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사랑할 때와 죽을 때> 1958년
소설 <사랑할 때와 죽을 때>는 1954년,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가 집필한 대표적인 반전 소설이다. 소설 <서부 전선 이상 없다>가 1차 세계대전의 서부전선이 배경이라면, 이 소설은 2차 세계대전의 동부전선이 배경이다. 1958년에는 더글러스 서크 감독이 이 소설을 영화화 했다.
12월의 전사자들 곁에서는 1월의 전사자들이 가지고 있던 무기가 발견되었다. 총과 수류탄은 시체보다 깊이 묻혀 있었다. 철모도 발견되었다. 시체들이 걸치고 있던 군복에서 인식표를 쉽게 떼어 낼 수 있었다. 눈 녹은 물 때문에 옷감은 이미 흐물흐물했다. 열린 입에 물이 괴어 시체들은 마치 익사한 것 같았다. 팔다리가 이미 해동되어 있는 시체도 있었다. 이런 시체들은 들것으로 나를 때, 몸뚱이는 경직되어 있었지만 하나의 손이 달린 하나의 팔은 어느새 흔들거렸다. 마치 죽은 자가 어떤 신호를 보내는 듯했다. 경악스러우면서도 무덤덤하고 또한 외설적이기까지 한 움직임이었다. 시체들은 햇빛 아래 놓이면 우선 눈(目) 부위부터 녹아내렸다. 눈은 광채를 상실했고, 동공은 아교질처럼 번들번들했다. 눈 속의 얼음이 녹아서 천천히 흘러나왔다. 마치 울기라도 하는 것처럼. (P9)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아. 모든 건 전쟁 탓이야.”
프레젠부르크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산책용 지팡이로 각반에 들러붙은 눈을 털어 냈다. “그렇지 않아, 에른스트. 우리는 척도라는 걸 상실했어. 사람들은 우리를 십 년 동안이나 고립시켰어. 하늘을 향해 소리 지르는, 무시무시하고 비인간적이고 가소로운 오만 속으로 우리를 고립시킨 거야. 그들은 우리가 지배자 민족이며, 다른 민족은 모두 노예로서 우리에게 봉사해야 한다고 선언했지.”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지배자 민족! 모든 멍청이, 모든 사기꾼, 모든 명령에 복종하는 지배자 민족, 그게 도대체 무어란 말인가? 바로 여기에 그 답이 있네. 언제나 죄 지은 인간들보다는 죄 없는 인간들이 그 업보를 받는 거네.” (P56)
그래버는 선로를 보았다. 선로는 고향, 안정된 것, 따스한 것, 기다림, 평화, 그리고 아직도 남아 있는 유일한 것으로 통하는 길이었다. 그리고 이제 그것은 바깥에서 살금살금 기어오는 것처럼 보였다. 그것은 그래버의 곁에서 으스스하게 숨을 쉬었다. 그것은 이제 위협하여 쫓아 버릴 수도 없었다.
“휴가라고, 이게 나의 휴가라고? 이제 어쩔 건가?” 쾰른 출신의 사내가 쓰디 쓴 웃음을 날렸다.
다른 사람들은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기만 할 뿐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잠복해 있던 병이 그에게서 갑자기 모습을 드러내기라도 한 것 같았다. 그는 죄가 없었다. 다만 그의 운명이 특별할 뿐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눈에 띄지 않게 그에게서 천천히 물러났다. 모두들 자신이 그런 운명에 처하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아직도 확신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의 곁을 떠났다. 불행은 전염되는 법이니까. (P97)
“이 거리엔 아무도 살지 않아.”
“아무도?”
“아무도. 난 잘 알아. 나도 전에 여기 살았으니까.” 사내는 갑자기 이를 드러내며 소리를 질렀다. “여기 살았지! 여기 살았다고! 우린 여기에서 이 주일 동안 여섯 번이나 공습을 당했어. 일선 군인 양반! 하지만 자네들 빌어먹을 놈들은 전선에서 빈둥거리기만 했어. 자네들은 건강하고 즐거워 보여. 금방 보면 알지! 그런데 내 마누라는? 저기.......” 그러면서 그는 바로 앞의 집을 가리켰다. “누가 내 마누라를 파 주겠나? 아무도 못해! 죽었어! 지금 파내도 소용없다고 구호반이 말하더군. 시급한 일이 너무 많다면서 말이야. 빌어먹을 문서들, 사무실, 관청부터 구해야 한다는 거야.”
