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립 로스의 <휴먼 스테인>

영화 <휴먼 스테인> 2003년

by 노용헌

필립 로스의 <휴먼 스테인>은 인생의 얼룩에 관한 소설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누구에게나 지워지지 않는 인생의 얼룩 하나쯤은 있을 수 있다. 그걸 다른 말로 하면 이 소설의 제목처럼 “오점(stain)”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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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한 스캔들이 미국을 뒤흔든다. 빌 클린턴 대통령과 모니카 르윈스키의 섹스 스캔들. 대통령의 거짓말과 진실, 그리고 이를 둘러싼 정쟁과 이전투구 앞에서 미국인들은 엄청난 충격과 혼란에 휩싸였다. 이 사건을 모티브로 삼은 <휴먼 스테인>은 이 시기의 미국 뉴잉글랜드 시골을 무대로 미국 사회에 만연한 인종적ㆍ계급적 차별, 체면과 도덕성 이면의 위선과 편견을 가차 없이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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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웃인 콜먼 실크가 일흔한 살 나이에 인근의 아테나 대학에서 청소부로 일하는 서른네 살 된 여자와 그렇고 그런 사이라고 내게 털어놓은 것은 1998년 여름의 일이었다. 이 년 전 은퇴하기 전까지 그는 아테나 대학에서 교수로 이십 년 넘게 고전을 가르치고, 십육 년 넘게 학장을 지낸 인물이었다. 콜먼의 애인이라는 여자는 일주일에 두 번 우체국 청소도 했는데, 우체국이라고는 하지만 1930년대 오클라호마 주를 휩쓴 모래 강풍에 농사를 망치고 떠돌이 신세가 된 농부 가족이 잠시 신세를 졌음직해 보이는 우중충한 빛깔의 비늘판벽 건물에 불과했다. 그 우체국은 이 산골 마을의 상업 중심가인 거리 두 개가 만나는 사거리에서 미국 국기를 휘날리며 주유소와 잡화점 맞은편에 홀로 쓸쓸히 서 있었다. (P11)


콜먼이 내게 포니아 팔리와 그들의 은밀한 관계에 대해 털어놓았던 그 여름은 시의적절하게도 빌 클린턴의 비밀스러운 사생활이 세상에 낱낱이 치욕적으로 폭로되었던 바로 그 여름이었다. 마지막 한 오라기까지 생생한 사실들, 수치심과 마찬가지로 그 생생함 또한 자극적인 구체적 정보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미스 아메리카로 뽑힌 지 얼마 안 되어 <팬트하우스> 과월호에 누드 사진들이, 그것도 우아하게 두 무릎을 꿇은 포즈나 등을 바닥에 대고 누운 포즈로 찍힌 사진들이 우연히 발견되는 바람에 망신을 당한 젊은 여성이 미스 아메리카 왕관을 포기하고 대신 엄청난 인기를 누리는 대중 스타의 길로 들어섰던 사건 이후 그 여름만큼 온 세간이 들끓은 적은 없었다. 1998년 여름. 뉴잉글랜드에는 열기와 햇볕이 강렬했고, 야구장에서는 흰 피부의 홈런왕과 갈색 피부의 홈런왕이 전설적인 경기를 펼쳤으며, 미국 전역은 경건함과 순수함을 주장하는 목소리로 야단법석이었다. 수컷의 욕구를 주체하지 못한 중년의 혈기 넘치는 대통령과 그에게 홀딱 빠진 뻔뻔한 스물한 살짜리 여직원이 십대들이 주차장에서나 할 만한 짓을 대통령 집무실에서 벌였다는 사실에 테러리즘 -공산주의를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한 국가 안보의 가장 큰 위협- 은 자신의 자리를 내줘야 했다. (P12-13)


1998년 여름 무렵, 콜먼은 이 산골에서 이 년 가까이 혼자 지내고 있었다. 아내 아이리스와 함께 네 아이를 기른 커다란 흰색 비늘판벽 집에서, 자신의 강의를 수강했던 학생 둘에게 인종차별 혐의로 고발당해 대학 당국과 공방을 벌이던 와중에 아내 아이리스가 뇌졸중을 일으켜 돌연 세상을 떠나버린 이후로 줄곧 그렇게 지내온 참이었다. (P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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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네 명의 학생이 수강하는 수업이었다. 콜먼은 처음 몇 강 동안은 학생들 이름을 익히고자 강의 시작 전에 출석을 불렀다. 그런데 학기가 시작된 지 오 주가 다 되도록 출석을 부를 때 대답이 없는 학생이 두 명 있었다. 육 주째에 콜먼은 이런 질문으로 강의를 시작했다. “이 두 학생에 대해 아는 사람 없나요? 이 학생들이 실제로 존재하기는 하나요, 아니면 유령(spooks)인가요?”

