 줄지어 안으로 들어왔다.


그중에 남색 비니를 쓴 남자가 한 손에 쇠 파이프를 들고 있었고, 거의 반삭발 형태의 머리를 한 남자는 석유통을 안고 있었다.


“ 그런데, 아까 안에서 전화 소리 들리던데... ”


넷 중 가장 우두머리 격으로 보이는 콧날이 날카롭고 광대가 툭 튀어나온 남자는 목소리가 걸걸했다.


“ 있어봤자 여자 하나야. 아까 올라가는 거 봤거든요.”


중학생이 주위를 살피며 재빠르게 대답했다. 방금 전까지 요즘 애들 무섭다고 대충 흘리고 만 생각이 얼마나 안일한 것이었는지 소름이 돋았다. 사람의 일은 이렇게 1초 앞을 모르는 것이었다. 경비 아저씨의 혼쭐에 기분 좀 나빠하다가 각자 집에 돌아갔을 거라 여겼다. 여기로 다시 돌아온데다가 그 해코지 대상이 자신이 될 줄은 몰랐다.


“ 아~ 여자~”


광대가 튀어나온 남자 입에서 비열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들은 저벅저벅 발소리를 내며 테라스에서 안으로 통하는 복도를 걸어 들어와 팀장실 옆을 막 지났다. 모퉁이 뒤로 숨죽여 기다리고 있는 제이와는 불과 30cm정도, 복자가 숨어 있는 파티션과는 5m 정도 떨어져 있었다.


제이, 숨 한번 몰아쉬고 나가려고 하던 찰나에 바닥에 떨어진 전화벨이 다시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두 개의 책상이 연결된 공간 아래에 숨어 있던 복자가 경기하듯 놀랐고, 나머지 남자들은 천박하게 웃으며 서로를 쳐다봤다. “ 맞네~ 있네~” 흥얼거리듯 조소를 내뿜었다.


잠시라도 찾아왔던 평안은 거대한 불안과 공포에 완전히 짓눌려졌다. 가슴은 답답한데 숨소리가 거슬리게 크게 들린다고 느꼈던 순간이었다.


한 발자국 차이로 모퉁이를 돌아가기 전, 제이의 오른발이 반삭발 머리를 위에서 아래로 내리찍었다. 무방비 상태에서 이마를 정면으로 맞은 남자는 뒤로 우당탕 넘어졌고, 그 옆에서 갖은 욕설을 내뱉으며 제이 쪽으로 나머지가 몰려들었다.


짐승의 무리가 한꺼번에 달려드는 모습이 떨리는 눈꺼풀에서 습기가 맺히는지도 몰랐다. 눈으로 보는 데도 믿기지 않는 장면이었다.


사태를 파악한 중학생이 호주머니에서 어른 손마디 정도의 칼을 뽑아 들었다. 쇠파이프를 휘두르며 남색 비니를 쓴 남자가 달려들었고, 제이는 반대편 벽을 두 발로 짚고 위로 뛰어올라 발등으로 턱을 날렸다. “컥”하는 소리를 내며, 얼굴을 들어 올린 채로 쇠 파이프를 공중에서 몇 번 휘두르며 뒤로 다섯 발자국 정도 밀려났다.


그는 턱뼈가 으스러졌는지 얼굴을 감싸고 주저앉았다.


“만만찮네....” 광대가 튀어나온 남자가 조용히 읊조렸다. 함부로 덤비지 않고, 서로를 잠시 탐색하면서 눈만 맞춘다. 뒤에서 중학생이 한 손에 칼을 쥐고 보조를 맞추려 한다.


“라라라라라” 계속해서 울리는 전화기 벨소리를 찾아서 복자가 네 발로 기어 나왔다. 책상 위에서 떨어지면서 핸드폰은 파티션과 바닥이 연결된 카펫 틈 속에 박혀 있었다. 벌벌 떨리는 손으로 떨어진 핸드폰을 힘주어 꺼내면서 화면이 스쳤고, 통화가 연결되었다.


그 순간, 금전수 화분을 집어던지려고 하던 남자를 제지하던 제이의 등 뒤에서 중학생이 옆구리에 칼날을 꽂으려 한다.


“ 꺄아아악-칼칼!! 뒤 뒤에!!!!!”

월, 화, 수, 목,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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