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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용헌 Jan 24. 2023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

영화 휴 잭맨 주연 <레미제라블Les Miserables> 2012년

레미제라블: 뮤지컬 콘서트(2019) 레미제라블(2012) 레 미제라블(1998) 레 미제라블(1995) 레 미제라블(1982) 레 미제라블(2017) 레미제라블(2011) 레 미제라블(1978) 레 미제라블(1958)

세계 4대 뮤지컬이라 불리는 [레미제라블], [오페라의 유령], [캣츠], 그리고 [미스 사이공]은 모두 프로듀서 카메론 매킨토시의 손에서 태어났다. 이 시대 최고의 영향력을 지닌 뮤지컬 프로듀서로 손 꼽히는 그에게 알란 파커(<버디>, <에비타> 감독)를 비롯한 수많은 감독들이 뮤지컬 [레미제라블]의 영화화를 제의했지만, 초연 공연으로부터 25주년이 지날 때까지도 영화 <레미제라블>은 진척이 보이지 않았다. 그때, 아카데미 4관왕에 빛나는 영화 <킹스 스피치>의 톰 후퍼 감독이 나타났다. <레미제라블>은 톰 후퍼 감독의 4번째 장편 연출작이다.     


톰 후퍼 감독과 프로듀서 카메론 매킨토시에게 힘을 실어준 것이 바로 다시는 한 자리에 모일 수 없을 것 같은 헐리우드 최고의 초호화 캐스팅이다. 휴 잭맨, 앤 해서웨이, 러셀 크로우, 아만다 사이프리드, 그리고 헬레나 본햄 카터까지! 이름만으로도 영화를 신뢰할 수 있는 명배우들이 영화 <레미제라블>에 대거 참여한 것이다. 특히 팡틴을 연기한 앤 해서웨이는 그해 아카데미 여우조연상까지 받았다. 앤 해서웨이가 연기한 팡틴이 부른 “I Dreamed a Dream”은 해당 부분만 따로 놓고 봐도 연기도 노래도 놀랍다.     


전 세계적으로 사랑을 받은 뮤지컬 〈레미제라블〉을 뮤지컬영화로 만든 것이다. 〈레미제라블〉은 19세기 프랑스의 대문호인 빅토르 위고(Victor-Marie Hugo)의 동명 소설이 원작이다. 혁명정신과 노동자와 농민들의 저항 정신,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의 인간애를 다루고 있다. ‘레미제라블’은 프랑스어로 ‘불쌍한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뮤지컬영화 〈레미제라블〉은 피 끓는 혁명정신, 노동자와 농민들의 거친 저항 정신,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의 인간애를 다루고 있으며, 영화 전체의 이야기를 노래로 이끌어 가는 송 스루(song-through) 형식의 뮤지컬 영화다.      

법률과 풍습에 의하여 인위적으로 문명의 한복판에 지옥을 만들고

인간적 숙명으로 신성한 운명을 복잡하게 만드는 영원한 사회적 형벌이 존재하는 한,

무산계급에 의한 남성의 추락, 기아에 의한 여성의 타락,

암흑에 의한 어린이의 위축, 이 시대의 이 세 가지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어떤 계급에 사회적 질식이 가능한 한, 다시 말하자면, 그리고 더욱 넓은 견지에서 

말하자면, 지상에 무지와 빈곤이 존재하는 한, 이 책 같은 종류의 책들도 

무익하지는 않으리라. - 1862년 1월 1일, 오트빌 하우스에서     

1부 [팡세]

“인간은 스스로의 짐인 동시에 유혹인 육신을 지니고 있다. 인간은 그것을 짊어지고 다니며 그것에 끌려다닌다.

인간은 그것을 감시하고 제어하고 억제하여야 하며, 마지막 극단에 이르러서가 아니면 굴복해서는 아니 된다. 그러한 굴복에 있어서도 역시 과오는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저질러진 과오는 용서받을 수 있다. 그것은 하나의 추락이기는 하지만, 무릎을 꿇는 추락에 불과하므로 기도로써 끝낼 수 있는 것이다.

성자(聖者)가 되는 것은 예외요, 올바른 사람이 되는 것은 통칙이다. 방황해라, 태만해라, 죄를 지어라, 그러나 올바른 사람이 돼라.

가급적 죄를 적게 짓는 것은 인간의 법이다. 전혀 죄를 짓지 않는 것은 천사의 꿈이다. 지상의 만물은 죄를 면치 못한다. 죄는 인력(引力)이다.”

사람들이 고래고래 소리 지르고 걸핏하면 화를 내는 것을 보면, 그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저런! 저런! 모두가 저지르는 저런 짓은 커다란 죄다. 저건 위선이 질겁하여 엉겁결에 항변하고 피신하려는 거다.”

사회의 무거운 짐 아래 있는 여자들이나 가난한 사람들에게 그는 관대했다. “여자와 어린이, 하인, 약자, 빈자, 무식자들의 과오는 남편과 아버지, 주인, 강자, 부자, 학자들의 탓이다.”

그는 또 이렇게 말하곤 했다. “무식한 자들에게는 가급적 여러 가지 것을 가르쳐 주어야 한다. 무상 교육을 하지 않는 것은 사회의 죄다. 사회는 스스로 만들어 낸 암흑에 책임을 져야 한다. 마음속에 그늘이 가득 차 있으면 거기에서 죄가 범해진다. 죄인은 죄를 범한 자가 아니라, 그늘을 만든 자다.” 

<빅토르 위고, 레미제라블 1, P30-31>     


1793년은 슬프게도 하나의 항변이었소. 당신은 그것이 가혹했다고 생각하시지만, 그럼 모든 왕정 시대는 어떻소? 카리에는 도둑놈이지만, 몽트르벨에게는 어떤 이름을 붙이지요? 푸키에탱빌은 거지지만, 라무아뇽바빌에 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오? 마야르는 극악무도하지만, 소타반은 어떻소? <페르 뒤셴>은 흉포하지만, 르텔리에 신부에 대해서는 어떤 수식어를 붙이실 거요? 주르당쿠프테트는 괴물이지만, 루부아 후작만은 못했소. 나는 오스트리아 황녀이자 프랑스 왕비였던 마리 앙투아네트를 가엾게 여기지만, 나는 또한 루이 대왕 치하였던 1685년 아기에게 젖을 주다가 잡혀 허리까지 발가벗겨진 채 아기와 떨어져 말뚝에 결박되었던 저 가련한 신교도 부인도 가엾게 생각하오. 그녀의 젖가슴은 젖으로 부풀었고 가슴은 고통으로 부풀었소. 배가 고파 파리해진 아기는 그녀의 젖가슴을 보면서 괴로워하며 울부짖는데, 사형집행인은 어머니요 유모인 그 부인에게 ‘개종하라!’라고 말하면서 아기의 죽음과 양심의 죽음 중 양자택일을 하게 하였소. 한 어머니에게 적용된 이 탄탈로스의 처형을 당신은 어떻게 보시오? 이 점을 잘 기억해두시오. 프랑스혁명은 이유가 있었소. 그 분노는 미래에 용서를 받을 것이오. 그 결과는 더 나은 세계요. 그 가장 무시무시한 타격으로부터 인류에 대한 애무가 나오는 거요. 이만 줄이겠소. 이만 그치겠소. 내가 너무나도 유리하니까. 더구나 나는 이제 곧 죽을 것이오.  (P84-85)     