그날 늦게 자신의 후임자인 새 학장에게 연락을 받은 콜먼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종적이 묘연했던 두 학생이 공교롭게도 흑인이었는데, 비록 자리에 없었지만 결석한 자신들에 대해 교수가 공개적으로 물으며 사용한 표현을 곧바로 전해 듣고 콜먼을 인종차별 혐의로 대학 당국에 고발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이다. 콜먼은 신임 학장에게 말했다. “나는 두 학생이 유령 같은 존재인가라는 뜻으로 물었던 거요. 그건 뻔한 것 아니오? 두 학생은 그동안 단 한번도 강의에 출석하지 않았소. 그게 내가 두 학생에 대해 아는 전부라오. 난 spook란 단어를 통례적이고 본래적 의미인 유령 혹은 귀신이라는 뜻으로 썼던 거요. 두 학생의 피부색이 어떤지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었소. spook란 단어가 이따금 흑인에게 적용되는 불쾌한 말이라는 사실을 오십 년 전에는 알고 있었겠지만 완전히 잊고 있었지, 그렇지 않다면, 학생들이 민감하게 받아들일 수도 있는 말에 극도로 조심하는 내가 그 단어를 사용했을 리 없지 않겠소. 그 단어가 사용된 문맥을 한번 생각해보시오. 이 학생들이 실제로 존재하기는 하나요, 아니면 유령인가요? 인종차별을 했다는 고발은 비논리적이오. 터무니없는 이야기요. 내 동료 교수들도 그 주장이 터무니없다는 것을 알고,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도 그 주장이 터무니없다는 것을 알 거요. 여기서 문제는, 유일한 문제는 두 학생이 늘 결석했고, 변명의 여지 없이 노골적으로 학업을 등한시 했다는 점이오. 정말 불쾌한 건 그 고발이 단순한 무고가 아니라는 점이오. 그야말로 정말 가관인 무고이지요.” 그만하면 전반적으로 변론을 충분히 한 셈이었기 때문에 그 문제는 거기서 종결된 것으로 생각하고 콜먼은 귀가했다. (P19-20)


“게다가 그 여자는 서른넷이고요.”

“게다가 인화 물질이지. 쉽게 불붙는 여자란 말일세. 그 여자 때문에 섹스가 다시 죄악으로 변해버렸네.”

“무자비한 미녀가 당신을 노예로 삼았군요.”

“그런 것 같네. 난 말하지. ‘일흔한 살 먹은 사람하고 만나는 게 자네에겐 어떤 거지?’ 그러면 그 여자가 말해. ‘일흔한 살 먹은 사람이 어때서요. 이제 굳을 대로 굳어 변할 일이라곤 없어 좋은데.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잖아요. 놀랄 일도 없고.’”

“그 여자는 어쩌다 그렇게 현명해졌답니까?”

“놀랄 일을 많이 당해서겠지. 삼십사 년 동안 무자비할 정도로 놀랄 일만 당하다보니 그런 지혜가 생겼을 거야. 하지만 그건 편협하고 반사회적인 지혜에 지나지 않아. 야만적이기도 하고, 다른 사람한테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사람의 지혜지. 그게 그녀의 지혜고 긍지이기도 하지만, 소극적인 지혜인데다 방향을 잃지 않고 하루하루 살아가게 해주는 그런 지혜는 못 된다네. 이 여자는 거의 살아 있는 내내 자신을 짓밟으려 드는 삶과 대면해왔어. 이 여자가 터득한 건 전부 그런 삶에서 얻은 걸세.” (P50-51)


