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드리 니페네거의 <시간 여행자의 아내>

영화 <시간 여행자의 아내> 2009년

by 노용헌

<시간여행자의 아내>의 세트 디자인을 맡은 존 헛맨과 로케이션 헌팅을 맡은 던은 시간에 한정되지 않고, 세월도 비켜간 마법의 공간을 원했다. 첫번째 공간은 ‘클레어의 비밀 초원’이다. 초원은 ‘헨리’와 ‘클레어’가 처음 만나게 되는 장소임과 동시에 둘만의 사랑이 영원히 간직되는 장소이기도 하다. 두 번째 장소는 20살의 ‘클레어’와 28살의 ‘헨리’가 재회하는 도서관이다. ‘헨리’가 갑자기 사라지더라도 아무도 알아채지 못할 장소여야 했기 때문에 최대한 조용하면서도 고풍스러운 도서관이어야 했다. <시간여행자의 아내> 속 ‘헨리’의 시간여행은 시간여행을 통제할 수 없다는 점과 운명을 바꿀 수 없다는 점에서 기존 시간여행자들의 그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로베르트 슈벤트케가 연출하고 에릭 바나, 레이철 맥아담스가 출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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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숨어 있는 건 옷을 잃어버려서 난처해서 그래. 난 먼 길을 와서 배도 고픈데,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이젠 피까지 나잖아.”

“어디서 왔는데요? 어떻게 내 이름을 알아요?”

오로지 진실만을 이야기해야 한다.

“나는 미래에서 왔어. 난 시간 여행을 하는 사람이거든. 미래에선 우리 둘이 친구야.”

“시간 여행은 영화에 나오는 사람들이나 하는 거잖아요.”

“사람들이 그렇게 믿도록 우리가 만든 거야.”

“왜요?”

“모두들 시간 여행을 하면 세상이 너무 붐비거든. 너 작년 크리스마스 때 할머니 뵈러 갔을 때 오헤어 공항을 거쳐 가야 했는데 사람들이 굉장히 많았지? 나 같은 시간 여행자들은 그렇게 붐비고 사람 많은 게 싫어서 조용히 지내길 바란단다.” (P68)


헨리가 말한다.

“너는 미래를 바꾸자고 얘기하지만, 나한테 이건 과거야.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말하자면, 나는 노력했지만 결국은 그 일이 일어나게 도와주었을 뿐이라는 거지. 내가 뭔가를 말하지 않았다면 넌 일어나지 않았을 거고........”

“그런데 왜 지껄인 거야?”

“원래 그랬으니까. 넌 그냥 기다려야 해.”

헨리가 어깨를 으쓱한다.

“엄마 사고 때나 마찬가지야. 임머 비더(Immer wieder)."

언제나 다시, 언제나 똑같다는 뜻이다.

“인간의 자유 의지는 어쩌고?”

그는 일어나 창문으로 걸어가 이웃인 타팅거 씨 댁 뒤뜰을 내다본다.

“얼마 전에 난 1992년에서 온 나 자신과 그 얘기를 나눈 적이 있어. 그가 흥미로운 얘기를 하더라. 인간의 자유 의지는 제때에, 현재에서만 발휘될 수 있는 거래. 과거로 갔을 땐 우리가 예전에 행동했던 대로 할 수밖에 없고, 우리가 그곳에 있었던 그대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거야.”

“하지만 내가 어느 시간대로 가든, 그건 내 현재잖아. 내가 마음먹은 대로......”

“안 돼, 그건 안 되는 것 같아.”

“미래에 대해서는 뭐라고 했어?”

