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캐롤Carol> 2015년
영화 <캐롤>은 미술, 촬영, 의상, 음악까지 작품의 완성도를 인정받아 많은 영화상을 휩쓸었다. 칸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비롯해 전미 비평가협회상 감독상, 촬영상을 수상했다. 또한 제88회 아카데미 시상식 여우주연상(케이트 블란쳇), 여우조연상(루니 마라), 각색상, 촬영상, 음악상, 의상상 등 총 6개 부문 후보 지명과 호주,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 최다 부문에 이름을 올렸다.
영화 <캐롤>은 Super 16 카메라를 사용해 필름으로 촬영한 영화로 필름의 질감을 활용해 시대상을 잘 보여주는 화면을 완성했다. 특히 1950년대 레트로풍을 한껏 느낄 수 있는 의상과 분장, 미술 등 보는 이들의 소장욕구를 불러일으키는 감각적인 이미지를 선보였다.
영화 <캐롤>은 범죄 소설 사상 가장 기막힌 캐릭터로 손꼽히는 [리플리]를 탄생시킨 천재작가 패트리샤 하이스미스가 동성애를 다룬 소설 [소금의 값(The Price of Salt)]를 1952년 필명(클레어 모건)으로 출간한 소설이다. 1990년에 작가 본인의 이름을 밝히고 후기를 덧붙여 캐롤이란 제목으로 다시 출판했다. 감독 토드 헤인스는 영화에서 그려지는 당시 뉴욕의 분위기나 시각적 이미지에 대해서는 사울 레이터(Saul Leiter)의 작품들을 통해 영감을 얻었다고 말했다. 또한 감독은 인터뷰에서 “〈캐롤〉은 레즈비언 문제라기보다는 사랑에 대한 문제인 것 같다. 테레즈가 “캐롤이 여성이라는 사실을 제외하면 다른 사랑과 다를 바 없다. 난 남자 옷을 입고 짧은 머리를 한 여성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난 여자이고, 그저 여자를 사랑하는 것뿐”이라고 말하지 않나. 그의 말대로 나 역시 두 ‘사람’의 ‘사랑’을 그려내고 싶었다.“고 말했다.
“옛 이야기를 하는 것보다 따분한 게 있을까요?” 테레즈는 웃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과거 없는 미래가 되는 건가요.”
테레즈는 이 말을 곱씹지 않았다. 맞는 말이었다. 테레즈는 지금 막 웃는 법을 배운 양 계속 웃었고 어떻게 멈춰야 할지 몰랐다. 놀랍게도 여인도 같이 웃었다. 날 보고 웃네. 테레즈는 생각했다.
“벨리벳은 어디 이름이죠?” 여인이 물었다.
“체코계 이름인데, 좀 바꾼 거예요.” 테레즈는 어색하게 설명했다. “원래는......”
“굉장히 독특해요.”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 성 말고 이름이요.” 테레즈가 물었다.
“내 이름이요? 캐롤이에요. 제발 ‘캐롤르’라고 부르지 말아요.”
“제발 ‘쎄리즈’라고 부르지 말아주세요.” 테레즈는 초성에 힘주어 발음했다.
“정확한 발음이 뭐예요? ‘테레즈’가 맞아요?”
“네, 그게 맞아요.” 테레즈가 대답했다. 캐롤은 프랑스식으로 ‘테레즈’라고 발음했다. 테레즈는 자기 이름이 온갖 발음으로 불리는 상황에 인이 박혀 때론 자신도 여러 가지로 발음했다. 테레즈는 캐롤이 자기 이름을 그렇게 부르는 것이 좋았다. 전부터 막연히 느끼던 무한한 갈망이 이제 눈에 보이는 소망으로 이루어졌다. 너무나 어이없고 부끄러운 욕망이 테레즈의 마음속에서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일요일엔 뭐해요?” 캐롤이 물었다.