나는 고작 오 년을 혼자 지냈다. 매더마스카 산 속으로 몇 마일 올라간 데 있는 쾌적한 방 두 칸짜리 오두막에서 독서하고 집필하면서 보낸 오 년. 오두막 뒤쪽엔 작은 연못이 있고 앞쪽에는 비포장도로를 건너 관목숲을 지나면 10에이커 정도 되는 습지대가 있었다. 그 습지는 이동중인 캐나다 기러기들이 저녁마다 들러 하룻밤 쉬어 가거나 참을성이라면 누구에게도지지 않는 푸른해오라기 한 마리가 찾아와 여름 내내 고독하게 물고기 사냥을 하는 곳이었다. 고통을 최소화하며 세상의 번잡함 속에서 살아가는 비결은 가능한 한 많은 사람이 당신의 미망을 믿게 만드는 것이다. 마음을 동요케 만드는 복잡한 관계들, 유혹, 기대 같은 온갖 것으로부터 떠나, 특히 스스로 만든 긴장감에서 벗어나 이 산골에서 혼자 살아가는 요령은 고요함을 체계화하는 것, 산꼭대기에 충만한 고요함을 자본으로 여기는 것, 고요함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재산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나를 둘러싼 고요함을 내가 선택한 유리함의 근원으로, 나의 유일한 친한 친구로 여기는 것이다. 그 요령은 (다시 한번 호손의 신세를 지기로 하자) “고독한 마음이 자신과 나누는 소통” 속에서 생명을 이어갈 양식을 찾는 것이다. 생명을 이어갈 양식을 호손같이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재기가 뛰어났던 인물들의 지혜에서 찾는 것이다. (P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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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한번 들어봅시다.” 대학을 나왔다는 쥐뿔만도 못한 사회복지사들, 심리치료사들이 말한다. “베트남에서 사람을 죽여본 적이 있나요?” 베트남에서 그가 죽이지 않은 자가 있던가? 그를 베트남에 보낸 목적이 그거 아니었나? 빌어먹을, 낯짝 노란 인종을 죽이라고 말이다. 무슨 짓이든 다 하라고? 그래서 무슨 짓이든 다 했다. 그 모든 것은 “죽인다”는 말 한마디로 집약된다. 황인종을 죽여라! “사람을 죽여본 적이 있나요?”라는 질문도 불쾌하기 짝이 없는데, 그에게 재수 없는 중국놈같이 생긴 빌어먹을 황인종 심리치료사를 붙여준다. 그는 국가를 위해 봉사하다 이 꼴이 됐는데 빌어먹을, 영어를 제대로 하는 의사조차 만날 수 없다니, 노샘프턴 전역에는 중국 식당이, 베트남 식당이, 한인 상점이 널려 있다. 하지만 그의 것은? 베트남인이라면, 중국인이라면, 큰돈을 벌고, 식당을 소유하고, 상점을 소유하고, 식료품점을 소유하고, 가족을 거느리고, 훌륭한 교육도 받을 것이다. 하지만 그를 위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들은 그가 뒈져버리기를 바라니까. 그가 돌아오지 않았기를 바라니까. 그는 그들에게 최악의 악몽 같은 존재이다. 그는 돌아오지 말았어야 했다. 그리고 이 대학교수라는 자는 어떤가. 정부가 아주 간단하게 우리를 그곳으로 보냈을 때 이 작자가 어디에 있었는지 알지 않는가? 그 빌어먹을 시위대를 이끌며 거리에 나가 있었다. 정부는 그들에게 대학으로 돌아가 가르치라고, 애들을 가르치라고, 베트남전 반대 시위 따윈 하지 말라고 보수를 지급한다. 우리에겐 빌어먹을 기회조차 주지 않았으면서, 그들은 우리가 전쟁에서 진 거라고 말한다. 전쟁에서 진 것은 우리가 아니라 바로 정부인데, 하지만 멋쟁이 교수님들은 기분이 내키면 강의실에서 수업하는 대신 언제고 밖으로 나와 반전 구호가 적힌 피켓을 흔들어댄다. 그게 그가 나라를 위해 봉사한 대가로 받는 감사 인사다. (P115-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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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먼에게 힘과 즐거움은 그와 정반대의 것에서, 카운터펀치가 그의 특기이듯 자기 이야기를 일절 삼가는 것에서 얻는 것이었고, 콜먼은 누가 이야기해준 적도 없고 따로 생각해본 적도 없는데도 이미 그런 이치를 터득하고 있었다. 콜먼이 섀도복싱과 무거운 펀치백 훈련을 좋아했던 이유도 바로 그 안에 담긴 비밀 때문이었다. 육상을 좋아했던 것도 그래서였지만, 권투의 경우가 훨씬 좋았다. 어떤 친구들은 무거운 펀치백을 그저 죽어라 쳐대기만 했다. 콜먼은 달랐다. 콜먼은 생각을 했다. 학교 수업 시간에도 경주를 할 때도 생각을 했다. 다른 모든 것을 몰아내고 어떤 것도 개입하지 못하게 하고 그일, 그 과목, 그 시합, 그 시험에 깊이 빠져드는 것이다. 무언가를 숙달해야 할 때는 아예 그것이 되어버리면 된다. 콜먼은 생물학을 공부할 때도 그럴 수 있었고, 단거리경주를 할 때도 그럴 수 있었으며, 권투를 할 때도 그럴 수 있었다. 그리고 외적인 것뿐 아니라 내적인 것도 전혀 방해가 되지 않았다. 시합장에서 관객이 소리 높여 이런저런 주문을 외쳐댄다 해도 콜먼은 전혀 개의치 않을 수 있었고, 상대 선수가 자신의 절친한 친구라 해도 전혀 개의치 않을 수 있었다. 시합이 끝나고 나면 다시 친구로 돌아갈 시간은 충분하니까. 콜먼은 이런저런 감정, 공포든 불안이든, 심지어 우정까지도 무조건 무시하도록 스스로를 강제했다. 그런 감정이 들어도 자신과 분리시켰다. 예를 들면, 섀도복싱을 할 때도 콜먼은 그저 몸을 푸는 데서 그치지 않았다. 상대 선수를 상상하며 머릿속에서 상상의 상대와 남몰래 일전을 치렀다. 그리고 링에서 실제로 상대 선수가 땀과 콧물 범벅인 채 악취를 풍기며 주먹을 휘두를 때도 상대 선수는 콜먼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링 위에는 문제의 답을 물어볼 선생이 없다. 링 위에서 터득한 모든 답은 혼자서 간직하는 법이고, 비밀을 드러낼 순간이 오면 입을 제외한 다른 모든 것을 통해 드러내야 한다. (P162-163)