“글세, 생각해 봐. 네가 미래로 가서 뭔가 행동을 취하고 현재로 되돌아온다고 치자. 그럼 네가 한 그 일은 네 과거의 일부가 되는 거야. 그러니까 그것 역시 피할 수 없는 일이겠지.” (P95-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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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어: 나는 초원에 서 있다. 때는 6월 말이고 늦은 오후여서, 몇 분 뒷면 저녁 식사를 위해 샤워를 해야 할 시간이다. 기온이 떨어지고 있다. 10분 전만 해도 하늘은 새파랗고 초원엔 묵직한 열기가 드리워져, 거대한 유리 천장을 씌운 온실처럼 모든 것들이 더위 때문에 축 늘어져 있었다. 목청껏 울어 대는 풀벌레 소리 말고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작고 고요한 연못을 가로지르는 좁은 다리에 걸터앉아 수면에서 미끄러지듯 헤엄을 치는 벌레를 지켜보며 헨리 생각을 하고 있다. 오늘은 헨리가 오는 날이 아니다. 다음 만남은 21일이나 더 기다려야 한다. 이젠 훨씬 서늘하다. 헨리는 나에게 수수께끼다. 지금껏 살면서 나는 헨리의 존재를 대수롭지 않게 그냥 받아들였다. 비밀이기 때문에 자연히 헨리는 매혹적인 존재였지만 일종의 기적이기도 했는데, 최근 들어서야 나는 모든 여자애들이 헨리 같은 존재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니며, 혹시라도 다들 갖고 있는 것이라면 모두들 비밀을 참 잘 지키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P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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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 잘 생각해보자. 먼저 우리 앞에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모두 동시에 공존하고, 모든 일이 이미 일어나 있는 우주가 있어. 두 번째는 혼돈이야. 우리는 모든 일의 다양한 가능성을 모두 알 수는 없기 때문에, 그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있고 예측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는 우주지. 세 번째는 기독교적인 우주, 하느님이 모든 걸 창조하셨고 모든 사물은 나름의 목적이 있지만, 우리 인간은 어쨌든 자유 의지를 갖고 있어. 자, 우린 그 세 가지 중에서 선택을 해야겠네. 그렇지?” (P124-125)


“난 언제나 그런 상황에 놓여요. 장난삼아 하는 말이 아니라, 나한테 문제가 좀 있어요. 아무 이유 없이 시간을 떠도는 거죠. 나로선 통제할 수도 없고 언제 일어날지, 어느 곳에 어느 시간대에 떨어지게 될지도 알 수 없어요. 그래서 그런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자물쇠를 따고, 도둑질과 소매치기, 강도질, 구걸, 무단 가택 침입, 자동차 절도, 거짓말, 폭행 따위를 저질러요. 당신이 상상하는 건 아마 다 해 봤을 거예요.” (P224-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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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사람을 사랑해요. 그는 내 인생이에요. 나는 평생동안 그를 기다려 왔는데, 지금 그 사람이 내 곁에 있어요.”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지 나도 모르겠다.

“헨리와 함께 있으면 나는 모든 것이, 과거와 미래가 지도처럼 한꺼번에 펼쳐져 있는 걸 느껴요. 마치 천사와 함께 있는 듯.......”

나는 고개를 흔든다. 말로 설명할 수가 없다.

“그 사람한테 손을 뻗으면 나는 시간을 어루만질 수 있고...... 그이는 나를 사랑해요. 우리가 결혼하려는 건 서로의 일부분이기 때문이죠..........” (P233)


“지금껏 내가 옮겨 다닌 범위는 앞뒤로 50년 정도야. 하지만 미래로 간 적은 거의 드물어서 쓸 만한 정보를 얻을 만큼 뭔가를 많이 보지도 못했어. 미래로의 여행은 늘 짧았지. 어쩌면 내가 보고 있는 게 무슨 의미인지 파악하지 못한 걸 수도 있겠지. 아마 과거의 사건들이 나에게 더 많이 작용하나 봐. 과거로 돌아가면 난 훨씬 더 안정감을 느껴. 아무래도 미래 자체가 덜 확실하게 느껴지기 때문이겠지? 나도 잘 모르겠어. 아무튼 미래로 가면 늘 공기가 희박한 느낌이 들어. 뭔가 다른 그 느낌 때문에 ‘아, 여기는 미래로구나.’ 하고 여길 수 있지. 거기서는 숨이 차서 달리기도 힘들어.”