“글쎄요. 특별한 일은 없어요. 그쪽은요?” (P74-75)
캐롤이 물으면 테레즈는 대답했다. 어머니 얘기는 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래도 대답이 튀어나왔다. 어머니는 그리 중요한 사람이 아니어서 실망조차 할 게 없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중요했다. 아버지는 참 많이 달랐다. 아버지는 테레즈가 여섯 살 때 돌아가셨다. 체코슬로바키아계 변호사였으나 평생 화가를 꿈꾸었다. 특별한 분이었다. 자상하면서 타인과 공감할 줄 알았다. 잘 버는 변호사도, 잘 그리는 화가도 아니라며 어머니가 잔소리를 해대도 아버지는 화가 나서 언성을 높인 적이 단 한도 없었다. 몸이 늘 좋지 않았는데 결국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다. 테레즈는 어머니가 아버지를 죽였다고 생각했다. 캐롤은 쉬지 않고 질문을 던졌다. 테레즈가 여덟 살 때, 어머니는 자신을 몽클레어 있는 기숙학교 에 집어넣어 놓고 그 후론 거의 찾아오지 않았다고 털어놓았다. 어머니는 방방곡곡을 돌아다녔다. 피아니스트였는데 최정상급은 아니었다. 그래도 늘 열정적으로 연주 여행을 다녔다. 테레즈가 열 살 무렵, 어머니는 재혼했다. 크리스마스 시즌이면 롱아일랜드에 있는 어머니 집을 방문했다. 어머니와 새아버지는 테레즈에게 같이 살자고 했지만 진심은 아니었다. 테레즈는 새아버지 닉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머니와 같은 부류였기 때문이다. 목청도 크고 덩치도 크고 머리색이 짙은 새아버지는 폭력적이고 과격했다. 테레즈는 두 사람이 천생연분이라고 생각했다. 어머니는 당시 임신 중이었고, 그후 이복동생 둘이나 낳았다. 그렇게 일주일을 보낸 후 테레즈는 다시 학교로 돌아왔다. 이후 어머니는 서너 번 정도 학교를 찾아왔다. 올 때마다 선물을 들고 왔다. 블라우스나 책도 사오고, 한번은 화장품 키트를 사 온 적이 있었다. 테레즈는 몹시 못마땅했다. 화장품을 보는 순간, 어머니의 마스카라 발린 푸석푸석한 속눈썹이 연상됐기 때문이다. 이런 선물을 가져오다니 민망했다. 어머니는 화해를 가장해 그걸 들고 왔다. 한번은 이복동생인 어린 사내아이를 데려온 적도 있었다. 그 순간 테레즈는 자신이 천덕꾸러기로 전락했음을 실감했다. 아버지와의 애정이 식자 여덟 살 딸아이를 기숙학교로 보내버린 어머니, 이제 와 굳이 학교로 찾아와 챙기려는 이유는 뭘까? 학교의 절반을 차지하던 다른 고아 소녀들처럼 차라리 나도 고아였다면 오히려 행복했을 텐데, 결국 테레즈는 어머니에게 다시는 오지 말라고 했다. 그리고 어머니도 다시는 찾아오지 않았다. 민망해 하며 분노하던 표정, 갈색 눈을 부라리며 신경질 내던 모습, 비꼬는 듯 비웃다가 침묵하던 얼굴. 그게 테레즈가 기억하는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그렇게 열다섯 살이 되었다. 학교 친구들은 테레즈가 어머니에게서 편지조차 받지 못하는 것을 알고 대신 어머니에게 편지를 썼다. 어머니가 편지를 보내긴 했다. 그러나 테레즈는 답장하지 않았다. 그렇게 열일곱 살, 졸업식이 다가오자 학교에서는 어머니에게 200달러를 송금하라고 요청했다. 테레즈는 어머니한테 한 푼도 받고 싶지 않았고, 어머니도 한 푼도 보내지 않으리라 믿었다. 어머니는 돈을 보냈고, 테레즈는 그것을 받았다.
“유감스럽지만 그 돈을 받았어요. 이 얘긴 여기서 처음 하는 거예요. 언젠가 돌려 드려야죠.”
“말도 안 돼.” 캐롤이 다정히 말했다. 의자 팔걸이에 걸터 앉아 손으로 턱을 괴고 시선은 테레즈에게 맞춘 채 웃고 있었다. “넌, 아직도 애구나. 어머니한테 그 돈을 갚겠다는 생각을 버려야 그때 진짜 어른이 되는 거야.”
