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유진 오닐의 <밤으로의 긴 여로>

영화 <밤으로의 긴 여로> 1962년

by 노용헌

유진 오닐의 <밤으로의 긴 여로>는 오닐 가족의 실제 삶의 자서전이다. 가난한 아일랜드 이민자 출신으로 유랑 극단의 배우로 성공하지만 돈에 대한 지나친 집착 때문에 삼류 흥행배우로 전락한 아버지 제임스 오닐(극에서는 제임스 타이론), 남편을 따라 호텔을 떠돌며 생활하다 둘째(유진 타이론)를 홍역으로 잃고, 막내를 낳은 후 산후 고통에 시달리다 돌팔이 의사에게 모르핀을 맞고 마약중독자가 되어버린 어머니 엘라 퀸랜(메리 캐번 타이론), 난봉꾼 알코올 중독자로서 방탕한 생활을 일삼던 인생의 실패자 형 제이미 오닐(제임스 타이론 2세=제이미), 그런 형을 좋아하고 따랐던 예민한 성격의 허무주의자 막내 유진 오닐(에드먼드 타이론). 오닐이 이처럼 이름만 살짝 바꿔 자신의 가족을 극에 그대로 등장시킨 것은, 본인이 평생토록 피해 다녔던 가족사의 어두운 그림자들과 정면으로 맞닥뜨리고 용서와 화해를 구하기 위해서다.


밤으로의 긴 여로4.jpg

<밤으로의 긴 여로>의 상징성은 안개이다. 안개는 감추고 싶은 것을 숨겨주는 것이고, 메리와 에드먼드는 뭔가를 감추려고 한다. 메리는 모르핀을 맞는 것을 감추려하고, 에드먼드는 자신의 폐병을 감추려 한다. 그러나 안개는 언젠가는 걷히고 드러나게 마련이다. 가족에게는 언제까지나 감출 수 없는 것이다.


메리: “운명이 저렇게 만든 거지 저 아이 탓은 아닐 거야. 사람은 운명을 거역할 수 없으니까.

운명은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손을 써서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일들을 하게 만들지. 그래서 우리는 영원히 진정한 자신을 잃고 마는 거야” (p72)


티론 메리! 제발 부탁인데 과거는 잊어요!

메리 (감정이 개입되지 않은 차분한 음성으로) 왜요? 어떻게 그럴 수 있어요? 과거는 바로 현재예요. 안 그래요? 미래이기도 하고. 우리는 그게 아니라고 하면서 애써 빠져나가려고 하지만 인생은 그걸 용납하지 않죠. (p101)


메리 나도 당신을 사랑해요. 그 모든 일들에도 불구하고. (잠시 사이. 에드먼드가 무안해서 몸을 움직인다. 메리는 다시 초연한 태도가 되어 마치 멀리 있는 사람들에게 남의 얘기를 하듯 말한다.) 하지만 이건 고백해야겠어요. 당신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당신이 그렇게 술을 많이 마시는 줄 알았다면 절대로 당신하고 결혼하지 않았을 거예요. 처음 당신의 술친구들이 당신을 호텔 방까지 부축해 데려와서는 노크를 하고 내가 문을 열기도 전에 도망쳤던 기억이 아직도 나요. 그때 우린 아직 신혼이었어요, 기억나요?

티론 (가책이 느껴져 격하게) 기억 안 나! 신혼 때가 아니었어! 그리고 난 평생 누구 부축을 받아서 침대로 간 적도, 공연을 빼먹은 적도 없어! (P135)

밤으로의 긴 여로8.jpg

“안개는 우리를 세상으로부터 가려 주고 세상을 우리로부터 가려 주지. 그래서 안개가 끼면 모든 게 변한 것 같고 예전 그대로인 건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거야. 아무도 우리를 찾아내거나 손을 대지 못하지.”