그는 수척한 얼굴을 그래버 쪽으로 내밀었다. “군인 아저씨, 하나 가르쳐 줄까? 사람이란 자신에게 닥치기 전까지는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모르는 거야. 알게 된다면 이미 그때는 너무 늦었지, 알겠어? 일선 군인 양반!” 그는 침을 탁 뱉었다. “훈장을 탄 용감한 군인 아저씨! 18번지는 저기야. 지금 삽질하고 있는 곳이야.” (P113)
그는 층계 옆에 쪼그리고 앉았다. 야곱의 사다리라고 그는 생각했다. 저건 무엇이었을까? 하늘로 올라가는 사다리가 아니었을까? 천사들이 그 위로 날아다니지는 않았을까? 천사들은 어디로 간 것일까? 비행기로 변했을까. 모든 것은 어디에 있는가? 지구는 어디에 있는가? 지구는 오로지 무덤을 위해서 아직도 그대로 있는 것인가? 나는 무덤을 팠어. 많은 무덤을, 하고 그는 생각했다. 나는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왜 아무도 나를 도와주지 않는가? 나는 폐허들을 수없이 보아 왔어. 하지만 진짜 폐허를 본 적은 한 번도 없었어, 오늘에서야 진짜를 본 거야. 바로 이 폐허를, 이것은 다른 폐허들과는 달라, 왜 나는 저 아래에 누워 있지 않은 걸까? 나는 저 아래 누워 있어야 마땅해. (P122-123)
“친척 분의 이름이 여기에 없다면 오히려 다행입니다.”
“왜 그렇죠?”
“이건 사망자나 중상자의 명부입니다. 보고되지 않았다면 실종자입니다.”
“그렇다면 실종자는요? 그 명부는 어디 있지요?”
직원은 매일 여덟 시간씩, 도와주지도 못하면서 타인의 불행을 취급해야 하는 사람답게 인내심을 갖고 그를 바라보았다. “잘 생각해 보세요. 실종자는 실종자일 뿐입니다. 실종자 명부를 만들어서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런 명부를 만들어 봤자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어요. 그리고 그들의 행방을 우리가 안다면 그들은 더 이상 실종자가 아니지요. 안 그래요?”
그래버는 그를 쳐다보았다. 직원은 자신의 정연한 논리에 자부심을 느끼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성과 논리라는 것은 손실이나 고통과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한쪽 팔을 잃은 사람에게 더 이상 무슨 말을 하겠는가?
“그럴 테지요.” 그래버는 그렇게 말하고는 몸을 돌렸다. (P131)
“강제 입주자예요. 여기로 보내진 거지요. 내가 이 방에서 살 수 있는 것만 해도 다행으로 여겨야 해요.”
밖에서는 다시 소음이 들렸다. 여자가 외치는 소리와 아이가 우는 소리가 들렸다. 아까의 경계경보 신호가 더욱 커졌다. 엘리자베스는 레인코트를 꺼내어 입었다. “방공호로 가야 해요.”
“아직 시간이 많아. 그런데 왜 이런 곳에서 나가 버리지 않아? 저런 밀고자와 함께 산다는 건 지옥일 텐데.”
“불 꺼!” 여자가 밖에서 또 소리를 질렀다. 엘리자베스는 몸을 돌려 급히 불을 끄고는 어두운 방을 지나 창가 쪽으로 미끄러지듯 걸어갔다. “왜 이사하지 않느냐고? 도망치고 싶지 않아서 그래요!”
그녀가 창을 열었다. 갑자기 사이렌 소리가 밀려들면서 방을 가득 채웠다. 그녀는 밖에서 산발적으로 비쳐 오는 희미한 빛을 받아 검은 실루엣이 된 채로 서 있었다. 그리고 두 창문 짝을 단단하게 걸어 닫았다. 유리창은 폭발 때의 공기 압력으로 쉽사리 부서졌다. 그녀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소음이 마치 격류처럼 그녀를 몰아가고 몰아오는 것 같았다. 그녀가 울부짖는 소음을 뚫고 소리쳤다. “도망치는 것이 싫어요. 이해가 되지 않나요?” (P150)
그녀가 몸을 돌렸다. “우리 얼마 만에 다시 만난 거죠.”
“한 백 년은 됐을 거야. 당시에 우린 어렸고, 전쟁 같은 건 없었지.”
