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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에서 #75

허조그

by 노용헌

니체 선생님께, 친애하는 선생님, 청중석에서 질문해도 될까요? 선생님께서는, 끔찍한 것이나 의심스러운 것들의 광경을 견뎌내고, 파괴라는 사치를 허용하며, 부패와 혐오스러움과 악을 목격하는 디오니소스적 정신의 힘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디오니소스적 정신이 능히 이런 일을 해낼 수 있는 까닭은 대자연과 같은 회복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표현 중 어떤 것은 대단히 게르만적 울림이 있습니다. '파괴라는 사치' 같은 표현은 확연히 바그너적입니다. 그리고 저는 선생님이 얼마나 이 모든 역겨운 바그너적 어리석음과 허세를 경멸하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디오니소스적 정신을 시험해 보기에 충분한 파괴를 보아왔는데, 그런 파괴를 겪고도 회생한 영웅들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버크셔 지방에 자연과 더불어 홀로 있는 저에게 지금이야말로 디오니소스 정신을 이해할 수 있을 기회입니다. 저는 지금, 이런 저런 생각들로 혼란스러운 마음에 불안해하며 주먹을 꼭 쥔 채 해먹에 웅크리고 누워 있습니다만, 한편으로 쾌활하기도 합니다. 저는 선생님이 쾌활함을 가치 있게 여기시는 것을 압니다. 쾌락주의자들의 외관뿐인 낙천성이나 실연한 사람들의 전략적인 쾌활함이 아닌 진정한 쾌활함 말입니다. 또한, 선생님께서 극심한 고통, 나무처럼 서서히 타들어 가는 고통이 인간을 숭고하게 만든다고 생각하시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이 부분에서 어느 정도 선생님 생각에 동의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더 높은 차원의 교육을 받으려면 먼저 살아남아야 합니다. 고통보다 더 오래 살아남아야 하지요. 허조그! 위대한 철학자에게 말싸움 걸고 괴롭히는 일을 그만 둬. 아니, 정말이지, 니체 선생님, 저는 선생님을 대단히 깊히 존경하며 지지합니다. 선생님은 우리 인간이 허무와 더불어 살아갈 수 있게 되기를 원하시지요. 우리가 거짓된, 선한 인성, 진리, 범속한 인간적 생각에 빠져들지 말고 여태껏 묻지 않았던 것에 의문을 제기하고 비열한 안일에서 벗어나, 강철같이 결연한 태도로 악 속에 뛰어들어 악을 극복하고 초월하기를 말입니다. 가장 절대적이고 가장 날카로운 의문들. 현 상태의 인류를 거부하는 것, 비속하고, 실용적이고, 도둑질하고, 악취를 풍기고, 무시하고, 얼빠진 오합지졸이 되기를 거부하라는 말씀이시잖아요. 노동자들뿐만 아니라, 책이다, 음악회다, 강연회다 또는 자유주의와 신파조의 '사랑'이니 '정열'을 말하는 '교육'받은 무리가 더 나쁘다, 이것들은 모두 없어져야 하고 또 없어질 것이라는 말씀이잖습니까. 좋습니다. 하지만, 선생님이 주장하는 초인도 살아남아야 합니다. 살아남지 않으면, 운명에도 없습니다. 선생님이 주장하시는 비도덕주의자도 고기를 먹고 버스를 탑니다. 다만, 제일 멀미가 심한 승객일 따름입니다. 인류는 주로 왜곡된 사상으로 살아갑니다. 왜곡되었다는 의미에서 선생님의 사상도 선생님께서 비난하시는 기독교 사상보다 나을 게 없습니다. 인류와의 관계를 유지하기를 원하는 철학자라면 누구나 자신의 사상체계가 수십년이 지나면, 어떻게 왜곡될지 미리 살펴보고 자신의 사상 체계를 알맞게 왜곡해야 합니다. 선생님이 지금 어디에 계신지는 몰라도 저는 이 덧없는 풀빛의 경계선, 해 지는 땅끝에서 선생님의 행복을 빕니다. 마야의 베일 아래에서 M.E. 허조그 올림.


-솔 벨로, 허조그2, P175-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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