파브롤의 소심한 가지 치는 일꾼이자 툴롱의 무서운 죄수였던 장 발장은 십구 년 동안 형무소에서 형성해 놓은 그대로 두 가지 악행을 행할 수 있게 되었다. 첫째는 자기가 받은 악에 대한 보복으로서 행하는 급속하고 반사적이고 무의식적이고 본능적인 악행이요, 둘째는 그러한 불행이 줄 수 있는 그릇된 생각을 가지고서 마음속에서 따져 생각한 나머지의 진지하고 중대한 악행이다. 행동하게 전에 그가 하는 사색은 연속적인 세 단계를 거쳤는데, 그것은 어떤 종류의 기질을 가진 자들만이 거칠 수 있는 순서로서, 추리, 의지, 집요함이었다. 그의 행위의 원동력은 상습적인 분노, 마음의 고통, 자기가 당한 불공평에 대한 뿌리 깊은 감정, 반발(심지어 착하고 순진하고 올바른 사람들에 대해서까지도, 만약 그런 사람들이 있다면 말이지만)이었다. 그의 모든 사상의 출발점은 도착점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법률에 대한 증오였는데, 이러한 증오심은 만약 그것이 발전 중에 하늘의 뜻에 의한 사건으로 말미암아 멈추어지지 않는다면, 어느 때엔가는 사회에 대한 증오가 되고, 다음에는 인류에 대한 증오가 되고, 또 다음에는 천지 만물에 대한 증오가 되어, 마침내는 누구든, 어떤 생물이든 상관없이 해치고 싶은 끊임없고 막연한 야수적 욕망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통행권에 장 발장을 ‘극히 위험한 인물’이라고 규정해 놓은 것은 무리한 일이 아니었다.  (P172-173)     


주교가 그에게 다가서더니 나지막한 음성으로 말했다. 

“잊지 마시오. 결코 잊지 마시오. 이 은을 정직한 사람이 되기 위하여 쓰겠다고 내게 약속한 일을.”

꿈에도 약속한 기억이 없는 장 발장은 그저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주교는 그 말을 할 때 마디마디에 힘을 주었다. 그는 엄숙한 어조로 다시 말을 이었다. 

“장 발장, 나의 형제여. 당신은 이제 악이 아니라 선에 속하는 사람이오. 나는 당신의 영혼을 위해서 값을 치렀소. 나는 당신의 영혼을 암담한 생각과 영벌(永罰)의 정신에서 끌어내 천주께 바친 거요.”  (P192-193)      

이 오스카들의 이름은 하나는 툴루즈의 펠릭스 톨로미에스이고, 또 하나는 카오르의 리스톨리에, 또 하나는 리모주의 파뫼유, 마지막은 몽토방의 블라슈벨이었다. 물론 저마다 애인이 있었다. 블라슈벨은 영국에 갔다 온 일이 있었기 때문에 파부리트라고 영국식으로 불리는 여자를 사랑하고 있었고, 리스톨리에는 달리아라는 꽃 이름을 별명으로 가진 여자를 열렬히 사랑하고 있었고, 파뫼유는 조제핀을 줄여서 제핀이라고 부르는 여자를 우상처럼 사랑하고 있었고, 톨로미에스에게는 햇빛 같은 아름다운 금발을 가졌기 때문에 블롱드라고 불리는 팡틴이라는 여자가 있었다.  (P220)     


어느 날 그는 그 고장 사람들이 열심히 쐐기풀을 뽑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그 뽑힌 풀이 높이 쌓인 채 이미 말라 버린 것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벌써 바싹 말라 버렸소. 그렇지만 그 용도를 안다면 좋을 것이오. 쐐기풀은 여릴 때에는 잎사귀가 훌륭한 야채가 되고, 쇠었을 때에는 삼이나 어저귀처럼 줄기와 섬유가 생기는데, 이 쐐기풀로 짠 천은 삼베와 같소. 쐐기풀은 잘게 베어 놓으면 가금의 모이가 되고, 찧어 놓으면 뿔달린 짐승의 밥이 되오. 쐐기풀 씨를 꼴에 섞어서 주면 동물의 털에 윤기가 나고, 그 뿌리를 소금에 섞어 놓으면 아름다운 노란 물감이 되오. 게다가 쐐기풀은 두 번이나 베어 들일 수 있는 훌륭한 꼴이오. 그런데 쐐기풀에 뭐가 필요하겠소? 땅만 있으면 되오. 보살필 필요도 없고 땅을 갈 필요도 없소. 다만 그 씨는 익는 족족 떨어지기 때문에 거둬들이기가 좀 곤란할 뿐이오. 그뿐이오. 사람들이 조금만 수고하면 쐐기풀은 유용할 것인데, 내버려 두면 해롭게 되오. 그러면 사람들은 그것을 죽여 버리지. 사람들은 얼마나 쐐기풀과 비슷한가!” 한참 잠자코 있다가 그는 덧붙였다. “여러분, 이걸 잘 기억해 두시오. 세상에는 나쁜 풀도 나쁜 사람도 없소. 다만 나쁜 농부가 있을 뿐이오.”  (P296-297)         

아스투리아의 농민들은 이렇게 확신하고 있다. 즉 한배의 이리 새끼들 중에는 으레 개 한 마리가 섞여 있는데, 내버려 두면 그 개가 트면서 다른 이리 새끼들을 다 잡아먹어 버리기 때문에 어미가 그 개를 죽여 버린다는 것이다. 

이 개에게 인간의 상판을 주면 그것이 곧 자베르다.

