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루이 말 감독 <마지막 선택> 1963년
영화 <마지막 선택>은 모던한 흑백 영상을 따라 흐르는 천재 재즈 뮤지션 에릭 사티의 피아노곡 ‘짐노페디(Gymnopedie)' 가 영화의 쓸쓸한 분위기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작품이다. <도깨비불>은 전후 파리 사교계에서 마약과 기행으로 악명을 떨치던 다다이스트이자 작가의 친구였던 자크 리고를 모델로 삼은 소설 <도깨비불>과, 리고가 자살했다는 소식에 충격을 받고 쓴 글 <잘 가라, 공자그>를 함께 묶은 작품이다. 정치 혼란과 경제공황을 겪던 1920년대 프랑스 젊은이들의 불안과 방황을 생생히 보여주는 작품으로, 1963년 에릭 사티의 음악과 루이 말 감독의 연출이 조화를 이룬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은둔의 마지막 단계에 갇혀 고립된 알랭은 물건 하나하나에 매달렸다. 그는 사람들하고는 대개 금세 이별했고 이별과 동시에 지워졌던 터라, 이런 물건들을 통해 자기 밖에 있는 무엇인가와 접촉하고 있다는 환상을 만들어냈다. 바로 이런 탓에 그는 졸렬한 우상숭배에 빠졌다. 그는 날이 갈수록 즉흥적이며 냉소적인 상상력에 따라 선택했던 음산한 사물들의 지배를 받았다. 원시인(그리고 어린아이들)에게 이런 사물들은 살아서 고동치는 것이었다. 즉 나무 한 구루, 돌 하나가 애인의 육체보다 더욱 암시적이었고 이런 것들이 그들의 피를 고동치게 했기 때문에 그들은 이런 것들을 신이라 불렀다. 그러나 알랭에게 이런 물건들은 출발점이 아니라 이 세상을 두루 돌아다니는 무익하고 짧은 여행이 끝난 후 탈진해서 돌아가는 지점이었다. 감정이 메마른 냉소적인 그는 이 세상에 개념을 부여하는 일을 자제했다. 철학, 예술, 정치, 도덕 등 모든 체계가 그에게는 실현 불가능한 허장성세처럼 보였다. 개념에 의해 뒷받침되지 못하는 이 세계는 너무 허술한 나머지 그에게 어떤 버팀목도 제공하지 못했다. 그에게는 오로지 단단한 것들만이 형식을 유지했다.
그는 바로 이 대목에서 착각했다. 사물에 유사 형식을 제공했던 것이 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교육을 통해 흡수했던 개념들의 찌꺼기였고, 이 개념을 가지고 자신이 무의식적으로 물질의 편린들을 만들어냈다는 사실을 그는 보지 못했던 것이다. 예컨대 정의(正義)의 개념과 방을 그토록 정갈하게 정돈하는 그의 취향 사이에 그가 모르고 있거나 혹은 부인했던 은밀한 관계가 있다고 누군가가 주장한다면 그는 대놓고 비웃었을 것이다. 그는 진리의 개념을 모르고 사는 것을 자랑삼았지만 잘 정돈된 성냥갑 앞에서는 열락에 빠졌다. 원시인은 어떤 대상을 보면 그것을 식량으로 생각하고 군침을 흘리며 곧 입안에 넣으려 들지만, 퇴폐주의자는 그것을 배설물로 보고 호분(好糞) 취향의 경배에 빠진다.
그날 알랭은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을 그 어느 때보다도 애절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리디아가 떠나서 감상에 젖었기 때문이다. (P30-31)
“하지만 며칠 전만큼 불안해 보이지 않는군요. 아직도 불안을 끌어안고 사십니까?”
“불안을 끌어안고 사는 게 아니라 항구적 불안에 빠져 있지요.”
“조금만 더 버틴다면 불안도 조금씩 풀릴 겁니다.”
알랭은 이 위선자에게서 눈길을 돌렸다. 박사는 겁이 나서 눈이 먼 데다 돌팔이 의사들의 껍데기 지식마저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거짓말을 밥 먹듯 해대는 것이다. 의지 자체가 병들었는데 어떻게 의지를 두고 왈가왈부할 수 있단 말인가?
