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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테두리e Mar 13. 2024

바람 : 바람의 바람(希 )

좋은 바람을 기다리는 중이에요

한여름의 바람:

찜통더위로 흐려진 아침은 하늘도 뭉개고 온통 아지랑이뿐이다. 아메리카노 한 잔 들고 어기적어기적 걸어가 보지만 어느새 커피 색깔 얼음도 자취를 감추었다. 한 발자국 디딜 때마다 뜨거운 땅의 열기는 나를 붙잡고 심연으로 함께 떨어지자고 속삭이는 것 같다. 버드나무의 굵다란 나무뿌리가 주먹을 쥐고 맨흙에 구멍을 뚫고 있다. 갑자기 한 발이 앞장서기 시작했고 다른 발을 재촉하며 앞서거니 뒤서거니 부지런히 움직인다. 오직 한 곳 만을 향해 눈은 충혈되고 커피 맛은 사라진 지 이미 오래인 아메리카노에 입을 오므리며 빨대를 한 번 쭈욱 빨아 당긴다. 버드나무 아래 그늘은 세상을 다 얻은 것 같다. 고개를 살짝 돌리니 맞이해 주는 바람이 몹시도 맛깔스럽다. 축축한 머리카락이 찰싹 달라붙어 있던 이마는 드디어 기지개를 피우고 콧잔등 위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도 환희로 떨고 있다. 그 녀석은 미소 진 입꼬리를 살짝 건드리고 뒷 목을 훑고 지나가며 머리카락 구석구석을 애무하며 멀리 사라진다. 버드나무의 그늘과 함께였던 바람은 다시 입맛을 다시게 한다.


꽃샘추위 속 바람 :

봄이 온다고 속삭이는 소리를 분명 들은 것 같은데, 거실의 난로와 짙은 색 겨울옷들은 아직 옷장 속, 자신의 자리에 들여보내기에는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 그나마 봄의 색깔과 닮은 옅은 아이보리 모직 코트를 입고 한겨울에도 잘하지 않던 보라색 목도리를 목에 찰싹 동여매고 현관을 나선다. 아파트 현관을 나서자마자 앙칼진 바람이 옷 속을 후벼 파며 자신의 자리라는 듯이 들이닥친다. 마치 발가벗은 나에게 차디찬 칼을 여기저기 휘두르는 것만 같다. 옷을 감싸 쥐어보지만 가소롭다는 듯이 또 한 번 코트 자락을 들썩거리게 한다. 꽃샘추위는 늘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있지만 바람은 본색을 드러낸다. 봄이 오는 것이 이렇게 힘들 줄이야. 바람은 봄을 귀히 여기라고 속삭이는 듯하다.

 

제주의 바람 :

사시사철 좋은 곳이 제주다. 하지만 제주의 바람까지 좋아할 수 있는가? 제멋대로 뻗은 검은 현무암을 품고 새파란 파도는 흰색 거품을 토해내며 육지로 기어오르는 모습은 시원하게 팔을 뻗은 풍력발전기와 환상의 콜라보를 연출한다. 한 폭의 그림과는 달리 자연 앞에 한없이 미미한 인간이 처한 상황은 다르다. 왼쪽 볼따구니를 때리는가 싶으면 갑자기 후미의 엉덩이를 철썩 때리며 앞으로 고꾸라지게 만든다. 잠시 정신을 수습할라치면 머리카락을 휘저으며 모든 가닥들이 중력을 거스르고 제 갈 길을 잃은 것 마냥 산발이 되게 한다. 일명 제주의 '똥바람'이다. 똥바람을 맞으면 네가 어디를 가든 나는 끈질기게 따라붙어 덮치겠다는 바람의 강한 의지가 보이며 한 번 당하고 나면 치욕이 느껴진다. 바람이 준 굴욕을 느껴본 적이 있는가.



이 세 가지 바람은 어떻게 다가오는가?

이 세 가지 바람이 다르다고 느껴지는가?

 

어디서나 불고 있는 바람이지만 때에 따라 느끼는 내가 다를 뿐이다. 어느 날은 감사히 받아들이고 어느 날은 반갑지 않은 내 마음이 있을 뿐이다. 바람은 죄가 없다. 정면으로 맞서야 될 것처럼 휘몰아치다가도 포근하게 두둥실 떠올려줄 때도 있지 않은가. 삶에서 맞닥뜨리는 모든 순간은 바람이 불 때와 같다. 내가 느끼고 받아들이는 것에 따라 한여름 더위를 식혀주는 시원한 단비 같을 수도 있고, 봄을 맞이하려다가 꽃샘추위를 동반한 바람의 습격으로 갑자기 방향을 잃게 될 수도 있다. 삶에서 부딪치는 고뇌의 순간마다 방향을 잃지 않고  침묵하며  나아가 보는 것이 유일하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다. 똥바람이 될지, 꽃샘추위 속 칼날 같은 바람이 될지, 지나와 봐야만 안다.  그 흔적은 고스란히 남을 테고 말이다.


좋은 바람을 기다리는 중이에요



즐겨 보는 TV 프로그램 <텐트 밖은 유럽> 스위스 편에서 인터라켄 상공에서 패러글라이딩 파일럿이 이륙하기 직전 했던 말이다.  해발 1900미터 산 위, 발밑은 끝없는 낭떠러지, 오직 바람 소리만이 들리고 모든 적막이 찾아오며,  두려움과 불안이 밀려드는 순간이다. 오로지 청각에만 집중하며 뛰어내리기 적당한 바람을 느끼려 애쓴다. 좋은 바람을 맞닥뜨린 그 순간이 오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발을 떼고 뛰어내린다. 불안과 두려움을 그리 오래 붙들고 있지는 않았으리라. 황홀하고 짜릿한 순간을 맞이하게 되는 삶의 귀중한 찰나다.


내게 딱 맞는 좋은 바람을 만나고 싶다.

그 바람이 나를 어디로 데리고 갈지는 알 수 없다.

온전히 경험하기 전까지는 불안과 두려움이 나를 휘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몸의 모든 촉각을 세우고  있다 보면  내게 딱 맞는 바람을 만날지도 모른다.

그러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발돋움을 힘차게  하며 구름 속으로  뛰어 날아오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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