작은 그들이 우리라는 이름 아래 자신들의 규범을 강요하게 둘 수 없듯 거대한 그들이 자신들의 편견을 강요하게 둘 수는 없다. 우리와 우리라는 담화가 자행하는 폭압을, 그 우리가 내 머리 위로 쌓아올리고자 하는 모든 것을 그냥 보고만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그를 삼켜버리지 못해 안달이 난 우리의 폭압, ‘여럿이 모여 하나’라는 음흉한 의식과 더불어 강압적이고 모든 것을 아우르고 역사적이고 피할 수 없는 도덕률인 우리를 그는 절대적으로 거부한다. 울워스의 그들이든 하워드의 우리든 마찬가지다. 그 대신 아주 명민한 있는 그대로의 나가 있다. 자아의 발견, 그것이야말로 라본즈에 정통으로 꽂히는 펀치였다. 독자성, 독자성을 지키기 위한 열정적 투쟁, 유일무이한 동물. 그 무엇과 관계를 맺든 계속 변화하는 것. 고정되지 않고 변화하는 것. 자신에 대해 인식은 하지만 숨기는 것. 그만큼 강력한 게 또 있을까? (P175)


그는 쓸데없는 똑같은 생각에 계속 매달렸다. 소포클레스에게는 그렇지 않았겠지만 자신같이 위대한 재능을 갖지 못한 인간에게는 전혀 무용지물인 생각에, 운명이란 얼마나 우연의 산물인가....... 혹은 그 운명을 피할 수 없을 때 그것은 얼마나 우연처럼 보이는가. (P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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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먼이 흑인 가정에서 태어나 성장했으며 거의 전 생애를 흑인으로 살아왔다는 것을 안다 해도 아이리스는 단 오 분도 혼란스러워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그 비밀을 지켜달라고 요구했다면 그걸 지키는 데 추호도 고민하지 않고 그렇게 했을 것이다. 아이리스 기틀먼은 유별난 것을 포용하는 능력만은 부족함이 없었다. 합리적 기준에 가장 장 부합하는 것이 그녀에게는 오히려 유별난 것이었으니까. 한 남자 대신 두 남자가 되는 것? 한 가지 피부색 대신 두 가지 피부색을 갖는 것? 정체를 숨기거나 위장한 채 거리를 돌아다니고, 이쪽도 저쪽도 아닌 그 중간에 해당하는 존재가 되는 것? 이중 혹은 삼중 혹은 사중 인격을 갖는 것? 그와 같은 표면적인 기형은 아이리스에게 전혀 기겁할 거리가 되지 못했다. 아이리스의 편견 없는 태도는 자유주의자나 자유의지론자니 하는 사람들이 자랑스럽게 여기는 도덕적 자질도 아니었다. 그것은 조증(躁症)에 더 가까웠고, 편협함의 균열된 안티테제에 더 가까운 것이었다. 의미라는 전제, 권위에 대한 신뢰, 통일성과 질서에 대한 신성화처럼 대다수 사람이 필수 부가결하다고 여기는 것들이 그녀에게는 살아오는 동안 터무니없는 헛소리이고 미친 짓 같았던 것이다. 정상적 상태라고 불리는 것이 존재에 처음부터 내재되어 있다면, 왜 우리가 보는 것 같은 일들이 벌어지고, 역사는 왜 그 모양이란 말인가? (P208)


