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열차 안의 낯선자들> 1951년
패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처녀작 <열차 안의 낯선자들>은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에 의해 영화화되었다. 영화 <열차 안의 낯선자들>은 ‘교환살인’을 통해 두 사람의 은밀한 욕망과 죄의식이 어지럽게 교차한다. 반사된 이미지로 간접적으로 보여주기, 교차편집 등의 기법으로 인간 심리를 시각적으로 탁월하게 묘사해냈다.
브루노는 무기력한 표정으로 두 손을 들어 올리며 어깨를 으쓱하고는 곧바로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아버지가 정말 고약한 사람이라는 건 아까 얘기했었죠? 아버지는 할 수 있는 한 모든 사람들의 돈을 빼앗아가요. 지금은 내가 직업이 없기 때문에 돈을 줄 수 없다고 하지만, 그건 거짓말입니다. 어머니와 내가 늘 사이가 좋다고 생각하는 아버지는 틈만 나면 우리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 궁리를 하죠.”
가이는 브루노의 어머니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었다. 마스카라를 진하게 칠하고 자기 아들이 그렇듯이 이따금 거친 사람들과 어울리기 좋아하는, 젊어 보이는 사교계 여성일 것이다. “대학교는 어딜 다녔어요.”
“하버드를 다녔는데, 음주와 도박 문제로 2학년 때 쫓겨났어요.” 그러면서 그는 좁은 어깨를 으쓱했다. “당신과는 다르죠? 맞아요. 부랑자처럼 지내지만 그래서 뭐 어떻단 말입니까?” 그는 두 사람 잔에 위스키를 더 부었다.
“누가 당신더러 부랑자라고 해요?”
“우리 아버지요. 아버지에게 당신처럼 얌전하고 착한 아들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면 모두들 아무 문제 없었을 테니까요.”
“내가 왜 얌전하고 착할 거라고 생각하죠.”
“당신은 진지해 보이고 건축가라는 전문직에 종사하고 있으니까요. 난 도무지 일을 하고 싶지 않아요. 일을 할 필요도 없고요. 작가나 화가 혹은 음악가도 아니고요. 일할 필요가 없는데 굳이 일해야 하는 이유라도 있나요? 난 이런 한심한 생각을 바꾸지 않을 겁니다. 아버지도 한심한 양반이에요. 아직도 내가 자기 회사에 들어와 일하길 바라거든요. 난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했어요. 결혼이 합법화된 간음이듯, 아버지의 사업을 포함해 모든 사업은 합법화된 착취라고, 사실, 그렇지 않습니까?”
가이는 찌푸린 얼굴로 브루노를 쳐다보고는, 포크로 찍은 감자튀김에 소금을 뿌렸다. (P16-17)
“아내가 잘못이라도 했나요? 다른 남자와 잠자리를 한다든가.”
브루노의 예리한 지적에 가이는 짜증이 났다. “아니요. 아무튼 모두 지난 일입니다.”
“하지만 아직 기혼 상태잖아요. 진작 이혼할 수도 있었을 텐데요.”
가이는 순간 수치심이 느껴졌다. “이혼 문제에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어요.”
“그런데 뭐가 바뀐 거죠?”
“아내가 이혼하기로 마음을 굳혔어요. 아이를 낳을 생각인 것 같아요.”
“결심하기에 좋은 시기군요. 3년 동안 이 남자 저 남자 만나면서 마침내 한 사람에게 정착했나 보죠?”
물론 그랬고, 미리엄은 아이 때문에 그렇게 마음먹었을 것이다. 그런데 브루노는 어떻게 알았을까? 가이는 브루노가 주변 사람들에 대한 증오를 미리엄에게 겹쳐 생각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P25)
“물론 그렇지 않아요. 어떨 때는 누군가에게 100달러를 주고 싶기도 해요. 거지에게요. 돈이 생기면 제일 먼저 하고 싶은 일 가운데 하나죠. 그런데 당신은 무언가를 훔치거나 누군가를 죽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어요? 분명히 있었을 겁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런 생각이 드는 법이니까요. 어떤 사람들은 전쟁터에서 사람을 죽이며 통쾌해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렇지 않을 겁니다.” 가이가 말했다.
브루노는 머뭇거렸다. “물론 그걸 인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두려우니까요. 하지만 당신도 살아오면서 죽이고 싶었던 사람이 있었을 텐데요. 안 그래요?”
