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구결번

by 생각의 변화

영구결번


결승전이 끝나고 닷새 뒤에 우주와 나는 양키 스타디움에서 낮 열두 시에 하는 류현진 선발 경기를 보러 갔다. 언젠가 류현진이 한국에 있는 선배 투수에게 “형, 아침 먹는 시간에 공 던져본 적 있어요?”라고 물었던 적이 있었는데, 아마도 이 경기가 바로 그(아침 먹는 시간에 등판했던) 경기 중 하나일 것이다.

원래는 전날 오후 여섯 시에 했어야 하는 경기였지만, 비 때문에 다음 날 열두 시로 미뤄졌다. 류현진 입장에서 보면, 로스앤젤레스가 뉴욕에 비해서 세 시간이 늦으니 아침 아홉 시에 공을 던지는 셈이었던 것이다.

우주와 나는 아침부터 서둘러서 파밍데일 역에서 기차를 탔다. 전 날 차를 몰고 갔다가 경기장 근처에서 엄청난 교통체증으로 거의 한 시간 동안 멈춰 있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집에서 출발한 시간부터 따져 보니 거의 한 시간 반 넘게 걸렸다. 멀긴 멀다. 야구장까지 너무 멀어서 롱아일랜드에는 메츠 팬이 더 많은 걸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참고로 메츠의 홈구장인 시티필드는 우리 집에서 삼십 분 정도 거리에 있다.

오래 걸리긴 했지만 서둘러 출발한 탓에 비교적 여유 있게 도착했다. 양키 스타디움 4번 게이트 앞에서 바라보니 으리으리한 대저택의 파사드(facade) 앞에 서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쩌면 이전 양키 스타디움이 ‘베이브 루스가 지은 집’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데에는 구장의 겉모습이 집을 닮았다는 사실도 한몫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우주는 4월에 로스앤젤레스를 들렀을 때 다저스 스타디움에서 구입한 파란색 다저스 모자를 썼고 그 때문이었는지 뉴욕 한인 방송국에서 취재 나왔던 리포터의 눈에 띄어서 짧게 인터뷰를 했다.

우리는 우측 외야 뒤편에 자리를 잡았다가 경기가 진행되면서 강한 햇볕을 피해 외야 앞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구로다와 맞대결을 펼쳤던 류현진은 6이닝 동안 3실점으로 비교적 잘 던졌지만 패전 투수가 됐다. 구원 투수로 올라온 벨리사리오의 어이없는 실책이 결정적이었고 푸이그의 아쉬운 주루사도 한몫했다. 한 가지 더 아쉬웠던 건 이치로에게 솔로 홈런을 맞았다는 것. 이치로의 홈런 타구는 우리가 앉아 있던 우측 외야석의 앞쪽으로 떨어졌다.

나와 우주는 류현진이 6회를 마치고 내려가는 걸 보면서 집으로 가기 위해 경기장을 나섰다. 왠지 양키즈라는 팀이 아니라 구로다와 이치로와의 대결에서 진 것 같아 분했다. 한국 사람들은 어딜 가나 한일전의 굴레에서 잘 벗어나질 못하나 보다.

많은 한국 팬들은 이 경기를 류현진 대 구로다, 또는 류현진 대 이치로라는 한일전의 관점으로 봤겠지만 양키즈 팬들은 우리와 전혀 달랐을 것이다. 류현진과 구로다가 마운드에 있었던 6회까지는 어느 정도 한일전의 양상이었다. 하지만 6회 이후에 한일전 외에 훨씬 더 많은 볼거리가 있었다.

이 경기에서 가장 중요했던 장면은 6:4로 양키즈가 두 점 앞선 상황에서 마무리 투수 마리아노 리베라가 ‘엔터 더 샌드맨(Enter the sandman)’이 울려 퍼지면서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마리아노 리베라의 등번호는 ‘42’였고, 2013년 시즌을 끝으로 ‘42’는 양키즈의 영구 결번이 될 예정이었다. 이 날 경기의 9회는 메이저리그에서 ‘42’를 등번호로 달았던 마지막 선수가 등판하는 장면 중에 하나였던 것이다.