자베를 옥중에서 태어났는데, 어머니는 카드 점을 치는 점쟁이였고, 그 남편도 감옥살이를 하고 있었다. 자베르는 자라면서, 자기가 사회 밖에 있다고 생각하고 사회 속에 되돌아가기를 단념했다. 그는 사회가 두 부류의 인간들을 되돌릴 길 없이 사회 밖에 존속시켜 놓고 있는 데 주목했는데, 그 부류란 사회를 공격하는 사람들과 사회를 지키는 사람들이었다. 그는 이 두 부류 중에서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고, 동시에 뭔지 모를 엄격, 규율, 정직의 본성과 아울러, 자기가 속한 그 자유분방한 생활을 하는 족속들에 대한 말할 수 없는 증오심을 자신 속에 느끼고 있었다. 그는 경찰에 들어갔다. (P307)   

  

"나는 당신 말을 들었소. 나는 당신이 말한 것을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소. 나는 그것이 진실이라고 믿고 있고, 그것이 진실이라고 느끼고 있소. 나는 당신이 공장을 떠난 것조차 모르고 있었소. 왜 나한테 와서 말해 주지 않았소? 그건 그렇고, 당신의 빚은 내가 갚아 드리고, 아이도 불러 드리리다. 아니면 당신이 아이한테로 가도 좋소. 당신은 여기서 사시든지 파리로 가시든지. 좋을 대로 하시오. 당신과 아이는 내가 책임지겠소. 원하신다면 일은 안 해도 좋소. 필요한 돈은 내가 다 드리겠소. 당신은 다시 행복하게 되고 다시 정숙한 여자가 되시오. 아니, 그뿐 아니라 잘 들으시오. 지금 당장 당신에게 말하는데, 모든 것이 당신 말과 같다면, 나는 그것을 의심하지 않지만, 당신은 결코 타락한 것이 아니고, 또 천주님 앞에서 정숙하고 순결하기를 결코 그친 적이 없었소. 오! 가엾은 여자!”  (P353-354)  

   

그는 잠시 미래를 생각했다. 오오. 자수를 하고 자백을 한다! 그는 버려야 할 모든 것을. 다시 취해야 할 모든 것을 생각하고 막심한 절망을 느꼈다. 그래. 이처럼 훌륭하고 깨끗하고 빛나는 생활에도, 이 만인의 존경에도, 명예에도, 자유에도 고별을 해야 한단 말인가! 이제는 들에 산책도 못 가리라. 이제는 5월의 지저귀는 새소리도 듣지 못하리라. 이제는 어린아이들에게 적선도 못 하리라! 이제는 자기를 바라보는 감사와 애정의 정다운 눈길도 느끼지 못하리라! 자기가 지은 이 집도, 이 방도, 이 작은 방도 떠나야 하리라! 이 순간 모든 것이 그에게 아름다워 보였다. 이제는 이 책들도 읽지 못하리라. 이제는 이 아담한 흰 나무 책상에서 글도 쓰지 못하리라! 그가 부리는 유일한 하녀인 그의 늙은 문지기 여자도 이제 아침에 커피를 올려다 주지 않으리라. 아아, 슬프다! 그 대신에 죄수들, 목의 쇠고리, 붉은 옷, 발의 쇠사슬, 피로, 감방, 야외용 침대, 그밖에 가지가지의 지긋지긋한 것들! 이런 나이에, 자기 같은 과거를 지내 온 사람에게! 아직 젋기라도 하면 또 몰라! 그렇지만 늙은 놈이 아무한테나 반말을 듣고, 간수한테 몸수색을 당하고, 간수의 몽둥이찜질을 받고, 양말도 없이 징 박힌 구두를 신고, 족쇄를 검사하는 간수의 쇠망치에 아침저녁으로 다리를 내밀고, 구경꾼들한테는 “저기 저 사람이 몽트뢰유쉬르메르의 시장이었던 그 유명한 장 발장이야.”라는 말을 들으면서 그들의 호기심의 대상이 되어야 한단 말인가! 저녁에는 땀 철철 흘리며 녹초가 되어 푸른 모자를 눈 위로 푹 눌러쓰고 감시자의 채찍질을 받으면서 감옥선(船)의 사다리 층계를 두 단씩 올라가야 한다! 오오, 얼마나 비참한 일이냐! 운명이, 그래, 지적인 인간처럼 심술궂을 수 있고 인간의 마음처럼 잔인해질 수 있을까!

그런데 그는 아무리 해도 다람쥐 쳇바퀴 돌 듯 그의 명상 밑바닥에 있는 그 고통스러운 딜레마에 줄곧 빠져드는 것이었다. 천국에 머물면서 악마가 될 것인가! 지옥에 돌아가서 천사가 될 것인가!   (P414-415)     

분명히 사람들은 눈앞에 장 발장을 보고 있었다. 그는 빛나고 있었다. 그의 출현은 조금 전 그렇게도 알 수 없었던 그 사건을 백일하에 드러내 놓기에 충분했다. 이제는 아무런 설명도 필요 없이 그 모든 군중은 다른 사람이 자기 대신에 유죄 판결을 받지 않도록 자수하는 그의 그 단순하고도 숭엄한 행위를 대번에, 그리고 한눈에 이해했다. 그 세세한 사실들이며 망설임, 있을 수 있는 사소한 저항 같은 것들은 이 빛나는 거대한 사실 속에 사라져 버렸다.  (P489)     

2부 [코제트] 

보나파르트가 워털루의 승리자가 되는 것. 그것은 더 이상 19세기의 법칙에는 없었다. 다른 일련의 사실들이 일어나려하고 있었는데, 거기에는 더 이상 나폴레옹의 자리가 없었다. 여러 사건들이 오래전부터 그에게 악의를 나타내고 있었다.

이 거대한 인간도 실각할 때가 온 것이다.

인류의 운명에서 이 한 사람의 과도한 무게는 평형을 깨뜨리고 있었다. 이 사람은 혼잣몸으로 전 인류보다 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단 한 사람의 머릿속에 과도하게 집중되어 있는 인류의 모든 활력, 한 인간의 두뇌에 떠오르는 세계, 만약 그것이 지속된다면, 그것은 문명의 파멸을 초래하리라. 부패하지 않는 최고의 공정성을 위해 재고할 때가 와 있었다. 정신계에도 물질계와 같이 일정한 중력 관계가 있는데, 그 기초가 되는 원리와 요소가 아마 불만을 표했으리라. 연기를 뿜는 피, 넘쳐 나는 묘지들, 눈물을 흘리는 어머니들, 이런 것들이 그것을 웅변으로 옹호한다. 대지가 너무 무거운 짐으로 시달릴 때에는 어둠의 신비로운 신음 소리가 있어서 그것이 심연에서도 들린다. 