헨리가 의미심장하게 말을 마치자 문득 나는 옷도 친구도 없이 완전히 낯선 시간과 장소에 존재해야 하는 그의 공포가 얼핏 보이는 것 같다. (P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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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나는 그에게 모든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처음부터, 깨달음, 생존을 위한 몸부림, 미리 아는 것의 기쁨, 바꿀 수 없는 사실들을 알게 되는 공포, 상실의 아픔까지, 이제 우리는 침묵 속에 앉아 있고, 마침내 그가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본다. 켄드릭의 흐린 갈색 눈동자에 깊이 서린 슬픔을 보며, 문득 나는 모든 걸 되돌리고 싶다. 의사 앞에 모든 짐을 내려놓고 난 뒤에, 이 모든 것을 고민해야 하는 그의 짐스러운 부담감을 모면하게 해 주고 싶어진다. 그가 담뱃갑에 손을 뻗어 한 개비를 뽑아 들고는 불을 붙여 한 모금 깊이 빨아들였다가 연기를 내뿜는다. 푸르스름한 구름처럼 새어 나온 연기는 석양 빛줄기를 지니며 하얗게 변하면서 그림자를 드리운다.

“불면증이 있나요?”

그가 오래 말을 하지 않아 거슬리는 목소리로 묻는다.

“네.”

“하루 중에서 특별히 자주 사라지는 때가 있나요?”

“아........ 이른 새벽인 경우가 많은 것 같기는 합니다.”

“두통은요?”

“있어요.”

“편두통인가요?”

“아뇨, 머리를 사방에서 짓누르는 것 같은 두통이에요. 시야가 흐려지고 빛의 번짐 같은 것도 동반합니다.”“흠.”

켄드릭이 일어나자 무릎 관절에서 우두둑 소리가 난다. 그가 카펫 가장자리를 따라 사무실을 서성이며 담배를 피운다. 그런 그의 행동이 내 신경에 거슬릴 때쯤 그가 다시 자리에 앉는다.

“시간 유전자라고 하는 게 있습니다. 태양의 움직임에 따라 생체주기 리듬을 관장하는 역할을 하죠. 우리가 찾아낸 바로는 전반적인 신체 부분의 다양한 세포 안에 그 유전자가 존재합니다. 하지만 특히 시각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는데, 댁의 증상도 시각적인 것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 같군요. 시신경 교차점 바로 위에 자리한 시상하부의 상염색체 핵이 일종의 리셋 버튼 같은 것으로서 시간 감각을 조절하니까, 거기부터 시작해 봅시다.” (P64-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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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한 연도는 알 수가 없다. 옷차림과 머리 모양이 2001년과 크게 다르지 않은 걸 보면 아주 먼 미래는 아닌 것 같다. 이번의 짧은 여행에 대해서는 흥분되기도 하고 동시에 염려스럽기도 하다. 현재 클레어는 앨바를 언제 낳을지 모르는 상황이라 내가 꼭 곁에 있어 주고 싶은 마음인데, 한편으로는 미래로 찾아온 것치고는 대단히 정신이 명료하고 기분이 좋기 때문이다. 마치 현재에 있는 것처럼 강하고 든든한 느낌이 든다. (P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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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놀란 표정으로 우리를 쳐다보는 가운데 교사가 다급하게 우리에게 다가온다.

“앨바, 이분 누구시니? 댁은 누구시죠?”

“전 헨리 드템블입니다. 앨바의 아버지죠.”

“우리 아빠예요!”

선생님이 어쩔 줄 몰라 하며 손을 비튼다.

“저, 앨바의 아버님은 돌아가셨는데요.”

나는 말문이 막힌다. 하지만 내 딸 앨바가 상황을 주도한다.

“돌아가시긴 했죠. 하지만 ‘계속해서’ 돌아가신 채로 있는 건 아니예요.”

아이가 선생님에게 말한다. 나도 정신을 차린다.

“설명 드리기 좀 어렵지만.....”

“아빠도 CDP(시각 일탈 장애인, Chrono-Displaced Person)세요.” (P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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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올린으로? 선생님은 누구신데?”

“할아버지요.”