사실 우리 시대의 커다란 잘못이 여기에 있다. 의사들은 사람들의 의지에 호소하는데, 의지란 잡다한 결심들로 인해 찢긴 것으로 결판이 났다고 선언하며 의지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바로 의사들이 따르는 교조이다. 개인적 의지는 다른 세대의 신화이다. 문명에 의해 닳고 닳은 종족은 의지를 신뢰하지 않는다. 그런 종족이라면 아마 억압 속으로 도피할 것이다. 공산주의와 파시즘에서 부상한 독재 체제는 마약중독자를 매질하겠노라 공언했다.
“미국 여자처럼 건전하고 강인한 여자라면 이 모든 것을 잊게 해줄 거요.” 박사는 걸핏하면 그런 말을 되풀이했다. (P43)
그는 거울을 통해 어깨 너머 쪽을 바라보았다. 텅 빈 방, 이 고독........ 그는 허리 깊숙한 곳에서 시작해서 골수까지 파고들어 그를 사로잡는 전율을 느꼈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얼음장 같은 벼락을 맞은 듯했다. 그에게 죽음은 철저히 현재형이었다. 그것은 고독이었고 알랭은 고독을 칼날 삼아 삶을 위협했으나, 이제 칼끝이 뒤집혀 그의 창자를 꿰뚫었다. (P52-53)
그런 다음 다시 홀린 기분으로 책상으로 갔다. 그는 인간 삶의 모든 뿌연 힘을 끊임없이 낚아채고 끌어모으는 그물망과 같은 글쓰기의 위력을 얼핏 엿본 것이다. 그는 잠금장치가 달린 작은 가방을 꺼내 항상 소지하고 다니는 자그마한 열쇠로 가방을 열었다. 그 안에는 글자가 빽빽이 적힌 종이 몇 장이 잠자고 있었다. 그중 하나에 “차표 없는 여행자”라고 적혀 있었다. 그것은 백지의 빈 공간에 문장 하나, 문단 하나, 단어 하나가 가늘게 늘어진 몇 줄의 불확실한 문장으로 된 초고 상태의 고백록이었다. 종잇장을 넘겼다. 평소보다 사뭇 덜했지만 두려움과 억압이 느껴졌다. 글만 쓰려고 하면 몸이 굳었다. 비록 자신의 영혼이 창백하지 않더라도 그것을 표현하려면 우선 영혼을 자제하고 억압하는 노력을 기울이고 고통을 겪어야 한다는 사실을 그는 여전히 모르고 있었다.
시작했다가 머뭇거리고 샛길로 빠지는 글을 몇 장 다시 읽어보았다. 허점이 보였다. 이 얄팍한 글에 더해지고 포함되어 살아나길 바라는 미세한 어떤 것들이 진저리를 치고 있었다.
알랭은 펜을 들고 주저하다가 종이에 과감히 글을 덧붙였다. 그가 삶에 가까이 다가가는 감동적인 순간이었다. 그는 예전에 스쳐 지나갔던 작가들한테서 문학을 경멸하는 법을 배웠다. 그는 이런 태도에서 자신의 경박성과 나태에 어울리는 최소한의 저항 노선을 찾았다. 하긴 산송장 같았던 그는 타당한 경멸감을 느끼며 문학이라 이름 붙였던 것 말고 다른 길이 있음은 상상할 수 없었다. 그 경멸을 가르쳐준 사람들이 몸 던져 매진했던 것도 다름 아닌 목적 없는 행위, 바로 문학이었다. (P59-60)
심사가 뒤틀어진 탓에 알랭은 선과 악이 혼재된 만사를 삶이 그에게 퍼붓는 빼어난 욕설이라고 간주했다. 그래서 그는 뒤부르를 그가 좋아하는 것을 약간, 증오하는 것을 많이 지닌 사람이라고 받아들였다. 뒤부르는 돈을 꾸어 주는 것이 아니라 거저 주는 장점을 지녔다. 그의 거짓말은 투명했다. 뒤부르는 자신의 장단점이 뒤섞여 녹아 있는 애정을 가지고 친구들에 대해 험담을 했지만 위선자였다. 겉으로 티를 내지는 않지만 가슴 한구석에 멍청한 속셈을 감추고 있었다. 그는 신에 대한 사랑을 가장하는 위선자가 아니라 삶을 사랑하는 척하는 위선자였다. (P68)
“친구, 자네가 착각한 것이 있어. 나는 오래전부터 심리학만으로는 만족하지 않았어. 내가 인간에게서 좋아하는 점은 그들의 열정 자체가 아니라 그 열정으로부터 산출된 존재들, 열정만큼이나 강한 사상, 신 같은 것이었어. 신들은 인간과 더불어 태어나 인간과 더불어 죽지만 신과 인간은 서로 뒤엉켜 영원 속으로 들어가거든. 하지만 이런 이야기는 하지 말자고...... 자, 내 생각은 이렇다네. 자네는 오래된 프티부르주아 집안 출신이네. 이 프티부르주아에게 돈이란 정원 한구석의 소박한 샘이었지. 내면의 교양을 키우는 데 필요한 물을 제공하는 소박한 샘 말이야. 프티부르주아는 편안하게 자아를 가꿀 수 있어야 했지. 따라서 상속을 받아 심심 파적하거나 결혼을 하네. 자네도 집안에 반항했지만 이런 편견을 자연스레 물려받았어. 자네는 우리 주변 사람들과는 달리 시대에 굴하지 않았어. 강제 노역이라는 새로운 법칙을 수락하지 않고 돈이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라는 전통에 매달려 있었지. 그 때문에 자네는 몽상가가 되었어. 그렇게 된 거지.”
