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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용헌 May 04. 2024

마크 트웨인의 <왕자와 거지>

영화 <더 프린스 앤 더 포퍼>  2007년

<왕자와 거지>(1937), <왕자와 거지>(1977), <더 프린스 앤 더 포퍼>(1962)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는 조선판 <영화와 거지>이다.   

  

왕자의 삶을 꿈꾸며 왕자에 대한 책을 읽는 사이에, 톰은 어느덧 진짜 왕자처럼 생각하고 행동하기 시작했다. 톰의 말투와 행동은 신기하게도 절도가 있고 위엄을 갖추어, 친구들을 즐겁게 하는 동시에 넋을 놓고 감탄하게 만들었다. 친구들 사이에서 톰의 영향력은 하루하루 커지고, 마침내 월등한 존재로서 경외의 대상으로 존경을 받기에 이르렀다.      (P18)     


이 건물에는 이 무시무시한 사람들과 출신은 다르지만 그들과 함께 살고 있는 마음씨 착한 늙은 신부(神父) 한 사람이 있었다. 이 신부는 왕에게 밉보여 몇 푼 되지 않는 연금을 받고 교회에서 쫓겨난 사람이었는데, 조무래기들을 곁으로 불러 모아 인생을 바르게 사는 길을 남몰래 가르쳐 주곤 했다. 또 앤드루 신부는 톰에게 라틴어를 조금 가르쳤고, 글을 읽고 쓰는 법도 가르쳐 주었다. 신부는 여자아이들한테도 똑같이 가르펴 줄 사람이었지만, 여자아이들은 친구들한테서 조롱거리가 될까 두려워 배우려고 하지 않았다. 이 무렵 친구들은 글을 읽고 쓰는 그런 요상한 재주를 가진 여자아이들을 곱게 보아줄 수 없었을 것이다.           (P20)  

   

"아, 제발 이제 그만해라, 참으로 멋지구나! 한 번, 단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 네가 입고 있는 것 같은 옷을 입고, 내 신발을 훌훌 벗어 던지고, 잔소리하거나 말리는 사람이 없는 곳에서 마음껏 진흙탕 속을 뒹굴 수만 있다면 왕관이라도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드는구나!“

“왕자님, 저는 단 한 번만이라도 왕자님이 입고 계신 옷 같은 것을 입어 봤으면 소원이 없겠나이다..... 단 한 번만이라도.....”

“오호, 그러고 싶으냐? 그럼 그렇게 하자꾸나! 네 누더기 옷을 벗고 이 번쩍거리는 옷을 입어라! 잠깐 동안 맛보는 행복이지만 그래도 적잖이 짜릿할 거야. 누가 와서 방해하기 전에 어서 바꿔 입었다가 다시 갈아입자꾸나.”               (P40)     


“오펄코트라고 했지? ..... 그랬어. 기운이 다 빠져 쓰러지기 전에 그곳에 찾아가면 그땐 살아나는 거야..... 그의 식구들이 나를 왕궁으로 데려가서 바로 진짜 왕자임을 증명해 줄 테니까. 그렇게 되면 나는 다시 왕자로 되돌아가는 거지.”  

그러다가 ‘그리스도 병원’의 난폭한 아이들한테 당한 기억이 불쑥불쑥 되살아나면 왕자는 이렇게 혼자서 다짐을 했다.

“내가 왕이 되면 그 아이들한테 먹을 것과 잠자리만 마련해 주는 게 아니라, 책으로 가르침도 받게 해 줘야겠어. 정신과 마음이 굶주려 있으면, 아무리 배가 불러도 별로 도움이 되지 않거든. 오늘의 교훈을 절대 잊어버리지 말자. 내가 그걸 잊어버리면 백성이 고통을 당하는 거야. 배움은 마음을 부드럽게 하며 온유하고 자비로운 마음을 낳거든.”

불빛이 가물거리기 시작했다. 비가 내리기 시작하고 바람이 일더니 스산하게 광풍이 부는 밤이 찾아왔다. 집이 없는 왕자, 앞으로 영국 왕의 자리를 물려받을 몸인데도 집 없이 떠돌게 된 왕자는 계속하여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면서 가난과 비참이 벌집처럼 떼를 지어 달라붙어 있는 미로처럼 누추한 골목길로 점점 깊숙이 흘러 들어갔다.                 (P48-49)    

 

“어디 자네 이야기를 계속 들어봄세....... 이 방에는 나 말고는 아무도 없으니까. 도대체 뭐가 미심쩍다는 말인가?”