“그런데 지금은?”
“이제 우리도 나이가 들었어. 별다른 경험도 없이 말이야. 나이만 먹고 냉소적이고 신앙도 없고 때로는 슬프기만 하고 자주 우울해져.”
그녀가 그를 쳐다보았다. “그게 정말일까요.”
“모르겠어. 하지만 진실이란 무얼까? 너는 알아?”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흔들었다. “모든 사람에게 진실해야 할까요?” 그녀가 물었다.
“그렇진 않겠지, 그런데 왜 그런 질문을?”
“모르겠어요. 하지만 저마다 자기가 진실이라고 믿는 것을 다른 사람한테 그렇게 강요하지만 않는다면 전쟁은 덜 일어날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버가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하는 말이 귀에 쏙쏙 들어왔다.
“문제는 관용이군. 모자라는 건 바로 그거야. 그렇지?” (P188-189)
“에른스트, 광신이라는 것이 때로는 개인의 이익과 일치한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엘리자베스가 씁쓸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래, 일치하는 때가 많아. 그런데도 그 점을 늘 잊고 있다는 게 정말 이상해! 일단 한번 익히고 나서 아무 생각 없이 반복하게 되면 그게 바로 상투적인 게 된다는 거지. 이 세상은 원래 라벨이 붙어 구분되어 있던 건 아니야. 인간도 물론 그렇지 않고, 아마 그 독사 같은 여자도 자기 아이나 남편, 꽃이나 귀중한 건 모두 사랑할 거야. 그런데 이 여자는 네 아버지를 고발할 이유가 있었던 걸까, 아니면 모든 걸 지어낸 걸까?”
“아버진 선량한 분이지만 조심성이 별로 없었어요. 아마 오래전부터 감시를 당했던 것 같아요. 자기 집이라 해도 하루 종일 당의 연설을 들어야 한다면 가만히 있지 못하는 사람도 생길 수밖에요.”
“도대체 그분이 무슨 말씀을 하셨을까?”
엘리자베스는 어깨를 으쓱했다. “아버진 독일이 승리할 거라고 믿지 않으셨어요.”
“지금도 믿지 않은 사람이 얼마든지 있어.”
“당신도?” (P190-191)
“우리는 빛을 받았고, 빛은 우리를 인간으로 만들어 주었어요. 그런데 우리가 빛을 죽였고, 우리는 다시 동굴 속에 살게 된 거예요.” 엘리자베스가 흥분해서 말했다.
빛이 과연 우리를 인간으로 만들었을까, 하고 그래버는 생각했다. 너무 과장된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녀의 말이 옳을지도 모른다. 동물은 빛을 가지고 있지 않다. 빛도 불도 그리고 폭탄도 가지고 있지 않다. (P202-203)
“그랬다면 운이 나쁜 거야. 요즘엔 재수 없게 걸려드는 자들이 얼마든지 있어, 에른스트, 예를 들면 폭탄에 맞은 사람들이지, 이 도시만 해도 오천이야. 모두가 집단 수용소에 있는 인간들보다 나은 인간들이지, 그러니 거기서 일어나는 일이 나와 무슨 상관이겠어? 내 책임이 아닌 거지, 물론 네 책임도 아냐.”
참새 몇 마리가 짹짹거리며 잔디밭 한가운데에 있는 연못을 행해 날아갔다. 그중 한 마리는 연못 안으로 걸어 들어가 날개로 물을 철벅거렸다. 그러자 참새들이 모두 물속으로 들어가 날개로 물을 첨벙이며 장난질을 했다. 알폰스는 꼼짝도 않고 그것을 관찰했다. 하이니 따위는 이미 잊어버린 것 같았다.
그래버는 그의 만족스럽고 악의 없는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정의감도 연민의 정이라는 것도 영원히 절망의 선고를 받을 수밖에 없으며 이기주의와 무관심과 불안감에 부딪쳐 언제나 난파하기 마련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또한 자신도 예외가 아니라 익명으로 거기에 함께, 간접적으로 그리고 두려운 방식으로 얽혀 있음을 깨달았다. 아무리 거부하려고 해도 그와 빈딩은 어떤 식으로든 함께 엮여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책임이란 건 그리 간단한 게 아냐. 알폰스.” 그래버가 우울하게 말했다. (P237-238)
그는 혼란의 와중에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상대는 내가 잘 모르는 인간이고 나에게 아무 짓도 하지 않았으므로 개인적으로 복수할 필요는 없는 인간이다. 엘리자베스의 아버지가 이미 하이니의 희생자 중 한 사람이 되어 버렸는지 아닌지는 아직 모른다. 오늘이나 내일까지는 희생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포로들도 아니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도 누군가에게 나쁜 짓을 했는지 모른다. 그렇다면 그것에 대한 책임은 어떻게 물을 것이며 속죄는 어떻게 할 것인가?
