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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용헌 Sep 18. 2022

모옌의 <붉은 수수밭>

영화 <붉은 수수밭Red Sorghum> 1987년

2012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모옌의 첫 장편소설이자 대표작 <붉은 수수밭紅高粱>. 강인한 생명력으로 일본의 압제와 봉건예교에 저항한 민초들의 역사를 그린 작품이다. 1980년대 문단의 이정표적인 작품이란 호평을 받은 <붉은 수수>를 포함한 중편 다섯 편을 엮은 연작소설이다. 1920년대 중반부터 1940년대 초반까지 중국 산둥성 가오미 지방을 배경으로 일제의 만행에 대항하는 순종의 영웅들이 만들어낸 위대한 삶과 격렬한 사랑, 처절한 투쟁과 찬찬한 죽음을 이야기한다. 영화는 장예모(Zhang Yimou)의 감독 데뷔작이자 영화 배우 공리(Gong Li)의 데뷔작이다.     

소설 <붉은 수수밭>은 제1편 붉은 수수, 제2편 고량주, 제3편 개의 길, 제4편 수수 장례, 제5편 기이한 죽음으로 구성되어 있다.     

[1. 붉은 수수]

한때 난 가오미 현 둥베이 지방을 열렬히 사랑하기도 했고 그곳에 대해 극도의 원망을 품기도 했었다. 그러나 성장해서 마르크스주의를 열심히 공부하고 난 뒤에 결국 나는 깨달았다. 가오미 현 둥베이 지방은 분명 이 지구상에서 가장 아름다우면서도 가장 누추하고, 가장 초연하면서 가장 속되고, 가장 성결하면서 가장 추잡하며, 영웅호걸도 제일 많지만 개잡놈도 제일 많고, 술도 제일 잘 마시고 사랑도 제일 잘할 줄 아는 곳이라는 사실을. [……] 8월 만추가 되면 끝도 없이 펼쳐진 수수의 붉은빛이 광활하게 일렁이는 피바다를 이루곤 했다. 수수로 덮인 가오미 마을은 찬란하게 빛났다. [……] 그들은 사람들을 죽이면서까지 아낌없이 조국에 충성을 바쳤으며, 한 막 한 막의 영웅적인 장극(壯劇)을 연출함으로써 이렇게 살아 있는 불초한 자손들을 부끄럽게 만들었다. 세상은 진보하지만 그와 동시에 종(種)은 퇴화한다는 것을 난 절실하게 느낀다. (p16-17)   

  

할머니는 답답한 꽃가마 안에 앉아 있느라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머리에 뒤집어쓴 붉은 수건이 두 눈을 가리고 있었다. 붉은 수건에서는 지독한 곰팡이 냄새가 났다. 외증조모는 신부가 자기 손으로 붉은 수건을 벗어서는 안 된다고 천만번도 더 타일렀지만 할머니는 붉은 수건을 벗어 젖혔다. 은을 꼬아 만든 묵직한 팔찌가 팔목을 타고 미끄러져 내렸다. 팔찌 위에 새겨진 뱀 무늬를 바라보면서 할머니는 마음이 너무나 심란해졌다. 좁은 흙길 양쪽으로 늘어선 초록빛 수수가 훈풍에 흔들리고 있었다. 수수밭에서 비둘기들이 구구대는 소리가 전해져 왔고 갓 빠져나온 은회색의 수수 이삭은 연한 냄새의 꽃가루를 날리고 있었다. 그녀와 얼굴을 맞대고 있는 가마의 휘장에는 용봉(龍鳳) 무늬가 수놓아져 있었다. 휘장에 달린 붉은 천은 가마를 빌려줄 때마다 그대로 함께 빌려준 탓에 이미 초라하기 그지없는 색으로 변해 있었고 한가운데는 커다랗게 기름때에 절어 있었다. 늦여름 초가을의 왕성하게 내리쪼이는 햇빛 아래서 가마는 가마꾼들의 경쾌한 동작을 따라 휘청거렸고, 가맛대를 동여맨 소가죽 끈에서는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가마의 휘장이 가볍게 흔들리면서 젖혀진 틈으로 제법 시원한 바람과 함께 빛 한줄기가 가마 안으로 비쳐 들어왔다. 할머니의 몸은 온통 땀으로 젖었고 가슴은 북처럼 뛰고 있었다. 가마꾼들의 규칙적인 발자국 소리와 거친 숨소리를 들으면서 할머니의 머릿속에서는 조약돌처럼 반질반질하고 차가운 느낌과 고추처럼 거칠고 타는 듯한 느낌이 교차되고 있었다.