메이저리그 사무국은 1997년 최초의 흑인 메이저리그 선수였던 브루클린 다저스(현 LA 다저스) 소속 재키 로빈슨의 등번호인 ‘42’를 메이저리그 모든 구단에서 영구 결번으로 지정했다. 메이저리그 30개 구단 소속의 어떤 선수도 ‘42’를 등번호로 쓸 수 없다는 뜻이다. 마리아노 리베라의 등번호가 ‘42’일 수 있었던 것은 영구 결번으로 지정되기 이 전부터 ‘42’를 등번호로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재키 로빈슨에 대한 존경심에서 선택했다는 얘길 그의 자서전에서 읽은 적이 있다. 하지만 2013년 시즌이 끝나면 그마저도 야구장에서 볼 수 없게 된다. 리베라가 2013년을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하기 때문이다. 이날 경기는 나와 우주가 미국에서 본 유일한 류현진 등판경기라는 개인적인 의미를 넘어서 ‘42’라는 숫자에 얽혀 있는 메이저리그 야구사의 빛과 어둠이 시간을 거슬러 교차되는 역사적인 순간이기도 했다.

양키 스타디움

며칠 뒤에 내셔널즈의 아이들과 부모들은 우승을 축하하기 위해서 피카렐라 집에 모였다. 피카렐라는 작년에 이어서 두 해 연속으로 우승파티를 여는 감독이 되었다. 우리 가족은 교인들의 초대를 받은 적은 있지만 미국인들이 여는 파티에 초대된 것은 처음이었다. 짧은 영어로 다른 부모들과 얘기를 할 생각을 하니 좀 갑갑하긴 했지만 여러 가족들이 모인 자리여서 말을 할 일이 그리 많을 것 같지는 않았다. 다행이었다.

초대장에는 같이 먹을 수 있는 스낵을 가져와도 좋다고 쓰여 있었다. 아내와 나는 무엇을 가져갈까를 고민했다. 플레인뷰에 있는 한인 마켓에서 초코파이 두 상자를 샀다. 그리고 피자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우주와 누리를 위해서, 어쩌면 거기에 모인 다른 사람들도 좋아할지 모르므로, 유부초밥을 만들기로 했다. 초코파이는 별 인기가 없었지만 신기하게도 유부초밥은 반응이 좋았고, 어떤 부모들은 아내에게 어떻게 만드는 것인지 묻기도 했다. 아내가 열심히 설명을 하긴 했지만 그들이 잘 이해했는지는 모르겠다. 어른들은 유부초밥과 피자를 먹으면서 수영장 주변에 있는 벤치에서 이야기를 나눴고 아이들은 수영을 하다가, 농구를 하다가, 수영장 앞에 있는 넓은 잔디밭으로 장소를 옮겨서 간이 야구를 하면서 놀았다.

그날 뜻밖의 이야기를 들었다. 우주가 내셔널즈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던 비화(秘話), 우연히 들어간 게 아니었던 것이다. 내가 알아들은 바에 따르면 하프할로우 힐 봄 리그는 각 팀의 감독이 두 명의 선수만을 지정해서 자신의 팀에 넣을 수 있고 나머지 선수들은 무작위로 배정된다. 팀 전력의 평준화를 위한 규칙이다. 피카렐라 감독은 아들인 마이클 외에 존과 벤을 지정했다. 리그 사무실에서는 피카렐라에게 리그에 처음 등록한 우주라는 아이가 있으니 작년 우승팀에서 데려가야 한다고 통보했다. 전년도 우승 팀 감독은 좀 실력이 모자란, 정확하게는 모자랄 것 같은, 선수를 받아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이 나름의 이유였다. 그래서 결국 피카렐라는 (어쩔 수 없이!) 우주를 자기 팀으로 받게 되었다.