그는 하이니의 등을 노려보았다. 입술이 바싹 말랐다. 어디선가 개 한 마리가 대문 뒤에서 짖어 댔다. 그는 깜짝 놀라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가 생각했다. 너무 취했어, 멈추어야 해, 이 모든 건 나하고는 상관없는 일이야. 이건 미친 짓이야, 그러나 그는 더 빠르게 살금살금 앞으로 걸어갔다. 어떤 목소리에 의해 내몰리고 있었다. 윙윙거리며 내면을 울리는 정의의 필연성, 지금까지 있었던 수많은 죽음에 대해 보상하고 균형을 맞추어야 한다는 어떤 목소리. (P240)
그래버가 말했다. “무슨 말인지 선생님은 이미 알고 계십니다. 선생님은 우리에게 종교를 가르치셨어요. 저는 전쟁에 패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고, 또한 노예 제도와 살인, 집단 수용소, 친위대와 보안부, 대량 학살과 비인도적 행위를 중단시키기 위해선 전쟁에 패해야 된다는 것도 잘 압니다. 그렇게 알고 있으면서도 이 주 후에 다시 일선으로 가서 전투에 가담한다면 도대체 저는 어디까지 공범자가 되는 것입니까?”
폴만의 얼굴이 갑자 잿빛으로 변하며 핏기를 잃었다. 하지만 눈빛만은 생생했는데, 기이할 정도로 투명한 푸른빛이었다. 어디선가 본 듯한 눈빛이었지만 어디서 보았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자네는 다시 일선으로 가야 하는가?” 마침내 폴만이 물었다.
“거부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그렇게 되면 교수형이나 총살을 당합니다. 혹은 탈영할 수도 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체포되고 말 겁니다. 경찰 조직과 정보원들이 철통같이 지키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성공한다 해도 어디에 몸을 숨길 수 있을까요? 숨겨 주는 사람은 자기 목숨을 버릴 각오를 해야 하는데요. 그뿐 아니라 제 부모님께도 보복할 겁니다. 아주 가벼운 죄로도 집단 수용소로 끌려가 거기서 죽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일선으로 돌아가 아무런 방어도 하지 말아야 할까요? 그러면 그건 자살행위가 될 겁니다.” (P249)
“불쌍한 계란 머리, 그 녀석은 내게 화난 게 아니라 마누라한테 화가 난 거야. 일선으로 가면 마누라가 배신할 거라고 믿고 있어. 게다가 마누라가 결혼 수당을 받는다고 속이 부글부글 끓었어. 그 돈으로 마누라가 정부와 놀아날 거라고 생각하는 거지.” 로이터가 말했다.
“결혼 수당? 그런 것도 있나?” 그래버가 물었다.
“이 양반아, 넌 어디 갔다 온 거야?” 펠트만이 고개를 흔들었다. “여자들은 매달 200마르크를 받아, 상당한 금액이지. 그 때문에 결혼한 사람들이 꽤 된다고. 뭐 때문에 그 돈을 국가에 마치겠나?”