이스트오렌지에서 그리니치빌리지로 돌아온 그날 밤, 콜먼은 애스베리파크의 형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그 전화는 콜먼이 계획했던 것보다 상황을 한층 더 빠르게 진전시켰다. “다시는 어머니 근처에 얼씬 거리지 마라.” 월터가 경고했다. 형의 목소리에서 뭔가를 겨우 억누르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억누르고 있다는 사실로 인해 훨씬 더 겁을 먹게 만드는 목소리.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로는 들어본 적 없는 목소리였다. 콜먼을 반대편으로 완전히 밀어내는 새로운 힘이 이제 그의 가족 안에서 생겨났다. 그리니치빌리지라는 특정 공간에 사는, 뻔뻔스러운 젊은이라는 특정 인물에 의해, 1953년이라는 특정 시점에 저질러진 그 짓 때문에 이제 그는 영영 반대편에 서 있게 되었다. 그렇지만 그가 알아낸 것처럼, 그것이 바로 핵심이다. 자유란 위태로운 것이다. 자유는 대단히 위험한 것이다. 그리고 어떤 것도 내가 바라는 조건으로 오래 지속되는 법은 없다. “어머니를 만나겠다는 생각조차 품지 마, 연락도 하지 마. 전화도 하지 마. 아무 짓도 하지 말라고, 절대. 무슨 소린지 알겠지?” 월터가 말했다. “절대. 감히 어머니 집 근처에 네 백합처럼 새하얀 낯바닥을 들이밀 생각은 두 번 다시 품지도 말란 말이다!” (P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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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자, 아무한테나 다 주절거렸지. 그 여자도 얼빠진 요즘 문화의 일부야. 주절, 주절, 주절, 천박함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이 세대의 일부인 거지. 진정성 연기 하나면 다 먹히잖아. 진정성은 있되 텅 빈, 완전히 텅 빈 세대. 진정성을 사방에 퍼뜨리지. 거짓보다 더 나쁜 게 진정성이고, 타락보다 더 나쁜 게 순진무구야. 온갖 탐욕이 그 진정성 밑에 감춰져 있어. 그리고 그들이 나불대는 말 속에도. 자신들의 ‘자부심 결여’에 대해 그럴듯한 이야기를 잔뜩 늘어놓지만 -게다가 그 말을 믿는 것처럼 보인다니까- 사실은 자기들이 뭐든 누릴 권리가 있다고 믿는단 말이지. 그들은 자신들의 뻔뻔함을 애정이라고 떠들어대고, 무자비함을 ‘자존감’ 상실이라고 위장해. 히틀러도 자존감이 결핍되긴 했지. 그게 그 인간의 문제점이었어. 조무래기들이 뭔가를 해보겠다고 나서는 것 자체가 완전히 사기야. 아주 하찮은 감정의 초과대 포장이지. 관계, 나의 관계, 나의 관계를 명확하게 하자. 그놈들이 입만 열면 내가 돌 것 같다니까. 그놈들이 하는 말은 지난 사십 년 동안 벌어진 어리석은 일들의 총합이야. 정리. 딱 들어맞는 예가 하나 있네.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은 도대체 생각을 해야 하는 자리에는 진득하게 앉아 있질 못해. 정리! 그놈들은 아무리 모호하고, 아무리 해결이 곤란하고 불가사의한 것이라고 해도 모든 경험을 서론, 본론, 결론이라는 서술 틀에 박아넣어야 직성이 풀려. 표준화하고 양식화하고 뉴스 앵커 방식으로 식상하게 만들어놓아야 직성이 풀린다고. 어떤 놈이든 ‘정리’ 운운하면 난 낙제시켜버려. 정리를 원하니 내가 확실히 정리해주는 거지.” (P234)