순간적으로 내 할아버지를 의미하는 줄 알았던 나는 잠시 후에 아버지를 얘기한 것임을 깨닫는다. 잘된 일이다. 앨바가 아버지한테 가르침을 받는다면 아이 실력은 정말로 대단해질 게 틀림없다.

“바이올린 잘하니?”

참 무례한 질문도 다 있다.

“네, 아주 잘해요.”

아이고 고마워라.

“나는 음악에 영 소질이 없었는데.”

“할아버지한테 그 얘기 들었어요.”

아이가 까르륵 웃는다.

“그래도 음악은 좋아하잖아요.”

“아네트 할머니 노래 들어 봤는데 정말 멋졌어요!”

“어떤 음반으로?”

“진짜로 가서 뵈었어요. 할머니가 <아이다> 노래할 때.”

“아빠도 CDP세요. 저처럼.”

오, 젠장.

“너도 시간 여행을 하는구나.”

“그럼요.”

앨바가 행복하게 미소를 짓는다.

“엄마는 아빠랑 나랑 똑같이 닮았다고 만날 얘기해요. 켄드릭 박사님은 내가 신동이래요.”

“어째서?”

“가끔은 내가 가고 싶은 때와 장소로 갈 수 있거든요.” (P160-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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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나는 설명을 시작한다. 시간 여행자가 되어 산다는 것과, 시간 여행의 현실적인 문제, 그리고 유전적인 부분에 대해 털어놓는다. 모든 것이 결국엔 일종의 질병이라는 점과 나로서는 통제가 안 된다는 점도 설명한다. 켄드릭 박사에 대해서, 클레어와 내가 어떻게 거듭 만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반복되는 시간의 고리, 양자 역학, 광양자, 빛의 속도에 대해서, 그리고 대부분의 인간들이 당연하게 생각하는 시간의 제약에서 벗어나 살아가는 느낌에 대해서도 설명한다. 거짓말과 도둑질, 두려움에 대한 이야기도 빼놓지 않으며, 정상적인 삶을 살기 위해 내가 얼마나 애써 왔는지도 설명한다.

“정상적인 삶의 일부는 정상적인 일자리를 갖는 것이겠죠.” (P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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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샤리스에게 말한다. 친구는 미소를 짓는다.

“어렸을 때 내 꿈이었거든. 어릴 땐 나중에 커서 미용사가 되고 싶었지.”

내가 웃음을 터뜨린다.

“그 꿈을 완전히 포기할 수가 없어서 예술가가 됐구나?”

“고메즈를 만나는 바람에 여자들 머리를 파마해 주는 걸로는 여성을 혐오하는 부르주아 자본주의 사회 체제를 전복시킬 수 없다는 걸 깨달은 거지.”

“그렇다고 우리가 그걸 굴복시켜서 예술이라는 명목으로 팔고 있는 것도 아니잖아.”

“본인 생각을 좀 하시지. 사람들은 그저 아름다운 것에 중독된 것뿐이야.”

“아무리 생각해도 우린 유죄야.”

우리는 식당 쪽으로 자리를 옮기고 샤리스는 접시에 음식들을 산처럼 쌓기 시작한다.

“그래서 요즘엔 무슨 일해?”

내가 친구에게 묻는다.

“예술로서의 컴퓨터 바이러스.”

“어머나, 그거 불법 아니야.”

“음, 아니야. 난 그냥 바이러스를 설계해서 그 html 화면을 캔버스에 그림으로 옮겨 전시회를 여는 것뿐이야. 실제로 바이러스를 퍼뜨리지는 않는단 말이지.”

“그래도 누군가 할 수는 있잖아.”

“물론이지.” (P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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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커피를 마시며 시간을 되돌려 보려고, 지금과 그때의 차이를 지워 보려고 애를 쓴다. 나를 여기 붙들어 두는 것은 오로지 내 추억뿐이다. 시간이여, 나를 사라지게 해 다오. ‘그리하여 바로 우리의 존재로 인해 서로 떨어져 있는 우리가 만날 수 있도록.’ (P3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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