“그렇지 않습니다.” 갑자기 스티브가 떠올랐다. 그를 죽여버리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브루노는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분명이 있을 텐데, 왜 인정하지 않는 거죠?”
“그런 생각이 언뜻 떠오른 적은 있지만 더 이상 나아간 적은 없어요. 난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P31)
“당신을 위해 당신 아내를 완전범죄로 처리해줄까요? 언젠가 써먹고 싶을지도 몰라요.” 브루노는 가이의 시선을 의식하며 몸을 움츠렸다.
가이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좀 걷고 싶군요.”
그러자 브루노는 손뼉을 탁 쳤다. “굉장한 아이디어가 떠올랐어요. 우리 둘이 서로를 위해 살인을 하는 겁니다. 난 당신의 아내를, 당신은 우리 아버지를 죽이는 거죠. 우린 기차에서 우연히 만났으니 우리가 아는 사이라는 사실은 아무도 몰라요. 완벽한 알리바이라고요!”
가이는 눈앞에 있는 벽이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이 흔들리는 것 같았다. 살인이라는 단어만으로도 넌더리가 나고 겁이 덜컥 났다. (P37)
브루노가 위기에서 발을 빼는 또 다른 이유는 흥분이 사라지는 것에서 즐거움을 느끼기 때문이었다. 삶의 의미에 늘 굶주리고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다는 바람을 가지고 살아온 그는 늘 상대방에게 거부당하는 연인처럼 차라리 좌절하는 편이 낫다는 걸 알게 되었다. 무언가를 해냈다는 만족스러운 성취감은 절대 알 수 없을 것 같았다. 처음에는 목적과 희망을 갖고 무언가를 찾고 싶었지만 너무 낙담해서 시도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하루를 더 살고자 하는 기운은 늘 솟아올랐다. 하지만 죽음은 전혀 두렵지 않았다.
브루노에게 죽음은 시도해보지 않은 또 다른 모험에 지나지 않았다. 어떤 위험한 일을 벌이다가 죽음을 맞는 편이 훨씬 더 나을 것이다. 죽음에 가장 가까이 갔던 때는, 눈가리개를 한 채 경주용 차량을 타고 엑셀을 마구 밟으며 직선으로 뻗은 도로를 달리던 때였다. 친구가 차를 멈추라며 쏜 총소리도 들리지 않았는데, 엉덩이를 다친 채 도랑에 빠져 의식을 잃었기 때문이다. 때로는 너무 무료해서 자살이라는 극적인 결말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기도 했다. (P84)
“혹시.” 브루노가 나지막이 말하자 그녀가 뒤돌아보았다. “혹시 이름이 미리엄이에요?”
미리엄은 그를 쳐다보았지만 형체를 거의 알아볼 수 없었다. “네, 그런데 누구세요?”
브루노는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가 냉소적으로 물었다. “우리 어디에선가 만난 적 없나요?” 향수 냄새가 다시 훅 끼쳤고, 미리엄의 형체는 어둠에 가려 흐릿했다. 브루노는 온 정신을 집중하고 손을 쫙 펴서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글쎄요. 혹시......”