적절함이 휘두르는 횡포. 1998년도 절반 넘게 지난 지금, 미국적 적절함의 위력이 영속되리라고는 콜먼 역시 믿기 어려웠고, 그 자신도 그 횡포의 피해자라고 생각했다. 대중의 언사에 굴레를 씌우고, 개인의 가식을 부추기고, 곳곳에서 반-남성화를 지속시키는 적절함의 횡포, 이를 미덕으로 포장하여 설교단에서 장사치처럼 퍼뜨리는 것을 H.L. 멩켄은 유방숭배주의라고 불렀고, 필립 와일리는 마미즘을 생각해냈으며, 유럽인은 자신들의 역사를 외면한 채 미국적 청교도주의라고 불렀고, 로널드 레이건 부류들은 미국의 핵심 가치라고 주장했다. 뭐라고 부르건 적절성은 다른 것으로 -온갖 다른 것으로- 가장한 채 광범위한 권한을 행사했다. 하나의 세력으로서 이 변화무쌍한 적절함은 천 개의 가면을 쓴 여성지배자였다. 필요하다면 시민의 책무로, 와스프의 품위로, 여성의 권리로, 흑인의 자긍심으로, 민족의 의무로, 혹은 감정이 실린 유태인의 윤리적 감수성으로 가장하여 곳곳으로 침투했다. (P243-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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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까마귀도 이상한 행동을 한다. 다른 모든 짐승과 마찬가지로, 나는 까마귀가 나무 위에 모여 떠들어대며 뭔가 일을 꾸미는 것을 본 적이 있다. 하지만 그게 뭔지 알 길은 없다. 뭔가 대단한 계획이 있는 게 분명하다. 하지만 까마귀 스스로도 그 계획이 뭔지 알고 있을까. 모르겠다.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무의미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럴 리 없다고, 지상에서 인간들이 세우는 빌어먹을 계획 따위보다 젠장, 백만 배는 더 의미 있을 거라고 장담한다. 그렇지 않다면? 뭔가 특별한 것 같지만 실제로는 아무것도 아닌 수많은 것과 마찬가지라면? 어쩌면 그냥 유전적인 특성일지도, 아니면 말고. 까마귀가 이 세상을 관장한다면 어떨까. 쓰레기 같은 세상의 재탕밖에 안 될까? 무엇보다 까마귀는 실용적인 동물이다. 비행 방법도, 대화법도, 심지어 색깔도, 온통 검은색, 오로지 검은색. 어쩌면 나는 까마귀였을 수도 있고, 아니었을 수도 있다. 이따금 나는 이미 내가까마귀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래, 몇 달째 간간이 그런 생각을 해왔다. 안 될 게 뭐 있지? 여자 몸에 갇혀 사는 남자도 있고, 남자 몸에 갇혀 사는 여자도 있는데, 내가 이 몸속에 갇힌 까마귀가 되지 못할 거 없잖아? 그래, 이 몸에서 나를 꺼내줄 수 있는 의사가 어디 있을까? 어디를 가야 내가 나일 수 있는 수술을 받을 수 있을까? 누구한테 의논해야 하지? 어디로 가서 어떻게 해야 내가 빠져나올 빌어먹을 방법을 찾을 수 있을까?

나는 까마귀다. 난 안다. 안다고! (P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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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우리는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은가? 모두가 알고 있다니...... 어떤 일이 어떻게 해서 그런 식으로 일어나는지를 안다고? 인간사를 규정하는 사건들. 불확실성들, 사고들, 불화, 충격적인 부조리의 연속인 난맥상 아래에 무엇이 있는지도? 아무도 알 수 없는 거요. 루 교수. “모두가 알고 있다”라는 말은 상투어를 이용한 호소인데, 경험을 진부하게 만들어버리는 출발점이다. 무엇보다 못 견디게 싫은 것은, 상투어를 내뱉는 자들의 위선적인 진중함과 권위의식이다. 우리가 유일하게 아는 것은, 상투적이지 않은 의미에서, 우리 모두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아무것도 알 수 없다. 아는 것도 실은 알지 못한다. 의도? 동기? 결과? 의미? 모르는 건 전부 놀랍게 느껴진다. 하지만 더 놀라운 건 우리가 안다고 믿는 것들이다. (P17)


콜먼에게 비밀이 있다. 가장 확실하고 믿을 수 있는 감정선들만으로 형성된 이 남자, 하나의 권력으로서 파란만장한 내력을 지닌 이 유력자, 우아하게 교활하고 서글서글한 매력이 있고, 겉보기에는 대장부의 완전체 같은 사람이지만 그럼에도 그에게는 엄청난 비밀이 하나 있다. 나는 어쩌다 이런 결론에 이른 것일까? 왜 비밀이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콜먼이 포니아와 함께 있을 때 뭔가 숨기는 게 있으니까. 그리고 그녀와 함께 있지 않을 때도 그는 뭔가 숨기는 것이 있다. 그가 지닌 비밀이 바로 그의 매력이다. 결여된 무언가가 사람을 현혹하고, 그동안 내내 나를 끌어당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다른 누구도 아닌 그 자신만의 비밀로 지니고 있는 수수께끼 같은 무언가가. 그는 절반의 모습만 보여주는 달처럼 자신을 연출한다. 내게는 그의 모습을 완전히 보이게 할 재간이 없다. 공백이 존재한다. 그게 내가 말할 수 있는 전부다. 두 사람이 결합하면 공백 한 쌍이 된다. (P23)


“.......프린스는 까마귀 소리를 제대로 못 내요. 까마귀 말을 몰라요. 야생 까마귀들은 프린스를 좋아하지 않아요. 결국 프린스가 저한테 내려왔는데, 제가 밖에 있었거든요. 안 그랬으면 개들이 프린스를 죽였을지도 몰라요.”

