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 나무와 숲
나무를 볼 것인가, 숲을 볼 것인가. 이 말은 북송(北宋) 때의 시인 소동파(蘇東坡)가 쓴 〈일유(日喩)〉에서 유래된 우화이다. 장님이 태양을 직접 보지 못했기에 남의 말만 듣고 지레짐작으로 쟁반과 초를 태양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처럼 좁은 소견이나 불확실한 소문, 섣부른 판단으로 사물을 그릇되게 판단하는 것을 경계하라는 이야기이다. 사진은 한 단면을 보여준다. 사진은 한 쪽 눈으로 바라본 외눈의 풍경이다. 그래서 어쩌면 자신이 보고 싶어하는 것만 볼 지도 모르겠다. 숲 전체를 보기보다는 나무 한 그루에 집착하기 쉽다. 나무 한 그루에 스포트라이트가 비춰지는 것이 사람의 일반적인 성향일지도 모르겠다.
어두운 극장의 객석에 많은 사람들이 앉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어둡기 때문에 사람들 각각의 모습을 볼 수 없다. 그런데 이때 스포트라이트로 비춰진다면 스포트라이트가 비춰진 그 객석의 한 부분을 볼 수 있다. 전체를 비추는 확산광이 아니라, 한 부분을 비춘 스포트라이트에 우리의 눈길을 가게 될 것이다. 피사체에 조명을 비춘다는 것은 피사체를 잘 보이기 위해서이다. 화면 안 피사체에 대해 시각적으로 강조하기도 하고 장면안에 원근감을 만들어 주기 위해서이지만, 사실 우리는 주광선(key light)을 스팟 조명으로 할지 확산광을 할지 선택해야 한다. 주광선에 생긴 그림자 부분을 부드럽게 하기 위해 보조광선(fill light)을 쓰거나 피사체를 더욱 입체감을 주기 위해 역광(back light)을 주기도 한다. 이런 기본적인 조명은 피사체, 누군가를 드러내기 위해서 사용된다. 우리는 나무의 질감을 보기도 하지만, 숲의 분위기를 보기도 한다.
각각의 개인을 볼 것인지 사람들의 집단을 볼 것인지. 군중의 모습에서 개인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 사진가로 게리 위노그랜드(Garry Winogrand)를 들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주요 사진집 <동물들The Animals>(1969), <여성은 아름답다Women Are Beautiful>(1975), <여론Public Relations>(1977) 등이 있다. 그의 사진에서는 리 프리드랜더(Lee Friendlander)와는 다른 군중속의 개인의 고독이 보인다. 아마도 이러한 사진적인 전통은 로버트 프랭크에게서 거슬러 올라간다. 이방인의 눈에 비친 모습은 군중에 섞이지 못하는 고독감일 것이다. 우리는 집회현장에서 두 부류의 사진가들이 있다. 광각렌즈로 전체적인 군중의 모습을 담고 있는 사진가와 망원렌즈로 군중속의 특정인물을 클로즈업해서 촬영하고 있는 사진가를 만난다.
게리 위노그랜드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는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라는 책에서 개인적으로는 충분히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사람들조차 집단이 되면 이기적이 된다고 말했다. 개개인은 도덕적이지만, 집단이 되면 집단의 이익(시스템화된 집단)을 위해서 얼마든지 비윤리적 결정에 동참할 수 있는 모순을 종종 보게 된다. 집단의 잘못을 비판하고 싸우는 것은 언제나 개인의 몫이 된다. 한 사람 한 사람은 개별적인 나무이다. 각각의 나무들이 모여서 숲이 되었지만, 사진가는 선택하게 된다. 나무를 볼 것인가, 숲을 볼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