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에 관한 짧은 단상

131. 사진가의 질문과 의심

by 노용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여지껏 사진을 공부했고 찍어왔지만 ‘사진이 무엇이다’라고 딱 꼬집어 말하기 어렵다. 사진은 아마도 그 과정일지 모르겠다. 사진을 찍으면서 느끼고 생각하는 과정일 것이다. 결론이 나지 않은 미완의 과정. 그러나 사진은 그 순간 찍히면서 먼저 결론지어지니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얼마전 신문 기사에서 이런 말이 있었다. “문학은 떼로 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마루야마 겐지(丸山健二·74)라는 소설가이었다. 그는 “문학은 인간의 본질을 묻고, 세계와 일대일로 대결하는 예술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일본 문학은 ‘사(私)소설’이다. 마누라가 어쨌다는 둥, 와인이 어쨌다는 둥, 나는 이렇게 괴롭다는 둥... 근본적 고민이 없다. 그런 소설은 벽장 속에 넣어두고 저 혼자 읽어라. 다들 나르시시스트투성이였다”라고 일갈한다. 또한 그는 예술가를 이렇게 말한다. “식물로 비유한다면, 예술가는 음지 식물이다. 비료를 너무 많이 줘도, 빛을 너무 많이 쪼여도 죽는다. 비료는 돈, 빛은 명예. 둘다 추구하면 몹쓸 예술가가 된다. 그러다 나자빠지는 인간들, 주변에서 여럿 봤다. 하나 더, 국가와 권력에게 예술가가 꼬리를 흔들면 안 된다는 것이다. 어쩌면 돈과 명예 추구보다 더 중요하다.” 이 기사는 문학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사진도 마찬가지인데, 사진가들은 떼로 몰려다니는 것을 좋아한다. 출사를 핑계삼아 우리는 얼마나 많이 떼로 몰려다니는지 모르겠다. 더군다나 큰 행사가 있으면 너도나도 사진을 찍어대니 말이다. 나는 왜 이 자리에 서 있고, 무엇을 찾으려고, 어떻게 보여줄려고 사진을 찍고 있는가? 결국 사진은 나에게 다시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의심한다. 과연 나는 본질을 보고 있는 것인가. 내가 찍은 사진이 노출이 어떻고, 짱하게 잘 나왔다는 것에 만족하는 나르시시스트는 아닌가 말인가? 우리 모두 미쳐있고 서로 내가 잘났다고 아우성이니 말이다.

인생은 질문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속시원한 답을 찾기는 어려우니, 계속 질문을 하게 된다. 과연 사진은 무엇이란 말인가. 무엇인지도 모를 사진을 여전히 찍고 있으니 그 질문은 다시 하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당연하다고 여길 때도 왜 그것이 당연한지 의심하고 질문하게 된다. 노출의 정답은 없기 때문이다. 구도의 정답은 없기 때문이다.


필립 퍼키스의 말을 빌리면, 사진을 배우는 것은 삶의 방식을 배우는 것이다. “기술적인 내용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사진을 왜 찍는 것인지에 대한 물음과 어떻게 대상에 다가가야 하고,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 지에 대한 본질적 물음이다. 순서가 뒤바뀐 것이다. 세상을 보는 눈과 대상에 다가서는 자세를 먼저 배우면 테크닉도 금방 배울 수 있다. 사진은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안목의 문제다.” 우리는 사진을 잘 찍는 노하우를 배우고자 공을 들인다. 사실 본질적인 문제는 질문하지 않고, 껍데기에만 신경을 쓴다. 어떻게 하면 그럴듯한 사진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하고 말이다. 유명한 사람들을 찍으면 자신도 유명해지지 않을까 요행을 바라기도 하고, 과연 나는 사진을 왜 찍는 것인가? 질문한다. 그리고 내 사진이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의심하게 된다. 과연 나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인가?


질문은 사진을 찍기 위해서 카메라를 들고자 할 때 하게 된다. 그리고 사진을 찍은 후에 의심을 하게 된다. 과연 나는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었는가 말이다. ‘너무 예뻐서요’ ‘너무 신기해서요’ ‘딱히 설명하기 어렵지만 그냥 좋아서요’ 어쩌면 의도가 없을 지도 모르겠지만, 아니면 카뮈의 이방인에서처럼 ‘햇살이 너무 눈이 부셔서 살인을 했다’고 주장할수도, 아니면 작가의 의도라고 되물을수도, ‘의도가 곧 사진의 의미인가? 의도가 없는 사진은 의미도 없는 것인가?’하고 찍혀진 사진을 보면서 다시 질문하고 의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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