(p76-77)    


수수가 붉어졌네. 수수가 붉어졌네. 일본 놈이 왔다네. 일본 놈이 왔다네. 나라는 쪼개지고 집안은 망했다네. 동포들아, 어서 일어나 칼 들고 총 들고, 왜놈을 무찔러 고향을 지키자….(p98)     

[2. 고량주]

어떤 의미에서 보면 영웅은 태어나는 것이다. 영웅적인 기질은 평소에는 가만히 숨어 있다가 외부의 어떤 유인을 만나게 되면 영웅적인 행위를 통해 드러나게 된다. (p153)

     

술도가에서 가장 힘든 일이 바로 시루를 들어내는 일이었다. 술 시루 주둥이가 다 마르면 주석 시루를 들어내고 작은 구멍이 뚫린 나무 뚜껑도 걷어낸다. 그러고 나면 나무 시루에 가득 찬 고량주 술지게미가 드러나고, 시커먼 간장색의 고량주 시루 안에서는 무지하게 뜨거운 김이 뿜어져 나온다. 위잔아오는 네모난 걸상 위에 서서 손잡이가 짧은 나무 넉가래를 손에 들고 술지게미를 퍼내 광주리 안으로 던져 넣었다. 그는 다른 동작은 거의 없이 오직 팔뚝의 힘으로만 그 일을 했다. 벌겋게 달아오른 몸에서 뜨거운 김이 뿜어져 나왔고, 등에서 흐르는 땀방울이 작은 내를 이루었다. 땀방울에서도 강렬한 술 냄새가 풍겨 나왔다. (p251)  

   

[3. 개의 길]

온갖 고초를 다 겪은 수수들은 달빛 아래 숙연히 선 채 말이 없었다. 이따금씩 검은 흙 위로 떨어지는 수수알들은 영롱하게 빛나는 수수의 눈물 같았다. 공기 중에는 강렬하게 코를 찌르는 들척지근한 비린내가 꽉 들어차 있었다. 사람들이 흘린 피가 우리 마을 남쪽의 검은 땅 전체를 흠뻑 적셔놓았다. 마을 쪽에서 보이는 불빛이 여우 꼬리처럼 꿈틀대며 간헐적으로 나무가 탈 때 나는 폭발음 같은 소리를 냈고, 뭔가 타서 눌어붙는 듯한 냄새가 가득 퍼져 나와 수수밭의 피비린내와 한데 섞이면서 질식할 것 같은 괴이한 냄새를 만들어냈다. (p292)     


쪼개진 커다란 묘 주위로 사람들이 몰려와 서 있었다. 저마다의 얼굴에는 공포의 기색이 역력했다. 나는 에워싼 사람들을 뚫고 들어가 무덤속의 뼈다귀들, 다시 하늘을 볼 수 있게 된 유골들을 보았다. 그들 중 누가 공산당원이고 누가 국민당원이고 누가 일본 병사이고 누가 괴뢰군이고 누가 일반 백성인지는 성(省) 위원회 서기라도 구분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모든 두개골이 다 한 가지 형상으로 빽빽하게 구덩이 속을 채운 채 모두 다 평등하게 같은 빗물에 젖고 있었다. 드문드문 처량하게 떨어지는 빗방울이 회백색 유골을 두드리면서 독하고 모진 소리를 냈다. 고개를 쳐들고 드러누운 유골 안에 모두 빗물이 가득 찼다. 유골 속에 든 맑고 차가운 빗물이 마치 저장고에서 몇 년 묵힌 고량주 같았다.

마을 사람들은 여기저기로 날아간 유골들을 주워 와서 무덤 속의 유골 더미 위로 도로 던져 넣었다. 나는 눈앞이 어지러웠다. 정신을 가다듬고 다시 보니 무덤 속에는 수십 종의 개 두개골이 있었다. 더 나중에 안 건. 사람의 유골과 개의 유골이 거의 구분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무덤 속에서는 둘 다 오직 짧고 희미한 하얀빛일 뿐이다. 그 순간 무슨 비밀스러운 언어처럼 내 영혼을 흔들어놓는 어떤 진실이 내게 전해져 왔다. 영광스러운 인간의 역사 속에는 개에 관한 너무나 많은 전설과 기억들이 한데 섞여 있고, 개의 역사와 인간의 역사는 한데 얽혀 짜여 있다는 진실이. (p338)   