“할 말 다 한 거야?”
뒤부르는 고개를 숙이고 당황한 표정으로 파이프를 피웠다. (P74-75)
세련된 사람들은 팔레에게 만족했다. 그의 정체를 알아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사진작가였다.
사진 예술이란 분야에서는 실수를 거듭한 끝에야 진실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실수들은 섬세한 것이고, 서로를 수정하고 무화한 후에야 비로소 파괴할 수 없는 잔여물이 추출된다. 그런데 사진작가로서의 팔레는 광적인 험담꾼의 기질을 털어내지 못했다. 자신의 모든 모델을 괴물로 만들었다. 틀에 박힌 냉소를 발휘하여 인물의 얼굴과 육체에 있지도 않은 추한 구석을 두드러지게 하면서 모델을 왜곡했다. 결국 강퍅한 악의로 인해 서투른 그의 손가락에서 나온 작품에 사실성은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러나 극장 구경과 귀동냥으로 머릿속을 채운 반쪽짜리 지식인, 생각 없이 틀에 박힌 생활을 하다보니 사교계 인사로 변한 지식인, 그 모든 파리의 건달들은 이 새로운 과장법, 이 새로운 나약함에 매료되었다고 생각했다. (P93-94)
‘이 모든 게 얼마나 치욕인가. 삶은 우리를 어디까지 모욕할 수 있는가. 그러나 나는 남보다 앞질러 죽음으로 들어갈 테다.’
따지고 보면 알랭에게는 기독교인다운 점이 있었다. 그러나 기독교적인 것을 넘어서서, 비록 자신의 허약한 점을 당연지사로 수긍하면서도 허약한 면과 타협하거나 그것을 일종의 힘으로 삼으려고 애쓰지도 않았다. 그는 차라리 부러질지언정 완강한 쪽을 더 좋아했다. (P126)
그 세계는 투박한 놈들의 세계다. 내가 자살하는 것은 내가 출세한 투박한 놈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나머지 사상, 문학, 이런 것들이란, 아! 내가 자살하는 것은 바로 여기에서도 가증스러운 거짓말이 상처를 입었기 때문이다. 거짓말, 거짓말. 그들은 어떤 진정성도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지만 그것에 대해 떠들어댄다. 더러운 놈들은 계속 떠들어댄다. (P150)
목덜미를 베개 더미에 기대고 침대 나무에 발을 버티고 단단히 자리를 잡고 몸을 동그랗게 웅크렸다. 벗은 가슴을 앞으로 활짝 드러냈다. 심장이 어디쯤에 있는지 잘 안다.
권총, 그것은 단단하고 강철로 되어 있다. 그것은 사물이다. 마침내 사물과 맞부딪치는 것이다. (P164-165)
너를 길들이거나 환상에 빠지게 하는 일은 아주 쉬웠으리라. 내리막길을 걷는 철학의 발길을 돌리게 하는 일, 철학을 바꾸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다.
손쉬운 일이라고? 너를 삶에, 우리에게 묶어두려면 가장 천박한 미끼만 있으면 되었으리라. 삶은 너에게 아주 보잘것없는 승리만을 거뒀을 뿐이다.
돈, 성공. 너는 시궁창과 죽음.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죽는다는 것, 그것은 네가 할 수 있었던 것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강하고, 가장 좋은 것이다. (P1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