미리엄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브루노는 그녀의 목을 잡고 졸랐다. 깜짝 놀란 미리엄은 그의 손을 밀쳐내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P99)
브루노가 그랬다면? 물론 그럴 리 없겠지만, 혹시라도 그가 그랬다면? 그는 잡혔을까? 그 살인은 둘이서 계획한 거라고 말했을까? 브루노가 히스테리를 부리며 아무 말이든 지껄일 모습이 눈앞에 떠올랐다. 그처럼 신경과민인 청년이 뭐라고 말할지는 도무지 예측할 수 없었다. 열차에서 그와 이야기를 나누던 희미한 기억을 떠올리던 가이는 자신이 농담으로 혹은 화가 나서 혹은 술김에 브루노의 말도 안 되는 아이디어에 동의한다고 여길 만한 말을 했는지 기억해내려 애썼다. 그렇다. 가이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단어 하나하나 모두 기억나는 브루노의 편지가 더 문제였다. ‘두 사람을 살해한다는 우리의 생각, 해낼 수 있을 거라 확신해요. 넘치는 자신감은 이루 다 표현할 수 없어요.........’ (P112)
앤은 아직 아무것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 모른다 해도 앞으로 알게 되는 건 시간문제일 것이다. 앞으로 며칠 후에 알게 될지도 몰랐다. 뭘 알게 된단 말인가? 가이는 같은 질문을 계속 되묻고 같은 대답을 되풀이했는데, 스스로 확인하려는 것인지 자학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건 바로 ‘지난여름 가이가 기차에서 만났던 사람이 미리엄을 살해했고, 가이는 그녀를 살해하는 데 동의했다’는 사실이었다. 브루노가 앤에게 말할 내용은 그것이었고, 확신이 가도록 자세한 사항을 덧붙일 것이다. 그리고 법정에 서면, 브루노가 그들이 기차에서 나눈 대화를 조금만 왜곡해도 두 사람이 합의하에 살해한 걸로 몰고 갈 수 있지 않을까? (P165)
'먼저 열두 계단을 올라야 하는데, 일곱 번째는 건너뛰어요. 그러고 나서 돌면 작은 층계참 두 개가 나와요...... 세 번째와 네 번째는 건너뛰고 맨 마지막에 보폭을 넓게 벌리고 디뎌요. 일정한 리듬이 있으니 기억할 수 있을 거예요.‘ 가이는 첫 번째 층계참에서는 네 번째 계단을 건너뛰었다. 둥근 창문이 나 있고 방향이 바뀌는 지점을 지나자 마지막 층계참이 나왔다. 그는 어떤 책에서 읽었던 내용이 떠올랐다. ’집은 그곳에서 살게 될 사람들의 행동 양식대로 지어진다...... 아이들은 창가에 서서 잠시 풍경을 바라보고 나서 열다섯 개의 계단을 올라 놀이방으로 가는 걸까?‘ 왼쪽 3미터 지점에 집사가 거처하는 방이 있었다. ’이곳이 바로 사람들과 가장 쉽게 마주칠 수 있는 곳이에요.‘ 방의 어두운 기둥을 지나자 브루노의 목소리가 점점 더 크게 들리는 것 같았다. (P188)
가이와 브루노! 어느 누구와 견줄 수 있을까? 어느 누구도 그들처럼 잘해내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 이 순간 가이가 곁에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가이와 손잡고 세상 사람 전부를 지옥에 보내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들이 이룬 위업은 전대미문의 것이었다. 순식간에 하늘을 가로지른 것과 같았다. 붉은 불꽃 두 개가 갑자기 나타났다가 너무나 빨리 사라져서, 모두들 실제로 봤는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서 있는 형국이었다.
브루노는 지금 심정과 비슷한 시를 읽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 시를 베껴 적어서 수첩에 끼워두었던 것 같았다. 그는 서둘러 월 스트리트를 벗어나 술집으로 들어가서 술을 주문하고는 수첩에서 조그마한 종이를 꺼냈다. 대학 때 읽었던 시집에서 찢어낸 것이었다.
생기 없는 눈빛을 가진 이들
바첼 린지
(Vachel Linsay, The Leaden-Eyed)
젊은 영혼들이
질식하게 만들지 말자
그들이 기이한 행동을 하고
자존심을 한껏 과시하기 전에는.
아이들이 재미없게 자라나고
가난한 자들이 소처럼 일하고
무기력해지고 생기 없는 눈빛을 가지게 된 건
이 세상이 저지른 범죄.
그건 그들이 굶주려서가 아니라
꿈 없이 굶주리기 때문이다
그건 그들이 씨를 뿌려서가 아니라
거둬들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건 그들이 섬겨서가 아니라
섬길 신이 없기 때문이다
그건 그들이 죽어서가 아니라
양처럼 온순하게 죽어가기 때문이다.
그와 가이는 생기 없는 눈빛을 지닌 이들이 아니었다. 그와 가이는 이제 양처럼 온순하게 죽어가지 않을 것이다. 그와 가이는 거둬들일 것이다. 가이가 받아준다면 브루노는 그에게 돈을 줄 것이다. (P209-210)
가이는 멍하니 몸을 돌려 제도용 책상을 마주 보았다. 숨이 막히는 소리가 치아 사이로 새어나오자, 그는 조바심을 내며 서둘러 손으로 입을 막았다. 하지만 아직 올 것이 남아 있고, 숨이 막힐 것이고, 더 가혹한 벌을 받을 것이고, 더 끔찍한 사실을 깨달을 것임을 직감했다.