   

[4. 수수 장례]

초승달은 나뭇가지 끝에 걸리고 마을은 희미한 어둠으로 덮였다. 청량한 바람 한 줄기가 들판 쪽에서 불어왔고 모수이 강 안에서는 우렁한 개구리 울음소리가 한 차례씩 전해져 왔다. 장례식을 보러 속속 마을로 몰려들었던 사람들은 마을 안에 더 이상 묵을 곳이 없자 마을 밖 수수밭에서 잠을 잤고, 그 바람에 이 성대한 장례식이 끝난 뒤 모수이 강 주변에 펼쳐져 있던 수천 이랑의 수수밭에서 자라던, 부드럽고 탄력 있는 수수들은 다 짓밟혀 딱딱하게 변해버렸다. 속에 진흙이 들어간 수수 싹은 짓불려 한 줄로 늘어선 연녹색 즙액이 되었다. 하지만 5월이 되어 한차례 큰비가 내리자 굳었던 땅은 다시 살아났고, 살아남은 수수 싹은 끝없이 이어진 거친 들판에서 강인하게, 날카로운 칼날처럼 뾰족한 싹을 내밀었다. 수숫대와 수숫잎, 들풀이 한데 어우러져 형성된 녹음이, 시퍼렇게 녹슨 구리 탄피 조각들을 모두 덮어 가려버렸다. (p396-397)     


할머니의 관이 이른 아침의 환한 빛 속에서 흉물스럽게 드러났다. 본래 관을 덮고 있던, 그 신비하고 장엄한 느낌을 자아내던 붉은색 칠은 이미 불꽃에 의해 색이 다 벗겨졌고, 세 손가락 두께만큼 발라져 있던 세사포(細絲布)의 청유는 불에 타면서 줄줄이 종횡으로 교차하는 깊은 줄무늬 균열을 만들어놓았다. 지금 할머니 관은 역한 냄새가 나는 기름을 한층 울퉁불퉁하게 칠해놓은 것처럼 새카맣게 반짝거렸다. 할머니의 관은 보기 드물게 거대했다. 열여섯 살짜리 아버지가 치켜 올라간 관 앞머리 쪽에 서면, 관의 높이는 그의 울대뼈와 나란한 정도였지만 관의 크기는 시원하게 숨도 쉴 수 없을 만큼 위압적이었다. (p413)   

    

장례식을 보러 온 사람들은 저마다 발끝을 치켜들고 서 있었다. 수천수만 개의 눈에서 쏟아져 나오는 빛이 마치 타오르는 달빛처럼 관 덮개를 둘러싸고 선 살아 있는 사람들과 종이로 된 사람들, 오래된 찬란한 문화와 반동적이고 낙후된 사상을 한데 휩싸안고 있었다. 아버지의 몸이 온통 악한 사람들의 눈에서 쏟아져 나오는 아름다운 빛으로 둘러싸여, 처음엔 마음속에서 자줏빛 포도 같은 분노가 주렁주렁 열렸다가 다음엔 오색찬란한 무지개 같은 고통이 한 줄기씩 이어졌다. 아버지는 길이가 무릎까지 오는 두툼한 하얀 상복을 입고 허리에는 회백색 삼 타래를 매고 반쪽을 말끔하게 밀어버린 머리통에는 네모반듯한 상모를를 덮고 있었다. 사람들 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시큼한 땀 냄새와 할머니 관 위에서 나는 기름 탄 냄새가 뒤범벅이 된 악취가 코를 찔러 아버지는 가만히 서 있을 수가 없었다. (p422)      


아버지는, 새빨간 수수가 하늘로 돌아가는 풍경을 바라보고 있던 할머니의 모습을 잊지 못하는 것처럼, 할머니가 무덤 속에서 또렷이 얼굴을 내밀고 있던 모습도 잊을 수가 없었다. (p423)      