나폴레옹은 무한 속에서 고발되어 있었고, 그의 추락은 결정되어 있었다. 

그는 하늘의 뜻을 거스르고 있었다.

워털루는 결코 하나의 전투가 아니다. 그것은 세계의 얼굴을 바꾸는 것이다.   (P54-55)    

 

19세기에 그들이 강대해진 원천이 워털루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어떤 승전 후에 갑자기 커진 것은 야만적인 국민들뿐일 것이다. 그것은 소나기로 불은 격류의 일시적인 허영이다. 개화된 국민들은, 특히 우리들이 살고 있는 시대에는 한 장수의 행운이나 불운에 의해 지위가 올라가거나 떨어지지 않는다. 인류에게 그러한 국민들의 무게는 전쟁 이상의 어떤 것에 기인한다. 다행히도 그들의 명예, 품격, 문화, 천재적 재능은 저 노름꾼인 영웅들과 정복자들이 전쟁이라는 제비뽑기에 걸 수 있는 번호가 아니다. 흔히 전투에는 패하되 발전을 획득한다. 영광은 줄되 자유는 많아진다. 북소리는 사라지되 이성은 입을 연다. 그것은 지는 자가 이기는 노름이다. 그러므로 양쪽에서 냉정하게 워털루를 이야기하자. 우연에 속한 것은 우연에 돌리고, 신에 속한 것은 신에게 돌리자. 워털루는 무엇인가? 하나의 승리인가? 아니다. 하나의 요행이다. 

유럽이 얻은 요행이오, 프랑스가 지불한 요행이다.   (P78)     


워털루는, 문제의 최고 관점에서 본다면, 그 의도에 있어서 반혁명적인 승리다. 그것은 프랑스에 대항한 유럽이다. 그것은 파리에 대항한 페테르부르크와 베를린과 빈이다. 그것은 창의에 대항한 ‘현상 유지’다. 그것은 1815년 3월 20일을 통해 공격한 1789년 7월 14일이다. 그것은 진압할 수 없는 프랑스의 폭동에 대항한 군주 국가들의 법석이다. 이십육 년 전부터 폭발해 있던 이 거대한 국민을 마침내 소멸하는 것. 그것이 꿈이었다. 그것은 워털루는 브라운슈바이크 가, 나소 가, 로마노프 가, 호엔촐레른 가, 합스부르크 가와 부르봉 가의 제휴였다. 워털루는 엉덩이에 신수권(神授權)을 태우고 있었다. 제국이 독재적이었기 때문에 왕국이 사물의 자연적인 반동으로서 부득이 자유주의적이어야만 했다는 것은 사실이고, 승리자들로서는 유감천만이었으나, 워털루에서 본의 아니게 입헌적 질서가 나온 것 또한 사실이다. 왜냐하면 혁명은 진정으로 억제될 수 없는 것이고, 천의이자 절대적으로 숙명적인 것이므로 항상 다시 나타나기 때문인데, 워털루 이전에는 오랜 왕권들을 타도한 보나파르트에서 나타났고, 워털루 이후에는 헌장을 양여하고 받아들인 루이 18세에서 나타났다. 보나파르트는 나폴리의 왕좌에 한 마부를 앉혀 놓고 스웨덴의 왕좌에 한 상사를 앉혀 놓음으로써, 평등을 입증하는 데 불평등을 사용했다. 루이 18세는 생투앵에서 인권 선언에 서명했다. 혁명이란 무엇인가를 이해하고 싶다면 그것을 ‘진보’라고 불러 보라. 그리고 만약 진보란 무엇인가를 이해하고 싶다면 그것을 ‘내일’이라고 불러 보라. ‘내일’은 억제할 수 없게 자신의 일을 하는데, 그 일을 바로 오늘부터 한다. 그것은 이상하게도 언제나 제 목적에 도달한다. 그것은 웰링턴을 이용하여 한낱 병사에 불과하던 푸아를 웅변가로 만든다. 푸아는 우고몽에서 쓰러졌다가 연단에서 다시 일어선다. 그렇게 진보는 일을 한다. 

<빅토르 위고, 레미제라블2, P84-86>   

이튿날 툴롱의 신문에서 다음과 같은 몇 줄의 기사를 볼 수 있었다. 

1823년 11월 17일. 어제 오리옹호에서 노역에 종사하던 한 죄수가 선원 한 명을 구조하고 돌아오다가 바다에 떨어져 익사했다. 시체는 발견되지 않았다. 시체는 해군 공창의 돌출부 말뚝들 아래로 들어간 것으로 추측된다. 그 사나이의 수감 번호는 9430호이고 이름은 장 발장이다.   (P126)    

 

그런데 갑자기, 그 깊은 고요 속에 새로운 소리가 올라왔다. 천상의 소리, 신성한 소리,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소리. 그것은 어둠 속에서 나오는 찬미가였다. 밤의 어둡고 무서운 고요 속에서 울리는 황홀한 기도와 화성(和聲). 여자들의 목소리, 그러나 동시에 동정녀들의 맑은 음조와 어린아이들의 순진한 음조로 이루어진 목소리, 지상의 것이 아닌 그런 목소리, 갓난아기들에게는 아직도 들리고 있고 죽어 가는 사람들에게는 이미 들리는 그런 목소리. 그 노랫소리는 정원에 우뚝 솟아 있는 어둠침침한 건물에서 들려왔다. 악마들의 야단법석이 멀어져 가고 있을 때, 천사들의 합창이 어둠 속에서 다가오는 것 같았다. 

코제트와 장 발장은 무릎을 꿇었다.

그들은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그들은 자기들이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했으나, 그들은 둘 다, 그 사나이도 어린 아이도, 그 회개한 자도 순결한 자도 무릎을 꿇어야만 한다고 느꼈다. 

그럼에도 그 목소리에는 그 건물에 사람이 없는 것 같은 그런 이상한 것이 있었다. 그것은 사람이 살지 않는 집 안에서 나는 초자연적인 노래 같았다. 

그 목소리가 노래하는 동안, 장 발장은 더 이상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그는 이제 밤을 보지 않고 푸른 하늘을 보고 있었다. 그는 우리가 모두 우리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날개들이 펼쳐지는 것을 느끼는 것 같았다.  (P271)     


이 책은 무한을 첫째 인물로 삼고 있는 한 편의 드라마다. 