“전 안개 속에 있고 싶었어요. 정원을 반만 내려가도 이 집은 보이지 않죠. 여기에 집이 있는지조차 모르게 되는 거죠. 이 동네 다른 집들도요. 지척을 구분할 수가 없었어요. 아무도 만나지 않았죠. 모든 게 비현실적으로 보이고 들렸어요. 그대로인 건 아무것도 없었어요. 바로 제가 원하던 거였죠. 진실은 진실이 아니고 인생은 스스로에게서 숨을 수 있는, 그런 다른 세상에 저 홀로 있는 거요. 저 항구 너머, 해변을 따라 길이 이어지는 곳에서는 땅 위에 있는 느낌조차도 없어졌어요. 안개와 바다가 마치 하나인 것 같았죠. 그래서 바다 밑을 걷고 있는 기분이었어요. 오래전에 익사한 것처럼. 전 안개의 일부가 된 유령이고 안개는 바다의 유령인 것처럼, 유령 속의 유령이 되어 있으니 끝내주게 마음이 편안하더라고요. (아버지가 걱정스러우면서도 못마땅해하는 눈길을 보내는 걸 보고 조롱하듯 히죽거린다.) 미친놈 보듯이 그렇게 보지 마세요. 맞는 말이니까. 세상에 인생을 있는 그대로 보고 싶어하는 사람이 어딨어요? 인생은 고르곤 셋을 하나로 합쳐놓은 것과 같아요. 얼굴을 보면 돌로 변해 버린다는 그 괴물들 말예요. 아니면 판이거나, 판을 보면 죽게 되고 -영혼이 말예요- 유령처럼 살아가게 되죠.”

<유진 오닐, 밤으로의 긴 여로, P157-159>

밤으로의 긴 여로7.jpg

에드먼드 (절박하게 애원하며) 제발요, 아버지, 신경 끄세요! (술병으로 손을 뻗어 술을 한 잔 따른다. 티론, 말리려다가 포기한다. 에드먼드, 술을 마신다. 잔을 내려놓는다. 표정이 변한다. 일부러 취기에 젖어 감상적인 태도 뒤에 숨고 싶어하는 것처럼 떠들기 시작한다.) 그래요, 어머닌 위에서 과거 속을 헤매는 유령이 되어서 돌아다니고, 우린 여기 앉아서 신경 안 쓰는 척하면서도 잔뜩 귀를 세우고 추녀 끝에서 안개 떨어지는 소리까지 듣고 있죠. (P189)


에드먼드 병 좀 밀어. 나도 한잔하게.

제이미 (갑자기 형답게 걱정하며 술병을 잡는다.) 아냐. 넌 안 돼. 내 앞에서는 안 돼. 의사 말 명심해. 네가 죽거나 말거나 아무도 신경 안 쓴다고 해도. 난 달라. 내 동생. 꼬맹아. 나 너 많이 사랑한다. 다른 건 다 잃었어. 이제 나한테 남은 건 너뿐이야. (술병을 더 가까이 끌어당기며) 그러니까 너한텐 술 안 줄 거야. (그의 취기 어린 감상 속에 진실함이 들어 있다.)

에드먼드 (짜증스럽게) 그런 소리 집어치워.

제이미 (마음이 상해서 표정이 굳어진다.) 내가 걱정하는 걸 안 믿는구나, 응? 주정뱅이 헛소리다 이거지. (술병을 동생에게 민다.) 좋아, 마시고 죽어.

에드먼드 (형이 마음 상한 걸 알고, 애정을 담아) 내가 형 맘을 왜 몰라. 이제 술 끊을 거야. 하지만 오늘 밤은 예외야. 오늘은 안 좋은 일이 너무 많았어. (한 잔 따른다.) 자, 마시자고. (마신다.) (P195)

밤으로의 긴 여로9.jpg

모르핀 중독자인 어머니, 알콜 중독으로 비참한 생을 마감한 형까지. 가족이란 서로가 상처를 주는 존재이면서도 서로의 상처를 치유하는 존재이다. 서로의 상처를 돌아봄으로써 가족을 이해하는 긴 여로(旅路)인 것이다.

밤으로의 긴 여로3.jpg


keyword
이전 14화호메로스의 <일리아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