사랑이라는 게 뭔가? 저마다의 대답이 있겠지만, 이 요상한 일이 무수한 영웅호걸과 요조숙녀를 시달려 죽게 했다. 할아버지의 연애 역사와 아버지의 애정의 광란, 그리고 사막처럼 창백했던 나 자신의 연애 경험에 근거해서, 나는 우리 집안 3대의 사랑에 부합되는 철칙을 도출해냈다. 열광적인 사랑의 첫 번째 요소는 가슴을 찌르는 고통이다. 찔린 심장에서는 송진 같은 액체가 뚝뚝 떨어지고, 사랑의 고통으로 인해 흘려야 하는 붉은 피는 위장에서부터 흘러나와 소장과 대장을 지나면서 오동나무 기름 같은 대변으로 바뀌어 체외로 배출된다. 잔혹한 사랑을 이루는 사랑의 두 번째 요소는 가차없는 비난이다. 사랑하는 쌍방 모두 산 채로 상대방의 가죽을 벗기지 못해 안달한다. 생리적인 가죽과 심리적인 가죽, 정신적인 가죽과 물질적인 가죽을 벗기고, 혈관과 근육과 퉁퉁 움직이는 내장과 검붉은 심장을 벗긴다. 그러고 난 뒤에 둘은 상대방을 향해 서로의 마음을 던지고, 두 마음은 공중에서 부딪쳐 박살이 난다. 얼음처럼 싸늘한 사랑을 이루는 세 번째 요소는 지속적인 침묵이다. 싸늘한 감정은 사랑하는 사람을 얼려 얼음과자로 만들어버린다. 우선은 차가운 바람 속에서 얼고 그다음에는 눈 속에서 얼다가 다시 꽁꽁 얼어붙은 강물 속으로 던져지고 마지막에는 현대 문명이 낳은 냉동고 안이나, 돼지고기나 조기를 보관하는 냉장실 속에 언 채로 걸려 있게 된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얼굴이 서리처럼 하얘지고 체온은 25도로 내려가, 입만 움찔거릴 수 있을 뿐 절대로 말은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말을 하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이미 말을 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인데 사람들은 그들이 짐짓 벙어리 노릇을 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열광적이고 잔혹하며 얼음처럼 싸늘한 사랑=위출혈+산채로 껍질 벗기기+벙어리 노릇하기이며, 이런 과정은 무한히 순환 반복되면서 그치지 않는다. (p464-465)      

[5. 기이한 죽음]

고향을 떠나온 지 10년 만에 나는 영리한 상류사회가 내게 물들인 거짓된 감정과 거짓된 생각을 가지고, 더러운 도시 생활의 냄새나는 물에 흠뻑 젖어 모공 하나하나에서까지 코를 찌르는 악취를 발산하게 된 몸을 이끌고 다시 한 번 작은할머니 무덤 앞에 섰다. 그때, 나는 뭇 무덤들을 다 참배하고 난 뒤 맨 마지막에 작은할머니의 무덤을 참배했다. 작은할머니의 짧고 찬란했던 일생은, 가장 영웅적이면서도 또한 가장 개자식 같던 우리 고향의 역사 위에 눈에 띄는 한 가닥 붓질을 해놓았다. 그녀는 그 기이한 죽음의 과정을 통해서 우리 가오미 둥베이 지방 사람들의 영혼 깊은 곳에서 혼미하게 잠자고 있던 어떤 신비한 감정을 불러냈다. 이런 신비한 감정은 단지 고향 노인들의 과거에 대한 회상 속에서만, 달콤하고 끈적거리는 암홍색 사탕무 시럽처럼 천천히 흘러가는 생각의 강물 속에서만, 비로소 싹이 트고 자라나고 장대해져서 미지의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강력한 사상적 무기가 된다. 나는 매번 고향에 돌아올 때마다 고향 사람들의 그 오래된 취한 눈 속에서 이런 신비한 힘의 계시를 받곤 한다. (p613-614)     


작은할머니는 그런 내게 너그러운 목소리로 말한다. “얘야, 돌아와라! 더 이상 돌아오지 않으면 이젠 가망이 없단다. 난 네가 돌아오고 싶어 하지 않는 걸 안다. 넌 온 천지에 가득한 파리들이 두렵고, 시커먼 구름처럼 몰려드는 모기들이 두렵고, 축축한 수수밭에서 다리 없이 기어 다니는 뱀들이 두렵지. 넌 영웅을 숭상하지만 개자식은 미워하지. 하지만 과연 ‘가장 영웅적인 사내면서 또한 가장 개자식’이 아닌 이가 어디 있겠느냐? 지금 내 앞에 서 있는 네게서, 도시에서 가져온 집토끼 냄새가 나는구나. 넌 당장 모수이 강으로 뛰어들어가 사흘 낮 사흘 밤을 그 물에 몸을 담가라. 강물 안의 메기가 네가 씻어낸 더러운 물을 마시고 그 머리 위에도 집토끼 귀가 생겨날까 봐 그게 걱정이긴 하다만!”