“사람 손에서 자라서 그래요.” 포니아가 말했다. “평생 우리 같은 사람들 근처를 맴돌아서 그래요. 인간의 때가 묻은 거예요.” 혐오나 경멸이나 비난의 기색 없이 그녀는 말했다. 슬픈 기색조차 없이, 그런 것이다 - 특유의 무미건조한 어투로 포니아는, 뱀에게 먹이를 주고 있는 여자아이에게 그렇게만 이야기했다. 우리는 오점을 남긴다. 우리는 자취를 남기고, 우리 자신의 흔적을 남긴다. 불순함, 잔인함, 학대, 실수, 배설물, 정액 - 달리 이 세상에 존재할 방법이 없다. 불복종과는 상관없다. 은총이나 구원 혹은 속죄와도 상관없다. 그것은 모든 사람의 내면에 존재한다. 내재되어 있다. 타고난 것이다. 규정지어진 것이다. 밖으로 드러나기 전에 이미 오점은 존재한다. 아무런 신호도 없이 이미 존재한다. 오점은 표지(標識)가 필요치 않을 정도로 본질적이다. 오점은 불복종보다 선행하고, 불복종을 포함하여, 모든 설명과 이해를 혼란스럽게 만든다. 그것이 바로 모든 것을 깨끗하게 한다는 것이 농담에 지나지 않는 이유이다. (P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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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향군인들은 길바닥에서 자는데 병역을 기피한 놈들은 백악관에서 자다니,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국군통수권자 뺀질이 윌리, 순 개자식 같으니. 재향군인보훈국 예산은 줄줄 새고 있는데 유태인 계집의 푸짐한 젖이나 주물럭거리고, 섹스에 대해서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웃기고 있네. 빌어먹을 정부는 입만 열면 죄다 거짓말인데, 그래. 미합중국 정부는 베터런스데이로 더 조롱하지 않아도 이미 이 레스터 팔리를 조롱할 만큼 조롱했다. (P78)


실크 학장이 아테나 대학 청소부 한 명과 함께 자동차 사고로 사망했다는 놀라운 소식이 대학 내 전 강의실에 퍼졌을 무렵, 실크 학장이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기 몇 시간 전에 델핀 루 교수의 연구실을 약탈하고 거짓 이메일을 전송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이 모든 소문을 믿기 힘들어했는데, 사고 정황에 대한 또 다른 이야기가 마을사람들을 거쳐 대학 내에까지 퍼지자 거의 모든 사람이 한층 더 당혹스러워했다. (P134)


내가 말하는 진실은 그의 죽음에 관한 진실이다. 잠시 뒤 내가 알게 된 그 진실을 말하는 게 아니다. 진실 뒤에는 또다른 진실이 있게 마련이다. 이 세상엔 자신이나 자기 이웃들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다고 믿는 사람들로 가득하지만, 사실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것이 한없이 많다. 우리에 대한 진실에는 끝이 없다. 거짓도 마찬가지다. 둘 사이에 꼼짝없이 끼어 있는 거지, 나는 생각했다. 고매한 놈들한테 비난받고, 정의로운 놈들한테 욕먹은 다음, 흉악한 미치광이에게 몰살당하는 것, 구원받은 자들, 선택된 자들, 한 시대가 지나면 사라질 도덕관을 맹신하는 자들로부터 파문당한 다음 무자비한 악귀에게 목숨을 잃는 것. 인간의 절박함 두 가지가 그에게서 접합점을 찾아냈다. 결백한 자들과 그렇지 못한 자들 모두가 전력을 다해 움직인다. 적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는 둘이 닮았다. 이중으로 당하는 거지, 나는 생각했다. 이 세상의 적대적인 이빨에 이중으로 당하는 것이다. 바로 세상 자체인 적대감에 의해. (P180-181)