로이터가 창가에서 뒤를 돌아보았다. “자네 친구인 빈딩이 여기 와서 자네를 찾았어.” 그가 그래버에게 말했다. (P278)
폭격은 잦아들었지만 고사포는 계속 발사되고 있었다. 그래버는 옆길을 통해 광장으로 되돌아갔다. 그는 가까운 방공호로 가지 않고 광장 한쪽 끝에 새로 생긴 폭탄 구덩이 속으로 들어갔다. 구덩이는 악취로 질식할 것만 같았다. 그는 가장자리로 기어 나와 거기 누워서 공장을 노려보았다. 그래버는 생각했다. 여기서의 전쟁은 또 달라. 일선에서는 각자가 자신만 보살피면 돼. 같은 중대에 형제라도 있다면 그만큼 신경을 쓰면 되고, 하지만 여기서는 누구든지 가족이 있어. 그리고 누가 총을 맞을지도 몰라. 누구든 같이 당하는 거야. 그러니 곱, 세 곱 아니 열 곱으로 힘든 전쟁이야. 그는 다섯 살짜리 여자애의 시체가 떠올랐다. 자신이 보았던 수많은 시체들, 그리고 부모님과 엘리자베스도 떠올랐다. 별안간에 이 모든 것을 빚어낸 인간들에 대해 발작과도 같은 증오심이 일었다. 조국의 경계선에 머무는 그런 증오심이 아니었으며, 신중함이라든지 정의와는 아무 상관없는 증오심이었다. (P383-384)
“여기 내가 옷을 꾸려 놓았어. 거의 네 옷이야. 네 아버지 사진도 거기에 있어. 침대 시트도 들어 있고, 가구도 꺼내도록 해 볼게. 아직 늦지 않았으니까.” 그래버가 말했다.
“그냥 놔둬요. 다 타도록.”
“왜? 아직 시간이 있는데.”
“그냥 타도록 내버려 둬요. 그러면 모든 게 끝나 버릴 테니까. 그게 맞아요.”
“무엇이 끝나지?”
“과거가, 과거는 우리로서도 어쩔 수 없어요. 우리에게 짐만 될 뿐이에요. 좋았던 것도 마찬가지예요. 우린 모든 걸 새로 시작해야 해요. 과거는 이미 무너졌어요. 우린 돌아갈 수 없어요.” (P395)
폴만이 미소를 지었다. “자네 말이 옳아. 그러나 전제 정치가 오래 계속된 적은 결코 없었네, 인류는 편편한 대로를 걸어서 진보하진 않았어. 밀기도 하고 순식간에 전진하기도 하고 후퇴하면서 경련을 일으키기도 했지. 우리 인간들은 너무 교만했어. 피투성이 과거를 이미 극복했다고 생각했지. 그러나 이제 우리는 과거로 돌아가지 않고는 현재를 성찰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어.”
그는 모자를 들었다. “이제 가 봐야 하네.”
“이건 선생님이 주신 스위스 그림책입니다. 비에 좀 젖었어요. 저는 꿈을 잃었지만 이 책을 보고 다시 찾았습니다.” 그래버가 말했다.
“잃어버린 꿈을 다시 찾을 필요는 없어. 꿈이란 건 다시 찾을 필요가 없는 거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 그 밖에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요?” 그래버가 말했다.
“중요한 건 믿음이야. 꿈은 언제라도 새롭게 창조되는 거야.”
“그럴지도 모르겠군요. 그렇지 않다면 차라리 목을 매 죽는 편이 낫겠지요.”
“자네는 아직도 젊어, 내가 무슨 말을 하겠나? 자네는 정말이지 아직도 젊어.” 폴만은 외투를 걸쳤다. “이상한 일이야. 나는 청춘이라는 걸 언제나 완전히 다른 식으로 보았으니까 말이야.” (P415)
“아이들은 매일 태어나요.” 엘리자베스가 말했다.
그래버는 히틀러 유겐트와 자기 부모님을 고발했다는 어린애를 떠올렸다. “무엇 때문에 우리가 이런 말을 하는 거지? 그저 희망에 불과해. 안 그래?” 그가 말했다.
“아이를 가지겠다는 생각이 조금도 없어요?”
“잘 모르겠어. 평화로운 시대라면 얘기가 다르겠지만. 지금까지 거기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없어. 우리 주위는 온통 황폐해졌고 대지는 오랫동안 독으로 가득할 거야. 그런데 어떻게 어린애를 가질 생각을 할 수 있을까?”
“바로 그래서 필요한 거예요.” 엘리자베스가 말했다.
“왜?”
“애들을 그런 환경에 맞서 싸우도록 교육하기 위해서죠. 만일 현재와 같은 사태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모두 아이를 낳지 않는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야만스러운 사람들만 아이를 낳게 된다면 어찌 되겠어요? 그렇게 된다면 누가 이 세상에서 정의를 다시 실현할 수 있겠어요?”