그러고 나서 작은할머니는 다시 홀연히 무덤 속으로 들어간다. 수수는 숙연하게 말없이 서 있고, 햇빛은 습하면서도 타는 듯이 뜨겁고, 바람은 없다. 작은할머니의 무덤 위에는 잡초가 무성하고, 풀 향기가 코를 찌른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멀리서 밭을 가는 농부들의 낭랑한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지금 작은할머니의 무덤을 에워싸고 있는 건 하이난 섬에서 가져온 잡종 수수다. 지금 가오미 둥베이 지방의 검은 흙을 울창하게 뒤덮고 있는 것도 모두 이 잡종 수수다. (p615)     


피바다 같은 붉은 수수는 이미 혁명의 거센 물살 속에서 씻은 듯이 사라져버렸고, 그것들을 대신한 것은 키가 작고 줄기는 굵고 잎은 촘촘하며 온몸에 하얀 가루가 묻어 있는, 수수 이삭이 개 꼬리처럼 긴 잡종 수수들이다. 이 수수는 생산량이 많고 냄새는 쌉쌀한데 많은 사람에게 변비를 가져다주어, 그때는 지부 서기 이상의 간부를 제외한 모든 고향 사람의 얼굴이 녹슨 쇳빛이었다.

나는 잡종 수수를 무척 혐오한다.

잡종 수수는 마치 영원히 무르익지 않는 것만 같다. 그것은 언제나 그 덜 익은 녹회색의 눈을 반쯤 감고 있다. 나는 작은할머니 무덤 앞에 서서, 이런 누추한 잡종들이 들쭉날쭉 자라나, 토종의 붉은 수수가 차지하고 있던 자리를 대신 차지하는 것을 본다. 이것들은 수수라는 이름은 헛되어 가지고 있지만 수수의 그 곧고 높은 줄기는 가지고 있지 않으며, 수수의 그 찬란한 색은 없다. 무엇보다도 저들에게 정말로 없는 것은 수수의 영혼과 풍모이다. 저들의 저 침침하고 어정쩡하게 좁고 긴 얼굴은 가오미 둥베이 지방의 순수하고 맑은 공기를 더럽히고 있다.

잡종 수수의 포위 속에서 나는 낙심한다.

잡종의 수수가 빈틈없이 들어찬 진영 안에서 나는 이제 다시는 존재하지 않게 된 진기한 광경을 떠올린다. 8월의 만추, 하늘은 높고 공기는 상쾌하고, 온 들판의 수수들이 그 붉은색으로 광대무변한 피바다를 이룬 광경을. 가을 물이 범람해서 수수밭이 온통 바다가 되면 혼탁한 누런 물속에서 검붉은 수수들은 머리를 치켜들고, 푸른 하늘을 향해 완강하게 호소하던 광경을. 만약 태양이 나타나 넓게 펼쳐진 수면을 비추면, 천지간은 이내 아주 웅장하고 아름다운 색채로 다시금 가득 차게 되던 그 광경을.

이것이 바로 내가 그리워하는, 그리고 영원히 그리워할, 인간이 도달 할 수 있는 최상의 경지, 최상의 아름다움의 경지이다.

하지만 나는 잡종의 수수들에 포위되어 있다. 그들은 뱀 같은 날개로 나의 몸을 둘둘 휘감고 있고, 온몸 안을 거침없이 흘러 다니는 초록색 독소로 나의 생각을 해치고 있다. 나는 벗어날 수 없는 굴레 속에서 숨을 헐떡이며, 헤어날 길 없는 고통 속에서 비애의 밑바닥에 깊이 가라앉아 있다.

지금, 쓸쓸한 소리가 망망한 대지 깊은 곳에서 전해져 온다. 이 소리는 익숙하면서도 낮설다. 마치 우리 할아버지의 소리 같기도 하고 우리 아버지의 소리 같기도 하고, 뤄한 큰할아버지의 소리 같기도 하고, 또 할머니와 작은할머니, 셋째 할머니가 내는 맑고 깨끗한 노랫소리 같기도 하다. 우리 온 가족의 망령이, 내가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음을 알려주는 계시를 보내고 있다. (p616-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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