테레즈는 대답하지 않았다. “어머니를 다시 뵐 생각은 있어? 앞으로 몇 년 후에라도?”
테레즈는 고개를 저었다. 얼굴은 웃었지만 눈물이 계속 흘렀다. “이 얘기 그만하고 싶어요.” (P101-103)
테레즈는 단 한 순간도 마음속에서 캐롤을 지운 적이 없었다. 눈앞에 보이는 것 모두 캐롤을 통해 보는 것 같았다. 그날 저녁, 캄캄하고 편편한 뉴욕 거리를 걸었다. 내일 할 일도, 싱크대에 우유병을 떨어뜨려 우유를 와장창 쏟은 일도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침대에 몸을 내던진 후 종이 위에 연필로 선을 그었다. 또 한 줄 긋고, 조심스레 또 한 줄 그었다. 또 하나의 세상이 테레즈의 주위에서 태어났다. 반짝이는 나뭇잎이 백만 개는 달린 환한 숲 같은 세상이 펼쳐졌다. (P111)
테레즈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이 얘기를 들으니 리처드와 수천 번 나누던 대화가 떠올랐다. 이러드는 전쟁, 대기업, 정치적 마녀 사냥, 그가 아는 특정인들을 한 데 묶어 가공할 적으로 여기고 그들에게 증오라는 딱지를 붙였다. 지금 캐롤이 그랬다. 이런 모습을 보니 테레즈의 마음 가장 깊은 곳이 흔들렸다. 어떤 단어도 존재하지 않는 마음 속 저 깊은 곳, 그곳에는 죽음, 임종, 살인 같은 버거운 단어는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이런 말들은 머나 먼 미래의 것이며, 지금은 지금일 뿐.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할 불안감, 알려는 욕심, 뭐든 확실히 짚고 넘어가고픈 욕구가 테레즈의 목구멍을 틀어 막는 바람에 잠시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나요? 어떻게 생각하냐고요?’라고 시작하는 질문을 던지고 싶었다. 우리 둘 다 먼 훗날 처참히 죽어서 느닷없이 삶을 마감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나요? 이 질문으론 성이 차지 않아서 결국 이 말까지 내뱉고 말 것이다. ‘난 당신을 알지도 못한 채 이대로 죽고 싶지 않아요. 캐롤, 당신도 같은 생각이죠? 테레즈는 마지막 질문은 물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했지만 그 앞선 질문들은 차마 꺼낼 수 없었다. (P204-205)
1월.
이것은 만물의 시작이며, 안이 들여다보이지 않는 문을 열고 들어가는 출발점이다. 1월의 추위는 회색 캡슐 안에 도시를 가두었다. 1월은 순간인 동시에 한 해이다. 1월은 순간순간을 비로 씻어 내려 그녀의 기억 속에 동결시켰다. 컴컴한 복도에서 성냥불을 켜고 명단을 초초히 들여다보는 여자. 메모를 끼적여서 헤어지기 직전에 친구에게 주고 돌아서는 남자. 한 블록을 뛰어와 버스를 잡아타는 남자. 모든 인간의 행동은 마법을 빚어내는 것 같았다. 1월은 두 가지 얼굴을 지닌 달이다. 어릿광대의 벨처럼 시끄럽고, 얼어붙은 눈처럼 바스락거리고, 여느 시작처럼 순수하며, 노인네처럼 칙칙하고, 신기할 정도로 익숙하면서도 알 수 없으며, 누구나 할 수는 있지만 제대로 정의내릴 수 없는 단어와 같았다. (P219)
캐롤이 입을 열었다. “‘난 경쟁조차 할 수 없어.’ 이런 말 말이야. 사람들이 고전이라고 말하는데, 이런 대사가 바로 고전이지. 백 명이 똑같은 대사를 읊는 게 바로 고전이야. 엄마가 하는 대사와 딸이 하는 대사가 같고, 남편이 하는 대사와 정부가 하는 대사가 같지. 이를테면 ‘차라리 내 발 밑에서 네가 죽는 꼴을 보는 게 나아.’(래드클리프 홀이 쓴 영미 최초의 레즈비언 소설 <고독의 우물>에 나오는 대사. 주인공 스테픈 고든의 어머니가 딸이 유부녀와 사귀는 것을 알고 내뱉은 대사다.)라는 대사라든가. 같은 작품이 다른 배우들에 의해 계속 무대에 오르는 게 바로 고전이지. 그럼 하나의 연극이 고전으로 등극하기 위해 사람들이 꼽는 조건이 뭘까, 테리즈?”