“당신은 그래서 아이가 필요하다는 건가?” (P478-479)
“기차는 6시에 출발해. 짐은 모두 다 꾸려 놓았어. 이제 나는 가야 해. 역에는 나오지 마. 여기서 바로 떠나고 싶어. 여기 네가 살고 있는 모습 그대로를 가져가고 싶어. 정거장에 가면 사람들도 붐비고 또 당황하게 될 거야. 지난번에 어머니가 정거장까지 오셨거든. 오시지 말라고 할 수가 없었어. 결국은 어머니나 나나 무척 힘들었지. 거기서 벗어나는 데 한참이나 걸렸어. 역에서 울고 있는, 지치고 땀을 흘리는 여자만 머릿속에 떠올랐거든. 실제의 어머니가 아니라. 무슨 말인지 알겠어?”
“알겠어요.” (P481)
“둘 중 하나는 놈들을 처치해야 돼. 끌고 갈 수는 없어. 물렁한 생각은 버려. 어서, 나도 도울 테니.”
“안 돼, 쏘지 마.” 그래버가 말했다.
“안 된다고?” 슈타인브레너가 눈을 치켜뜨며 쳐다보았다. “안 된다고?” 그가 천천히 반복했다. “네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기는 아는 건가?”
“알아. 알고말고.”
“그래, 안다고? 그렇다면 네가 무슨 짓을 하는지도......”
슈타인브레너의 얼굴이 돌변했다. 그가 권총을 잡는 순간, 그래버가 총을 뽑아 그를 쏘았다. 슈타인브레너는 비틀거리다가 쓰러졌다. 그는 아이처럼 한숨을 쉬었고, 그의 손에서 권총이 떨어져 나갔다. 그래버는 그의 몸뚱이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포탄이 정원 위로 울부짖으면서 통과했다.
그는 정신을 차리고 창고로 걸어갔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문을 활짝 열었다. “가라.” 그래버가 말했다.
러시아인들이 그를 쳐다보았다. 그의 말을 믿지 않았던 것이다. 그가 총을 던져 버렸다. “가, 어서 가란 말이야.” 그가 다급하게 말하면서 자신의 빈손을 보여 주었다.
젊은 러시아인이 조심스럽게 한 발자국 밖으로 내디뎠다. 그래버는 등을 돌려 슈타인브레너가 누워 있는 곳으로 되돌아갔다. “살인자.” 그는 그렇게 말했지만 누구를 향해 말하는 것인지는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슈타인브레너를 들여다보았지만 아무 느낌도 없었다. “살인자.” 그가 다시 한 번 말했다. 그것은 슈타인브레너와 자기 자신 그리고 다른 수많은 사람들을 향한 절규였다.
그러고 나자 갑자기 여러 생각들이 서로 충돌하기 시작했다. 그의 몸에서 돌멩이 하나가 굴러 나간 것 같았다. 무엇인가가 영원히 결정되고 말았던 것이다. 아무런 무게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무슨 일이든 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허공으로 날아가 버리지 않기 위해 무언가를 붙들어야 할 것 같았다. 머릿속이 휘청거렸다. 그는 가로수 길을 따라 조심스럽게 걸었다. 무엇인가 너무도 중대한 일을 단행해야 하지만 아직 할 수 없었다. 아직, 그것은 여전히 너무 멀리 있고 너무 새롭고 고통스러울 정도로 분명했다.
그는 러시아인들을 보았다. 그들은 허리를 구부리고 여자를 앞세운 채 한 덩어리가 되어 달아나고 있었다. 그들 중의 하나가 뒤를 돌아보며 그를 발견했다. 남자의 손에는 뜻밖에도 총이 들려 있었다. 남자는 총을 들어 겨누었다. 그래버는 총구의 검은 구멍을 보았다. 구멍은 점점 커졌다. 그는 큰 소리로 부르고 싶었다. 큰 소리로 급히 소리를 질러야 할 것들이 많았다.
그래버는 총격을 느끼지 못했다. 갑자기 눈앞에 풀이 보였다. 밟혀서 반쯤 짓이겨진, 불그레한 꽃망울과 이파리가 달린 식물이 바로 눈앞에 보였다. 그 풀은 점점 더 커졌다. 이전에도 이런 광경을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언제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풀은 흔들거렸고, 수그러지는 그의 머리와 점점 더 가까워지는 지평선을 배경으로 소리도 없이 홀로 서 있었다. 물론 작디작은 질서에서 오는 위안과 그 모든 평화도 함께했다. 풀이 점점 더 커져 마침내 하늘 전체를 가렸다. 그리고 그의 눈이 감겼다. (P533-5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