인간은 둘째 인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가는 길에 수도원 하나가 있었으므로, 나는 그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왜? 수도원은 동양에도 서양에도, 고대에도 현대에도, 이교에도, 불교에도, 이슬람교에도, 기독교에도 특유한 것으로서 인간에 의해 무한에 적용된 환등 장치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여기는 어떤 관념들을 지나치게 부연할 자리가 전혀 아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조심성, 우리의 조건, 그리고 심지어 우리의 분노까지도 절대적으로 보존하면서도, 우리는 이런 말을 하지 않을 수 없거니와, 우리가 인간 속에서 무한을 만날 때마다, 그것을 잘 이해했든 잘못 이해했든 간에, 우리는 존경심에 사로잡힘을 느낀다. 유대교 외당에도, 이슬람교 사원에도, 불료 사찰에도, 흑인 사당에도 우리가 증오하는 추악한 일면과 우리가 썩 좋아하는 숭고한 일면이 있다. 인간의 벽에 비치는 하느님의 반사는 얼마나 사람을 정관케 하며 얼마나 깊은 몽상에 잠기게 하는가!  (P349-350)    

  

신에게 기도하다. 이 말은 무슨 뜻인가?

우리들 밖에 하나의 무한이 있는가? 이 무한은 단일(單一)하고, 내재적(內在的)이고, 항구적인가? 그것은 무한하므로, 그리고 만약에 그것에 실체(實體)가 없다면 그것은 거기에 한정되고 말 것이므로, 그것은 필연적으로 지적인가? 우리는 우리들 자신에게 존재의 관념밖에 부여할 수 없는데, 이 무한은 우리들 속에 본질의 관념을 눈뜨게 하는가? 바꾸어 말하자면, 이 무한은 절대적인 것이고, 우리는 그것에 대해 상대적인 것 아닌가?

우리들 밖에 하나의 무한이 있는 동시에 우리들 속에도 하나의 무한이 있지 않은가? 이 두 개의 무한이(얼마나 무서운 복수인가!) 서로 겹쳐 있지 않은가? 둘째의 무한은 말하자면 첫째의 무한 아래 있지 않은가? 그것은 첫째 것의 거울이요, 반영이요, 반향이요, 첫째의 심연과 중심을 같이하고 있는 심연 아닌가? 이 둘째의 무한 역시 지적인 것인가? 그것은 생각하는가? 그것은 사랑하는가? 그것은 바라는가? 만약에 그 두 개의 무한이 지적이라면, 그것들은 제각기 하나의 바라는 근원이 있고, 아래의 무한 속에 자아(自我)가 있듯이 위의 무한 속에도 하나의 자아가 있다. 이 아래의 자아, 그것이 영혼이고, 이 위의 자아, 그것이 신이다. 

생각에 의해 아래의 무한을 위의 무한과 접촉시키는 것, 그것을 일컬어 기도한다고 한다.  (P361)    

    

보는 것과 보여 주는 것,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철학은 하나의 에너지여야만 한다. 그것은 인간을 개선하는 것을 노력과 결과로 삼아야 한다. 소크라테스는 아담 속에 들어가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만들어 내야 한다. 바꾸어 말하면, 천복(天福)의 인간에게서 지혜의 인간이 나오게 해야 한다. 에덴 동산을 리세움 동산으로 바꾸어야 한다. 학문은 하나의 강심제여야만 한다. 향락하는 것은 그 얼마나 한심스러운 목적이며 그 얼마나 시시한 야심인가! 금수(禽獸)도 향락한다. 생각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영혼의 참다운 승리다. 사람들의 갈증에 사상을 내놓고, 그들 모두에게 강장제로서 신의 관념을 부여하고, 그들 속에서 양심과 학문이 친화케 하고, 그 신비로운 대조에 의해 그들을 올바른 사람으로 만드는 것, 이러한 것이 철학의 진정한 구실이다. 윤리는 진리들의 개화다. 정관(靜觀)은 행동으로 이끌어 간다. 절대적인 것은 실제적인 것이어야 한다. 이상(理想)은 인간 정신에서 호흡할 수 있고, 마실 수 있고, 먹을 수 있어야 한다. “가져라, 이것은 나의 살, 이것은 나의 피다.”라고 말할 수 있는 권리를 갖는 것이 이상이다. 지혜는 일종의 신성한 성찬식이다. 그러한 조건에서야말로 지혜는 학문의 헛된 애호이기를 지양하여 인류 결합의 최고 유일의 방식이 되고, 철학에서 종교로 올라간다.  (P365)     


장 발장은 한쪽 사람들의 속죄는 잘 이해하고 있었다. 개인적인 속죄, 자기 자신을 위한 속죄는, 그러나 또 한쪽 사람들의 속죄는, 그 허물 없고 순결한 여자들의 속죄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전율을 느끼면서 자문했다. ‘무엇을 속죄하는 것일까? 무슨 속죄일까’

하나의 목소리가 그의 양심 속에서 대답했다. ‘인간의 너그러움 중에서도 가장 숭고한 것, 즉 남을 위한 속죄다.’    (P453)    

3부 [마리우스]

질노르망 씨는 사위와 아무런 관계도 갖지 않았다. 대령은 그에게 ‘불한당’이고, 그는 대령에게 ‘멍텅구리’였다. 질노르망 씨는 때때로 대령의 ‘남작 감투’를 조롱거리로 삼기 위해서가 아니면 결코 그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퐁메르시는 결코 그의 아들을 만나 보려고 하지도, 그에게 말을 해 보려고 하지도 않기로 명백히 합의했는데, 위반하면 그의 아들은 쫓겨나고 상속권을 박탈당한다는 것이었다. 질노르망 집안 사람들에게 퐁메르시는 페스트 환자였다. 그들은 그들 마음대로 어린아이를 기르기를 바랐다. 대령이 이러한 조건을 받아들인 것은 아마 잘못이었을 것이나, 그는 그것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고, 그렇게 하는 것이 잘하는 일이고 자기만을 희생하는 일이라 생각했다. 질노르망 영감의 유산은 보잘것없었으나, 언니 질노르망 양의 유산은 막대했다. 여전히 처녀인 이 이모는 어머니 쪽의 유산으로 굉장한 부자였고, 그녀의 여동생의 아들은 그녀의 당연한 상속인이었다. 

어린아이의 이름은 마리우스인데, 자기에게 아버지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그 이상은 아무것도 몰랐다. 아무도 그에 관해서 그에게 입을 열지 않았다.  (P79)     


파리에는 그런 종류의 결사들 중에서도 특히 ‘ABC의 벗들’이라는 서클이 있었다.

‘ABC의 벗들’이란 무엇이었는가? 겉으로는 어린아이들의 교육을 목적으로 하는 단체였으나 사실은 인간들의 재건이 목적이었다. 