이런 경로로 들어 온 우주가 기대 이상으로 잘해 줬으니 아마도 피카렐라 입장에서는 우주가 넝쿨째 들어온 복덩이였을 것이다. 게다가 나중에 등록한 코너도-코너는 우승 축하 파티에도 오지 않았다- 맹타를 휘둘렀으니, 이런 경우를 될 놈은 된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DTD(Down Team is Down)의 반대말인 UTU(Up Team is Up).

그날 피카렐라는 시즌 후반에 코너가 맹타를 휘둘렀는데 정작 결승전에 나오지 않아서 많이 아쉬웠다고 했다. 우리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우주도 피카렐라 감독 팀에 왔기 때문에 좀 더 편안하게 야구를 할 수 있었다. 어쩌면 운이 좋은 사람은 피카렐라가 아니라 우주였다.

그날 두 가지 제안을 받았다. 존의 아빠가 여름리그를 같이 하자고 했다. 하지만 여름 방학 때 짧게라도 여행을 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답을 주진 못했다. 다른 하나는 피카렐라의 제안이었는데, 가을에 있을 인비테이셔널 대회에 참가할 건데 우주가 같이 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어려울 것 같아요. 10월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야 되거든요.”

피카렐라가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뭔가를 잠깐 생각하는 것 같더니, 시즌 전체를 마치지 못하더라도 미국에 있는 동안만이라도 같이 하면 어떻겠냐고 물었다. 나도 잠깐 생각했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이건 우주에게 물어볼 필요조차 없었다. 가을은 미국에서 야구를 할 수 있는 마지막 계절이었고, 우주는 떠나기 전에 한 번 더 야구를 하고 싶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여름이 시작되는 문턱에서 나는 가을에 하게 될 야구를 약속했다.

타운하우스의 수영장은 저녁 여섯시까지 구조요원이 있기 때문에 이후에는 더 이상 수영장에서 놀 수가 없었다. 부모들과 아이들은 빽빽하게 나무들로 둘러싸인 잔디밭 공터로 장소를 옮겼다. 6월의 해는 길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결국 주변은 어두워졌고, 어느덧 집에 가야 할 시간이 되었다.

파티가 거의 끝나갈 무렵 해리의 동생 제시가 부모들이 있는 테이블 근처로 왔다. 수영장 옆에 있는 화장실 문이 잠겨 있어서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해리의 엄마가 제시의 얘기를 듣고 잠시 망설이더니 풀밭 저쪽의 깊숙한 곳으로 제시를 데리고 갔다. 아마도 으슥한 곳에서 제시의 고민을 해결해주려는 모양이었다. 엄마를 따라 으슥한 곳으로 가던 제시가 갑자기 멈춰서더니 손가락으로 반짝이는 뭔가를 가리켰다.

“파이어플라이.”

빛과 아이들의 함성이 사라진 자리에 어둠이 천천히 내리면서 풀밭 여기저기서 조그만 불빛들이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포근하고 선선한 초여름 밤, 습기를 잔뜩 머금은 수영장 주변의 축축한 풀밭, 어둑어둑한 숲 주변의 서늘한 공기 위로 떠다니는 느리게 깜박이는 불빛들.

반딧불이었다. 풀밭 위로 반딧불이 날아다니기 시작한 것이다. 어린 시절 시골에서나 가끔 볼 수 있었던 반딧불이 이곳에서는 누군가가 반짝이 한 주먹을 하늘에서 흩뿌린 것처럼 여기저기서 반짝거렸다. 공중에서, 테이블과 의자에서, 그리고 풀밭에서. 칙-치익. 어디선가 스프링클러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땅바닥에서 느리게 깜박거리던 불빛들이 공중부양을 하듯 천천히 떠올랐다.

“아빠, 이것 봐!”

우주와 누리가 느리게 반짝이고 있었다. 어둠 속을 부유하던 반딧불이 우주와 누리의 머리와 가슴에 앉은 것이다. 둘은 신기한 듯 서로를 바라보며 얼어붙은 것처럼 꼼짝 않고 서 있었다, 마치 마법으로 멈춰버린 소년들처럼. 비비디바비디 부.

우승 축하 파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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