“난 아직 충분히 고통받고 있지 않아.” 갑자기 가이는 나지막이 속삭이듯 내뱉었다. 왜 나지막이 속삭였던 걸까? 부끄러워서일까? “난 아직 충분히 고통받고 있지 않아.” 그는 누군가 자기 얘기를 들어주길 바라는 듯이 주변을 둘러보며 평소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 속에 애원하는 느낌이 없었더라면, 자신이 누군가에게 애원할 자격조차 없다고 여겼다면, 그는 힘껏 외쳤을 것이다. (P225)
가이의 마음속 이륜마차의 두 번째 말은 첫 번째 말만큼 고분고분하게 말을 잘 들어왔다. 하지만 이제는 사랑과 증오, 선과 악이 인간의 마음속에 함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마다 비율은 다르겠지만 선과 악이 공존하는 건 마찬가지였다. 표면만 살짝 건드려도 선과 악의 모습이 드러나는 것이다. 모든 것의 반대편은 바로 곁에 존재하고, 모든 결정에는 그에 반대하는 논리가 있고, 모든 동물 곁에는 그 동물을 잡아먹는 동물이 있고, 남성 곁에는 여성, 긍정 곁에는 부정이 존재한다. 한 원소를 쪼개는 것은 그저 파괴일 뿐이며, 단일성이라는 우주 법칙을 파괴하는 것일 뿐이다. 세상 어느 것도 반대편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공간을 막는 물체가 없다면 건물 속의 공간 자체가 존재할 수 있을까? 물질과 에너지, 정적인 것과 동적인 것, 한때는 서로 반대라고 여기던 것들을 이제는 단일한 것으로 알아야 했다.
그리고 브루노, 그와 브루노, 두 사람은 각각 다른 사람이 선택받지 못한 모습이었고, 버려진 자아, 증오한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사랑하는 모습이었다.
한순간, 가이는 자신이 미쳤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광기와 천재성도 종종 서로 함께 나타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범하고 진부한 삶을 살아간다. 물속에 헤엄치는 물고기들처럼.
아니다, 거대한 자연에서부터 미세한 원자 안에 존재하는 양자와 전자에 이르기까지, 이원성이 존재한다. 이제 과학은 전자를 쪼개려 하고 있지만, 그 뒤에 있는 하나의 생각, 단일성, 단일한 진리, 반대는 항상 존재한다는 생각 때문에 그럴 수 없는지도 몰랐다. 전자가 물질인지 에너지인지 누가 알겠는가? 신과 악마가 온갖 전자 곁에서 손을 잡고 춤을 추고 있을지도 모른다! (P226-227)
“헤인스 씨, 며칠 지나지 않아 당신의 아내가 살해되었습니다. 그리고 몇 달 후에 찰스의 아버지가 살해되었고요. 내 머릿속에 먼저 떠오르는 생각은 당신들 두 사람 모두 살이 일어날 것임을 알고 있었다는 겁니다........”
“말도 안 돼.” 브루노가 말했다.
“.......그리고 당신들은 살인사건에 관해 함께 얘기했습니다. 물론 순전히 추측일 뿐이지만요. 두 사람이 열차에서 만났다는 것도 가정입니다. 두 사람은 어디서 만났죠? 헤인스 씨?” 제러드가 미소 지으며 물었다.
“우린 열차에서 만났습니다.” 가이가 말했다.
“그런데 왜 그 사실을 인정하기가 두려웠던 거죠?” 제러드가 반점 투성이인 손으로 가이를 툭 찔렀다. 제러드의 평범함에는 상대방을 겁주는 힘이 느껴졌다.
“모르겠습니다.” 가이가 말했다.
“그건 찰스가 아버지를 죽이고 싶다고 말했기 때문 아닌가요? 그리고 헤인스 씨, 당신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불안했던 거죠?” (P302)
브루노는 벽난로 선반 위에 놓인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앤은 소파에 앉아 있었고, 고개를 약간 뒤로 젖히고 있어서 잔주름 장식이 있는 원피스의 옷깃 위로 목선이 환하게 보였다. 브루노는 가이가 언젠가 ‘앤은 내게 빛과 같은 존재’라고 말했던 게 떠올랐다. 앤을 목 졸라 죽일 수 있다면, 그는 가이와 함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얼굴을 찡그리고 웃어 보이고는 앉은 자세를 약간 바꾸었다.
“뭐가 우스워요?”