“고전이란.......” 테레즈의 목소리는 긴장해서 숨이 막힐 듯 했다. “인간의 보편적 상황을 다루는 거죠.” (P251)
“네가 진심으로 이번 여행을 즐길 수 있으려나 모르겠어. 넌 유리창 안을 들여다보는 걸 더 좋아하는 것 같아. 이 세상의 온갖 사물에 대해 제 마음대로 생각하고, 저 풍차만 해도 말이야. 네덜란드에 직접 가는 거나 여기서 저걸 구경하는 거나 너한텐 하나도 다르지 않을 걸. 네가 진짜 산을 구경하고 진짜 사람들을 만날 수나 있을지 정말 궁금하구나.”
테레즈는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거짓말했다고 캐롤에게 추궁 당하는 기분이 들었다. (P277-278)
테레즈는 거기까지 읽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천천히 책상으로 걸어갔다. 테레즈는 캐롤이 편지를 보낸 이유를 이해했다. 캐롤은 테레즈보다 린디를 더 많이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변호사들이 캐롤을 무릎 꿇려 원하는 바를 강요한 것이다. 테레즈는 캐롤이 강요당하는 모습을 상상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게 다 캐롤의 편지 속에 담겨 있었다. 캐롤은 항복했다. 테레즈는 캐롤이 불리한 상황이 아님에도 저들이 캐롤에게 뭐든 갖다 붙일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순간, 기가 막힌 깨달음을 얻었다. 캐롤이 자신의 극히 일부분만을 테레즈에게 헌신했다는 점이다. 순간, 이 세상 전부였던 지난달이 거대 사기극으로 느껴지면서 산산이 부서지며 허물어졌다. 그러고 나니 믿기지 않았다. 캐롤이 아이를 택한 사실만 남았다. 테레즈는 책상 위에 놓인 리처드의 편지를 노려보았다. 리처드에게 쏟아 붓고 싶었던 말들이, 한 번도 제대로 하지 못한 억울함이 속에서 울컥 차올랐다. 대체 무슨 권리로 그가 테레즈에게 누구를 어떻게 사랑해라 말아라 거들먹거리는 걸까? 자기가 테레즈에 대해 뭘 안다고? 대체 알기나 했을까? (P404-405)
그건 남남, 여여 동성 커플의 관계가 절대적이며 완벽할 수 있다는 사실이야. 사실 남녀 관계에서는 절대로 그럴 수 없거든. 어떤 이들은 그저 이쪽을 원하고, 다른 이들은 남녀 사이에서 벌어지는 뭔가 변화무쌍하며 불확실한 것을 원하지. (P405-406)
테레즈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이젠 캐롤을 온전히 다시 만날 것이다. 그럼에도 캐롤은 그 누구도 아닌 여전히 캐롤이며, 앞으로도 캐롤일 것이다. 두 사람은 천 개의 도시, 천 개의 집, 천 개의 외국 땅에서 함께 할 것이다. 그리고 천국이든 지옥이든 같이 갈 것이다. 테레즈가 한참을 서 있다가 캐롤을 향해 발걸음을 떼려는 순간, 캐롤이 테레즈를 알아보았다. 캐롤은 놀랍다는 듯이 잠시 테레즈를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테레즈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점점 크게 미소를 지었다. 순간 캐롤이 손을 번쩍 들더니 힘차게 흔들었다. 테레즈는 저런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테레즈는 캐롤을 향해 걸어갔다. (P455-456)
소설 <캐롤>은 여성들 간의 사랑이라면 남성들 간의 사랑을 다룬 소설은 에벌린 워의 <다시 찾은 브라이즈헤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