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무하 Oct 24. 2024

신의 고백(22화)

크리스는 도형의 말을 믿지 못했다. 

텔레파시라는 단어가 아이들 장난처럼 들렸을 뿐이었다.     

크리스는 자신도 모르게 입에서 욕이 나왔다.     

미국에 입양되어 힘들게 살아온 수십 년의 세월이 크리스의 머리에 영화처럼 떠올랐다. 

입양되어 가서 살던 집에서 늘 나던 알 수 없는 냄새까지 순간 느껴졌다.     

“ 이도형 씨”

크리스는 도형을 불렀다.     


“ 네.”

도형은 크리스의 붉어진 눈을 보았다.     

“ 제가 미국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모르시죠? 제가 어떻게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는지 짐작도 못 하실 거예요.”

두 남자는 서로 마주 보며 의자에 앉았다.     


“ 어머니를 미국으로 모시고 가세요.”

도형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 어머니?” 크리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도형은 자기 자신도 재임이 아내와 대화를 나누었다는 사실을 처음에는 믿을 수 없었다고 크리스에게 말해주었다.     

“나도 처음에는 믿을 수 없었어요. 서재임이 완전 사기꾼이라고 생각했지요. 하지만 서재임이 나의 아내와 대화를 나눈 것은 사실이에요. 당신 어머니와도 분명 소통했을 거예요. 지금 의식 없이 누워계신 분은 당신 어머니가 맞아요.”     


“아니, 나의 친모이던, 이모이든 상관없어요. 

이미 다 지나간 일이고, 지금은 제게 큰 의미 없어요.”     


“ 제가 그분을 처음 보았을 때 이미 한 달을 넘기지 못하고 돌아가실 것이라고 의사들이 말했어요. 그분은 당신을 만나기 위해 버티고 계신 거예요. 당장 미국으로 모시고 가서 제 아내에게 사용하고 있는 치료법을 어머니에게도 사용해 보세요.”     


“아니요. 지금은 불가능해요.”

 크리스는 고개를 저었다.     

“왜죠?”


“식물인간을 깨어날 수 있게 하는 그 기계는 미국에 단 한 대뿐이고, 현재 미국의 능력 있는 의사들은 다 이도형 씨 부인에게 매달려 있어요. 다른 사람을 치료할 정신이 없어요. 

현재로서는 이도형 씨 부인을 살리는 일이 인류를 구하는 일이니까요. 이모님을 모시고 가서 치료하는 것은 지금으로서는 불가능해요.”     


“당신 어머니라고요. 시도는 해봐야죠.”     


“아니에요. 지금은 이도형 씨 부인이 중요해요. 훨씬 더.

도형은 크리스의 진심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의 아픔과 슬픔이.

크리스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도형은 지켜보았다.     

의자에 앉아 있던 크리스는 갑자기 일어나 도형에게 다가와 왼쪽 셔츠 소매를 올렸다.

그의 왼쪽 팔은 손목부터 어깨 아래까지 크고 작은 상처 자국들로 가득 차 있었다.

도형은 놀랐다.     

마음의 상처뿐 아니라 몸에도 상처투성이인 남자를 보았기 때문이다.     

“ 이 흉터들이 왜 생긴 줄 아세요? 내가 미국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열심히 공부하는 길밖에는 없다고 생각했어요. 

공부하다 잠이 오면 펜으로 팔을 찔렀어요. 아프다는 생각은 한 번도 들지 않았어요. 졸음을 이겨 내는 것이 더 중요했죠. 그렇게 미친 듯이 성공하려고 애쓰며 살면서 무슨 생각을 한 줄 아세요? ”

도형은 대답 대신 고개를 저었다.     


“미국에 살면서 중국 무협영화를 자주 봤어요. 영화 내용은 거의 비슷했죠.

부모를 죽인 자의 원수를 갚기 위해 수십 년간 무술을 익혀 결국 원수를 갚는다는 뻔한 내용.

그런데 그 영화들을 보면서 저는 다른 생각을 했어요. 

오랫동안 죽을 고생을 하면서 수십 년 동안 무술을 익혔는데도 원수를 갚지 못하고 원수에게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 

그래서 불안했죠. 돈도 많이 벌고 남들이 알아주는 교수가 되었지만, 모든 것이 한순간에 다 날아갈 것 같아 불안했어요.

그래서 교수가 된 후에도 미친 듯이 연구에만 몰두했어요.

저는 지금 나의 원수에게 져 버린 기분이에요.

나를 짐승처럼 바라보던 미국인들의 인종차별을 참아내면서, 드디어 복수의 시간을 시작하려는데, 이제 나의 능력을 세상에 보여 주려 하는데, 세상이 끝나 버린다는 거예요.

 원래 인생이 허무한 것이고, 의미 없다는 것은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잔인한 것인 줄을 몰랐네요.

그런데 거기다 지금 죽음을 앞에 두고 있는 나의 이모가 나를 버린 어머니라고요?

이게 무슨 신파영화도 아니고.”     


도형은 아내를 데려오겠다고 몰아붙인 크리스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죄송합니다.”

도형은 고개를 숙였다.     


크리스는 창문 쪽으로 걸어가 창문을 열고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신의 뜻대로 이루어지도록 놔둘 수 없어요.”

크리스는 울먹이는 소리로 도형에게 말했다.     

도형은 갑자기 재임의 신이 원망스러웠다.     


크리스는 마치 신부님에게 고해성사하듯이, 친한 친구에게 하소연하듯이 한 번도 꺼내놓지 않았던 자신 삶의 이야기를 도형에게 모두 다 말해버렸다.     

도형은 크리스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가 겪은 많은 일을 모두 마음속에 담아 두고 있었던 크리스가 더 안쓰럽게 느껴졌다.

새벽까지 이어진 두 사람의 대화가 끝나고 헤어지려는 순간 크리스가 도형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서재임을 만나게 해주세요.”     


“그건 불가능해요. 서재임은 세상으로부터 격리되어 있어요. 지금은 누구도 그를 만날 수 없어요.”     


“직접 확인해 보고 싶어요. 지금 누워있는 분이 진짜 나를 낳아주신 분인지.”

크리스는 어머니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못했다.     


“그건 저의 능력 밖의 문제에요. 불가능한 일이라구요.”

도형은 생각 없이 크리스 어머니에 대한 말을 해버린 것을 후회했다.     

“이제는 진짜 얼마 남지 않았어요. 곧 돌아가실 것 같아요. 제발 부탁드려요.”

크리스의 말에 간절함이 느껴졌다.     

“얘기는 해보겠는데 기대는 하지 마세요.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도형은 급하게 돌아서 나왔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