“그냥 생각이 떠올라서요.” 브루노가 웃으며 말했다. “가이가 늘 말하는, 모든 것에는 이중성이 있다는 생각이요.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이 나란히 있다는 생각, 모든 결정에는 그에 반대되는 이유가 있죠.” 그는 자신의 숨소리가 거칠어지고 있음을 문득 알아차렸다.
“모든 것에 양면성이 있다는 말인가요?”
“아니요, 그렇게 말하면 지나치게 간단하죠.” 여자들은 때로 있는 그대로의 모습밖에 볼 줄 몰랐다. “사람들, 감정들, 모든 것이 이중적이라는 거죠. 개개인의 마음속에 두 사람이 있는 거죠. 보이지 않는 당신의 일부처럼 당신과 정반대인 사람이 세상 어딘가에 있고, 숨어서 기다리고 있죠.” 브루노는 가이가 했던 말을 그대로 옮기면서 전율을 느꼈다. 그가 가이가 했던 말을 좋아하지 않았던 이유는 가이가 운명적인 적이라고 말했던 두 사람이 가이와 그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P323)
물이 첨벙하는 소리가 나자 가이는 브루노가 배에서 뛰어내렸음을 곧바로 알아차렸다. 그는 사람들이 무언가 말을 하기도 전에 조타실을 빠져 나왔다.
가이는 방수복을 벗으며 선미로 달려갔다. 누군가가 뒤에서 팔을 잡고 놓아주지 않자, 그는 뒤돌아서서 주먹으로 밥의 얼굴을 치고 갑판에서 뛰어내렸다. 순간 사람들의 목소리와 배가 흔들리는 소리가 멎더니 잠시 고통스러운 침묵이 흘렀고, 가이의 몸이 바다 위로 떠올랐다가 물속으로 들어갔다. 방수복을 벗는 동작이 슬로모션 같았고, 바닷물이 너무 차가워서 고통으로 몸이 벌써 얼어붙는 것 같았다. 몸을 세워 주변을 둘러보자 저 멀리 보이는 브루노의 머리가 반쯤 가라앉은 이끼 낀 바위처럼 보였다.
“가이!” 브루노는 울부짖으며 죽어가듯이 외쳤다.
가이는 욕지기가 났다. 브루노에게 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열 번째로 팔을 저을 때 다시 몸을 세웠다. “브루노!” 하지만 브루노의 모습은 아직 보이지 않았다.
“저기, 저기야!” 앤이 인디아호 선미에서 외쳤다.
브루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가이는 아까 봤던 지점을 떠올리며 앞으로 나아가 팔을 넓게 벌리고 손을 힘껏 뻗었다. 물속이라 빨리 나아갈 수 없었다. 마치 악몽을 꾸는 것 같았고, 숲 속 빈터에 있는 것 같았다. 가이는 파도가 일렁이는 물 밖으로 다시 나와 숨을 몰아쉬었다. 인디아호는 다른 곳에서 뱃머리를 돌리고 있었다. 왜 그에게 오지 않는 걸까? 왜 다른 이들은 상관도 하지 않는 걸까?
“브루노!”
브루노가 밀려오는 파도 뒤에 있을지도 몰랐다. 계속 앞으로 나아가던 가이는 자신이 방향 감각을 잃어버렸음을 문득 깨달았다. 파도가 그의 옆 얼굴을 거세게 때렸다. 그는 거대하고 사나운 바다에 대고 욕을 했다. 그의 친구, 그의 형제는 어디 있을까?
가이는 다시 물속 깊이 들어갔다. 최대한 깊게 들어가 우스꽝스러울 만큼 팔을 넓게 벌렸다. 하지만 고요한 회색 진공 상태가 모든 공간을 채워 버린 것 같았고, 그 속에서 그는 작은 점 같은 생명체였다. 견디기 힘든 외로움이 찾아와 그의 목숨마저 집어삼킬 기세였다. 그는 필사적으로 눈을 떴다. 희뿌연 회색빛이 갈색 마루가 되어 흔들거렸다.
“그를 찾았어?” 가이가 몸을 일으키며 불쑥 말했다. “지금 몇 시야?”
“가만히 누워 있어, 가이.” 밥의 목소리였다.
“그는 가라앉았어, 우리가 봤어.” 앤이 말했다.
가이는 눈을 감고 흐느껴 울었다. (P338-3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