그들은 자기들이 ‘ABC의 벗들’이라고 공언하고 있었다. ABC(아베세)라는 것은 Abaisse(아베세)로서, 민중이라는 뜻이었다. 그들은 민중을 끌어올리고자 했다.  (P133)     


그의 떠들썩한 친구들이 호탕스럽게 절대에 탐닉하여 찬란한 혁명의 모험들을 찬미하고 환호하는 반면, 콩브페르는 진보가 이루어지게 두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어져 있었다. 좋은 진보, 차가울지는 몰라도 깨끗한 진보, 체계적일지라도 탓할 데 없는, 냉정한 것일지라도 요지부동한 진보를 하게 두기를, 콩브페르는 무릎을 꿇고 합장하여, 미래가 아주 순백하게 도래하고, 아무것도 국민들의 고결하고 막대한 발전을 교란함이 없기를 기원했으리라. “선은 순결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그는 끊임없이 되뇠다. 그리고 정말, 혁명의 위대함, 그것이 눈부신 이상을 응시하고 피와 불을 무릅쓰고 뇌성벽력을 뚫고 거기로 날아가는 것이라면, 진보의 아름다움, 그것은 오점이 없는 것이고, 한쪽을 상징하는 워싱턴과 또 한쪽을 구현하는 당통 사이에는 백조의 날개를 가진 천사와 독수리의 날개를 가진 천사의 거리만큼의 차이가 있다.  (P140)     

이 경탄할 만한 복잡한 누옥인 사회구조 아래에는 온갖 굴착들이 있다. 종교의 갱도, 철학의 갱도, 정치의 갱도, 경제의 갱도, 혁명의 갱도가 있다. 어떤 사람은 사상의 곡괭이로 파고, 어떤 사람은 숫자의 곡괭이로 파고, 어떤 사람은 분노의 곡괭이로 판다. 사람들은 하나의 묘지에서 또 하나의 묘지로 서로 부르고 서로 대답한다. 이상향들이 지하에서 그러한 도관들 속에서 뻗어 간다. 그것들은 거기서 사방으로 가지를 뻗친다. 그것들은 이따금 거기서 서로 만나고, 거기서 서로 친해진다. 장 자크 루소는 자기의 곡괭이를 디오게네스에게 빌려 주고, 디오게네스는 자기의 제등(提燈)을 그에게 빌려 준다. 간혹 그것들은 거기서 서로 싸운다. 칼뱅은 소시니아스의 머리카락을 잡는다. 그러나 아무것도 목적을 향한 그 모든 활력의 긴장을 지지하지도 중단시키지도 않고, 그 암흑 속을 오가고, 오르내리고, 다시 오르면서, 서서히 위아래를 바꾸어 놓고 안팎을 뒤집어 놓는 그 동시적인 광범한 활동을 저지하지도 중단시키지도 않는다. 알려지지 않은 엄청난 득실거림. 사회는 그 표면은 그대로 둔 채 그 내장을 변화시키는 이 굴착을 거의 알아차리지 못한다. 지하의 층들이 많은 만큼 공사들도 가지가지, 굴착들도 가지각색. 이 모든 깊은 발굴 작업들에서 무엇이 나오는가? 미래가.

깊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더 일꾼들은 신비로워진다. 사회철학자가 알아볼 수 있는 단계까지 그 일은 좋다. 그 단계를 넘어서면 그것은 수상쩍고 혼성이다. 더 아래로 가면 그것은 무시무시해진다. 어떤 깊이에서 굴착들은 문명의 정신이 더 이상 뚫고 들어갈 수 없고, 인간이 호흡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고, 괴물들의 시작이 가능하다. 

내려가는 사닥다리는 이상하다. 그리고 그 가로장들의 하나하나는 철학이 발판으로 삼을 수 있는 하나의 층에 부합하고, 거기서 때로는 신성하고 때로는 보기 흉한 그런 노동자들의 하나를 만난다. 존 하스 아래에 루터가 있고, 루터 아래에 데카르트가 있고, 데카르트 아래에 볼테르가 있고, 볼테르 아래에 콩도르세가 있고, 콩도르세 아래에 로베스피에르가 있고, 로베스피에르 아래에 마라가 있고, 마라 아래에 바뵈프가 있다. 그리고 그것은 계속된다. 더 아래로 가서, 눈에 보이는 것과 안 보이는 것 사이의 경계에는 또 다른 사람들의 검은 그림자가 어렴풋이 보이는데, 그들은 아마 아직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어제의 사람들은 유령들이고, 내일의 사람들은 유충들이다. 심안(心眼)은 그들을 어렴풋이 알아본다.  (P254-255)       


사회의 유일한 위험, 그것은 ‘어두움’이다.

인류, 그것은 동일성이다. 모든 인간들은 다 똑같은 점토다. 적어도 이승에서는 신이 미리 정해 놓은 운명에 아무런 차이도 없다. 전생에는 다 똑같은 어두움, 생시에는 다 똑같은 육신, 사후에는 다 똑같은 재. 그러나 인간의 반죽에 섞여 든 무지는 그것을 검게 한다. 이 불치의 검은 반점이 인간의 내부에 번져 거기서 ‘악’이 된다.  (P259-260)

4부 [플뤼메 거리의 서정시와 생 드니 거리의 서사시]

혁명을 중도에서 저지하는 것은 누구인가? 중산계급이다. 

왜?

중산계급은 만족에 도달한 이익이기 때문이다. 어제 그것은 욕망이었고, 오늘 그것은 충족이고, 내일 그것은 포만이다. 나폴레옹 후 1814년에 일어난 현상은 샤를 10세 후 1830년에 다시 일어났다.

사람들이 중산계급을 하나의 사회 계급으로 만들고자 한 것은 잘못이다. 중산계급은 단지 국민 중에서 만족해 있는 부분일 뿐이다. 부르주아, 그것은 이제 자리에 앉을 겨를을 가진 사람이다. 의자는 계급이 아니다.

그러나 너무 일찍 앉고 싶어 하기 때문에 인류의 진행마저 정지시킬 수 있다. 그것이 흔히 중산계급의 과오였다.

과오를 범하기 때문에 하나의 계급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기심은 사회 계급의 구분들 중 하나가 아니다.

그런데, 이기심에 대해서조차도 정당해야 한다. 1830년의 동요 후에, 중산계급이라고 부르는 이 부분의 국민이 갈망하던 상태, 그것은 무관심과 나태로 복잡해지고 약간의 수치심이 들어 있는 무기력이 아니었고, 몽상에 끌리기 쉬운 일시적 망각을 가정하는 수면도 아니었고, 그것은 정지였다. 