“.......‘하지만 오빠, 마크는 그런 이유에서 오빠를 미워하는 게 아닐지도 모르잖아.’ 그랬더니 오빠가 이랬어요. ‘내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는구나. 흑인이라는 사실 때문에 그애가 날 미워하는 거라는 이야기가 아니야. 진짜 이유라는 말은 그런 뜻이 아니야. 그애한테 알 권리가 있는데 내가 말해주지 않기 때문에 날 미워하는 거라는 거야.’라고요. 우리는 그 이야기를 그쯤에서 중단했어요. 오해의 소지가 너무 많으니까요. 하지만 오빠가 자신과 자식들 사이의 근저에 거짓말이, 그것도 끔찍한 거짓말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을 수 없었다는 건 분명했어요. 그리고 마크가 그 거짓말을 직관적으로 알아냈다는 사실도, 유전자에 마크의 정체성을 담고 있고 그 정체성을 다시 자기 자식들에게 최소한 유전자 상으로, 어쩌면 신체적으로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까지 물려줄 마크의 자식들이 자신이 누구인지도 누구였는지도 온전하게 알 수 없을 거라는 걸 마크가 어째서인지 알고 있다는 사실도 오빠는 한시도 잊을 수 없었을 거예요. 이건 어느 정도 추측에 가까운 것이지만 저는 이따금, 콜먼 오빠가 마크를 오빠 자신이 엄마한테 저지른 짓에 대한 벌로 여기는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어니스틴은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P188-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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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까지 뉴저지에서 흑백 분리, 차별 교육제도가 법적으로, 헌법상으로 인정되었다는 건 모르실지도 모르겠네요. 대부분의 지역에 유색인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랑 백인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가 따로 있었어요. 뉴저지 남부에선 초등교육에 인종분리가 분명하게 존재했어요. 트렌턴, 뉴브런즈윅 아래로는 모든 학교가 인종을 분리해서 가르쳤어요. 프린스턴에서도, 애스베리파크에서도요. 월터 오빠가 애스베리파크에 처음 부임했을 때 그곳에는 동서로 나뉜 뱅스애비뉴라는 학교가 있었어요. 한쪽은 뱅스애비뉴 인근에 사는 유색인 아이들이 다니고, 다른 쪽은 인근의 백인 아이들이 다녔죠. 학교 건물은 하나인데, 둘로 나뉘어 있었던 거예요. 가운데 울타리가 처져 있어서 한쪽으로는 유색인 아이들만, 다른 쪽으로는 백인 아이들만 다녔어요. 교사도 마찬가지로 한쪽은 백인이고 다른 쪽은 유색인이었어요. 교장은 백인이었죠. 트렌턴하고 프린스턴에는, 프린스턴은 이제 뉴저지 남부라고 여겨지지 않죠. 어쨌든 그 두 도시엔 1948년까지 그런 흑백 분리 학교가 있었어요. 이스트오렌지나 뉴어크는 그렇지 않았죠. 그래도 한때는 뉴어크에도 유색인 아이들만 다니는 초등학교가 있었어요. (P191)


“이제 선생님은 내 비밀 장소를 알게 됐네요. 이것까지, 선생님은 모든 걸 알고 있어요.” 그가 말했다. “하지만 아무한테도 말 안 할 거죠. 그렇죠? 비밀 장소를 갖고 있다는 건 멋진 일이잖아요. 절대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세요. 어떤 일에건 입을 다무는 걸 배워보세요.”

“난 남의 비밀을 떠들고 다니는 사람이 아니오.” 나는 말했다.

“저 산에서 여기로 개울이 흘러드는데, 바위들 위로 흘러요. 내가 말했었나요?” 그가 말했다. “난 한 번도 그 개울의 발원지를 되짚어 올라 가본 적이 없어요. 저기서 호수 이쪽까지 끊기지 않고 죽 흘러 들어와요. 그리고 호수 남쪽 가장자리에 방수로가 있는데, 거기로 물이 흘러 나가요.” 그가 손을 들어 가리켰다. 얼음 드릴을 여전히 쥔 채, 손끝이 뚫린 장갑을 낀 커다란 손으로 그걸 꽉 틀어쥐고 있었다.“ 호수 밑에는 물이 솟아나는 곳이 수없이 많아요. 밑에서부터 솟아올라오니까 물이 끊임없이 뒤집혀요. 자체 정화를 하는 거죠. 물고기도 살아남아 크고 건강하게 자라려면 깨끗한 물이 있어야 하죠. 이 호수는 그런 요소를 전부 갖추고 있어요. 다 신의 작품이에요. 인간은 한 게 아무것도 없어요. 그래서 여기가 깨끗한 거예요. 그래서 내가 여기로 낚시를 오는 거고요. 인간의 손길이 미친 거면 일단 피하고 본다. 그게 내 철칙이거든요. 잠재의식 속에 PTSD가 가득한 남자의 철칙. 인간한테서 떨어져 신에게 가까이 다가갈 것. 그러니까 내 비밀 장소에 대해 비밀을 지켜야 한다는 거 잊지 마세요. 비밀이 새어나가는 유일한 경우는 말입니다. 주커먼 선생, 선생이 그 비밀에 대해 입을 열었을 때인 거요.”

“알아들었소.” (P247-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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