정지는 이상하고 거의 모순적인 이중의 뜻으로 형성된 말이다. 즉, 행진하는 군대는 곧 운동이고, 정지는 곧 휴식이다.  (P21)     


Pigritia(게으름)는 무시무시한 말이다. 

이 말에서 pegre, 즉 ‘도둑질’이라는 사회와 pegrenne, 즉 ‘굶주림’이라는 지옥이 태어난다.

이렇게 게으름은 어머니다. 

이 어머니에게 도둑질이라는 아들과 굶주림이라는 딸이 있다. 

우리는 지금 어디에 와 있는가? Argot(곁말)에.

곁말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국민이자 동시에 한 집단의 고유언어다. 그것은 민중과 언어라는 두 종류 아래서의 도둑질이다.   (P274)     

무엇보다도 먼저 불우하고 고통스러운 군중을 생각할 것. 그들의 짐을 덜어 줄 것. 그들에게 공기를 줄 것. 그들에게 빛을 줄 것. 그들을 사랑할 것. 그들에게 너그럽게 지평을 넓혀 줄 것. 모든 형태 아래 아낌 없이 교육을 베풀어 줄 것. 근면의 예를 보여주고, 결코 나태의 예를 보이지 말 것. 전체적인 목적의 관념을 증가시킴으로써 개인적인 짐의 무게를 감소시킬 것. 부(富)를 제한함이 없이 빈(貧)을 제한할 것. 공공의 활동과 민간의 활동의 넓은 영역을 새로 만들어 낼 것. 브리아레오스처럼, 약자와 짓밟힌 자들에게 사방에서 내밀어 주는 백 개의 손을 가질 것. 모든 사람의 팔에 공장을 열어 주고, 모든 능력에 학교를 열어 주고, 모든 지성에 실험실을 열어 주는 그 위대한 의무에 집단적인 힘을 사용할 것. 임금을 올릴 것 노고를 줄일 것. 채무와 채권을 균형 잡히게 할 것. 다시 말해서 향락과 노력을 어울리게 할 것. 만족과 요구를 어울리게 할 것. 일언이폐지하여, 고통받는 자들과 무지한 자들을 위해 더 많은 빛과 더 많은 안락을 사회 기구에서 끌어내게 할 것. 이것이 형제의 의무들 중에서 으뜸가는 것임을 동정심 있는 자들은 잊지 말 것이며, 이것이 정치상 필요한 것들 중에서 으뜸가는 것임을 이기적인 자들은 알아야 할 것이다.  (P309-310)     


하느님은 그 고약한 더러운 기름으로 늘 손이 새카맣다. 내가 하느님이라면 이는 더 간단할 것이다. 나는 내 기계의 태엽을 끊임없이 감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인류를 효과적으로 인도할 것이다. 나는 실을 끊지 않고 사실들의 그물코를 엮어 나갈 것이다. 나는 예비품은 전혀 갖고 있지 않을 것이다. 나는 여분(餘分)은 갖고 있지 않을 것이다. 너희들이 진보라고 부르는 것은 인간들과 사건들이라는 두 발동기로 전진한다. 그러나 슬픈 일이지만, 때때로 예외적인 것이 필요하다. 인간들에게나 사건들에나 다 같이 보통의 집단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인간들 중에서는 천재가 필요하고, 사건들 중에서는 혁명이 필요하다. 대사건들은 법칙이다. 사물계는 그것을 필요로 하지 않을 수가 없다.  (P464-465)       


“동지들이여! 이것은 늙은이가(마뵈프 영감)가 젊은이에게 보여 준 모범이오. 우리는 망설이고 있었는데, 이분은 오셨소! 우리는 뒷걸음질 치고 있었는데, 이분은 앞으로 나왔소! 이것은 늙어서 떠는 이들이 무서워서 떠는 이들에게 주는 교훈이오! 이 할아버지는 조국 앞에서 숭고하오. 이분은 장수와 장엄한 죽음을 가졌소. 이제 시신을 덮읍시다. 우리는 저마다 살아 계시는 자기의 아버지를 지키듯이 이 돌아가신 노인을 지키고, 이분이 우리들 가운데 계심으로 해서 이 바리케이드를 난공불락의 것으로 만듭시다!”   (P535)   

     

5부 [장 발장]

혁명은 전 인류를 밝혀 주오. 그런데 우리는 어떤 혁명을 할 것인가? 내가 아까 말했는데, ‘진실’의 혁명이오. 정치적 견지에서 보면, 원칙은 하나뿐, 인간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 갖는 주권이오. 나에 대한 나의 주권이 ‘자유’라고 불리는 것이오. 이 주권의 둘 또는 여러 개가 어울리는 곳에서 ‘국가’가 시작되오. 그러나 이 어울림 속에는 아무런 권리의 포기도 없소. 각 주권은 공동의 권리를 형성하기 위해 그 주권 자체 중 약간을 양보하는 것이오. 그 양은 모든  사람에게 똑같소. 개인이 모든 사람에게 하는 그 양보의 동일성을 ‘평등’이라고 부르는 거요. 공동의 권리란 각자의 권리 위에 빛나는 만인의 보호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오. 각자에 대한 만인의 보호를 ‘박애’라고 부르오. 집합되는 그 모든 주권들의 교차점을 ‘사회’라고 부르오. 그 교차점은 합류점이므로, 그 점은 매듭이오. 거기서 사회적 유대라고 불리는 것이 유래하는 거요. 어떤 사람들은 사회 계약이라는 말을 하는데, 그것은 같은 것이오. 계약이라는 말은 어원적으로 유대의 관념으로 이루어진 것이니까. 평등에 관해 우리들 서로를 이해합시다. 왜냐하면, 자유가 정점이라면, 평등은 기초이니까.   (P44)     


아무리 교묘하게 속여서도 민중을 제가 원하는 것보다 더 빨리 가게 하지는 못한다. 민중을 강요하려고 하는 자는 불행할진저! 민중은 시키는 대로 하지 않는다. 그런 때엔 민중은 반란을 되어 가는 대로 내버려 둔다. 폭도들은 페스트 환자들이 된다.  (P115)     


공상적인 이상은 언제나 제 책임으로 반란으로 변하고, 철학적인 항의를 무장된 항의로 만들고, 미네르바를 팔라스로 만든다. 참지 못하고 폭동이 되는 이상은 무엇이 저를 기다리는지 안다. 거의 언제나 이상은 너무 일찍 온다. 그래서 이상은 체념하고, 승리 대신에 재변을 태연하게 받아들인다. 이상은 저를 인정하지 않는 자들을 불평하지 않고, 심지어 그들을 변호하면서까지 그들에게 봉사하고, 관대하게도 버림받음에 동의한다. 이상은 장애에 대해서는 굴하지 않고 배은망덕에 대해서는 온화하다. 

그런데 그것이 배은망덕인가?

그렇다, 인류의 견지에서는.

아니다, 개인의 견지에서는.

진보는 인간의 방식이다. 인류의 일반적인 생활을 ‘진보’라 부른다. 인류의 집단적인 걸음걸이를 ‘진보’라고 부른다.   (P117)     

하수도는 옛날의 파리에서 모든 피로들과 모든 시도들의 집합소다. 정치경제학은 거리에서 쓰레기를 보고, 사회철학은 거기에서 찌꺼기를 본다.

하수도, 그것은 도시의 양심이다. 모든 것이 거기에 집중되고, 거기서 얼굴을 맞댄다. 이 창백한 장소에는 암흑이 있지만, 더 이상 비밀은 없다. 사물은 저마다 제 참다운 모습을 가지고 있거나, 어쨌든 제 최종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다. 쓰레기 더미에는 제가 거짓말쟁이가 아니라는 그런 것이 있다. 솔직함이 거기에 숨어 있다.  (P159)     


“암, 그 사람이 어떠한 사람이든 간에, 그분은 숭고했습니다. 그분이 무슨 일을 했는지 아십니까, 아저씨? 그분은 대천사처럼 나서서 손을 썼습니다. 그분은 전투 속에 뛰어들고, 저를 감추고, 하수도를 열고, 거기서 저를 끌고 가고, 업고 가야했습니다. 아저씨! 무시무시한 지하 복도에서 15리 이상을 가야 했습니다. 몸을 굽히고, 허리를 구부리고, 어둠 속을, 시궁창 속을, 15리 이상을, 아저씨, 시체를 등에 업고 말입니다. 아저씨! 그런데 무슨 목적에서냐고요? 오직 그 시체를 등에 업고 말입니다. 아저씨! 그런데 무슨 목적에서냐고요? 오직 그 시체를 구한다는 목적만으로죠. 그런데 그 시체, 그것은 저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여기에는 아마 아직 생명의 빛이 남아 있는 것 같다. 나는 이 불쌍한 불똥을 위해 나의 목숨을 걸겠다!라고, 그런데 그의 생존을, 그분은 그것을 한 번만 위태롭게 한 것이 아니라 여러 번이었죠! 그 증거, 그것은 그분이 하수도를 나오면서 체포되었습니다. 아시겠어요, 아저씨, 이 사람이 그 모든 일을 했다는 것을? 그런데 아무런 보수도 기대하지 않았어요. 저는 무엇이었나요? 한낱 폭도였어요. 저는 무엇이었나요? 한낱 패배자였어요. 오! 만일 코제트의 60만 프랑이 제 것이라면....”

“그것은 당신 것이오.” 하고 장 발장은 그의 말을 막았다. 

“그렇다면”, 하고 마리우스는 말을 이었다. “그분을 찾아내기 위해 저는 그 돈을 쓸 거예요.”

장 발장은 침묵을 지켰다.    (P320)     

  

“한 가족으로! 아니오. 나는 아무런 가족도 아니오. 나는, 나는 당신네 가족이 아니오. 나는 사람들의 가족이 아니오. 사람들이 가족끼리 있는 집들에서 나는 가욋사람이오. 가족들이 있지만, 그건 나를 위한 것이 아니오. 나는 불행한 사람이오. 나는 집 밖에 있소. 내게 아버지와 어머니가 있었던가? 그건 거의 믿을 수 없소. 내가 이 아이를 결혼시킨 날, 일은 다 끝났소. 나는 그녀가 행복한 것을 보았고, 그녀가 사랑하는 남자와 함께 있고, 거기에 착한 노인 한 분이 계시고, 두 천사들의 부부가 있고, 그 집에 모든 기쁨이 있는 것을 보았고, 그리고 다 잘된 것을 보았고, 그리고 나는 생각했소. ‘너는 들어가지 마라.’라고. 나는 사실, 거짓말을 하고, 당신네들 모두를 속이고, 포슐르방 씨로 있을 수 있었소. 그것이 그녀를 위해서인 한, 나는 거짓말을 할 수 있었소. 하지만 지금은 그것이 나를 위해서일 것이니, 나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되오. 사실, 나는 입을 다물고만 있으면 충분했고, 모든 것은 계속되고 있었소. 내가 무엇 때문에 말하지 않으면 안 되느냐?고 당신은 내게 묻는데, 하나의 괴상한 것, 나의 양심 때문이오.  (P375)

“이 주먹을 보시오.”하고 그는 계속했다. “이 주먹은 멱살을 잡고 영 놓지 않으려고 하는 것 같지 않소? 그런데! 또 하나의 주먹이 있소. 즉 양심이오! 사람이 행복하기를 바란다면, 결코 의무를 이해해서는 안 되오. 왜냐하면 그것을 이해하자마자 그것은 냉혹하기 때문이오. 의무는 그걸 이해하는 걸 벌하는 것 같다. 하지만 그렇지 않소. 의무는 그렇게 하는 데 대해서 우리에게 상을 줍니다. 왜냐하면 의무는 우리를 지옥에 넣지만, 거기서 우리는 자기 옆에 신을 느끼기 때문이오. 창자가 찢어지도록 고통을 겪자마자 자기 자신과 편안합니다.”   (P379)     


자연은 ‘제 앞만 바라본다.’ 자연은 살아 있는 사람들을 ‘오는 자’와 ‘떠나는 자’로 나눈다. 떠나는 사람들은 어둠 쪽을 향해 있고, 오는 사람들은 빛 쪽을 향해 있다. 거기에서 괴리가 빚어지는데, 이것은 늙은이들 쪽에서는 숙명적이고, 젊은이들 쪽에서는 본의 아닌 것이다. 이러한 괴리는 처음에는 극히 완만하지만, 나뭇가지들이 다 갈라지듯이 서서히 커진다. 잔가지들은 줄기에서 떨어지지 않고 거기서 멀어져 간다. 그것은 가지들의 잘못이 아니다. 젊음은 기쁨과 축제, 강렬한 빛, 사랑이 있는 곳으로 간다. 늙음은 종말로 간다. 양자는 서로 못 보게 되지는 않지만, 더 이상 포옹은 없다. 젊음이들은 인생의 싸늘함을 느끼고, 늙은이들은 무덤의 싸늘함을 느낀다. 이 가엾은 아이들을 나무라지 말자.  (P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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