“이런 말을 하기가 몹시 싫다네. 왕자님은 자네의 가장 가까운 핏줄이 아닌가. 하지만 만약 내가 하는 말이 심하더라도 제발 나쁘게 생각하지는 말게나. 사람이 미쳤다고 해서 그렇게 행동과 태도가 달라지다니 이상하게 보이지 않는가! 행동이나 말투는 여전히 왕자님이라고 볼 수 있는데, 별로 대수롭지 않아도 한두 가지 사소한 점에선 예전과는 ‘다르다’는 말일세. 사람이 미쳤다고 해서 자기 아버지의 생김새며, 왕자로서의 당당함과 체통을 그렇게 깡그리 잊어버리다니 이상하게 보이지 않는가? 또 라틴어는 고스란히 남아 있고 그리스어와 프랑스어만 기억에서 사라질 수가 있는 걸까? 여보게, 너무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는 말게. 오히려 고맙다고 할 테니 내 불안한 마음을 덜어 주게나. 난 자기가 왕자가 아니라고 한 그 말이 마음에 걸린다네. 그래서......”

“그만두게. 자넨 지금 엄청난 반역죄를 발설하고 있는 거야! 어명을 벌써 잊었는가? 나도 자네 말을 듣는 것만으로도 공범이 된다는 사실을 똑똑히 기억해 두게.”            (P78-79)     


두 사람은 인파를 헤치며 런던 다리로 들어섰다. 육백 년동안 한자리를 지킨 이 구조물은 늘 사람과 소음으로 법석이었으며, 위층은 살림집, 아래층은 상점식으로 지어진 집들이 이쪽 강변에서 저쪽 강변까지 조밀하게 들어선 기이한 장소였다. 다리 자체가 하나의 작은 도시와 같아서, 그 안에 여관, 맥주집, 빵집, 잡화점, 식료품 시장, 공방, 심지어 교회까지 들어서 있었다. 다리 양 끝으로 서더크와 런던이 잇닿아 있는데, 오히려 다리가 중심지이고 이웃 도시들이 별 볼일 업슨 변두리 같았다.          (P87)     

우리는 존 캔티가 진짜 왕자를 오펄코트로 질질 끌고 가고 동네 사람들이 재미있다는 듯이 시끌벅적 떠들면서 그 뒤를 따라가는 장면에서 끝을 냈더랬다. 군중 가운데에는 그에게 아이를 풀어 주라고 간절히 요청하는 사람이 오직 한 명 있었지만 그의 말에 아무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사실 사람들이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 때문에 그의 말이 전혀 들리지 않았다. 왕자는 캔티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오려고 계속 안간힘을 썼고, 자신이 지금 받고 있는 부당한 대우에 대해 버럭 화를 냈다. 그러자 마침내 존 캔티는 그나마 남아 있던 쥐꼬리만 한 자제력을 잃고 갑자기 화를 내며 왕자의 머리 위로 참나무 몽둥이를 번쩍 들어올렸다. 그러자 아이를 풀어주라고 혼자서 호소하던 사람이 갑자기 튀어나와 사내의 팔을 가로막는 바람에 몽둥이가 그만 그의 손목 위로 떨어지고 말았다. 그러자 존 캔티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P102)  

   

“그때 저 애 표정을 보았더라면, 진작 그런 생각을 했을 텐데. 저 아이가 어렸을 때 얼굴에 폭약이 터진 일이 있었지. 그때 이후로 꿈을 꾸거나 생각에 잠겨 있다가 깜짝 놀라 깨어나는 법이 단 한 번도 없었어. 놀랄 때 하는 몸짓이란 그날 그런 것처럼 기껏 두 손으로 두 눈을 가리는 것뿐이야. 그런데 남들처럼 손바닥으로 눈을 가리는 게 아니라, 손등으로 가린단 말이야..... 수백 번 봐 왔지만 그러지 않은 적이 한 번도 없었거든. 그래, 맞아. 그걸 보면 이제 그 아이가 진짜 내 아들인지 아닌지 확인할 수 있을 거야!”   

그래서 캔티 부인은 촛불을 손으로 가리고 잠든 아이의 옆으로 살며시 기어갔다.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흥분을 가라앉히며 조심스럽게 아이 쪽으로 몸을 기울이고는 갑자기 촛불로 아이의 얼굴을 환히 비추고 아이의 귀 바로 아래쪽 바닥을 손가락 마디로 쿵쿵 두드렸다. 잠자던 소년이 눈을 번쩍 뜨더니 놀란 표정을 지으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별다른 손짓을 하지 않았다. 

불쌍한 부인은 놀라움과 슬픔으로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러나 감정을 감추려고 애쓰면서 아이를 다독거려 다시 재웠다. 그러고 나서 잠자리로 다시 돌아와 그런 실망스러운 결과를 놓고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톰의 오랜 버릇이 없어진 것은 지금 머리가 정상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믿으려 해 보았지만 그렇게 믿을 수가 없었다. 

“아니, 이럴 순 없어. 그 아이의 손까지 미쳐 버릴 순 없지. 그렇게 오래된 습관을 그토록 짧은 시간 안에 잊어버릴 순 없는 노릇이야. 아, 오늘은 참으로 견디기 힘든 날이로구나!” 그녀가 말했다. 

그러나 아까 의구심이 사라지지 않았던 것처럼 희망도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캔티 부인은 이 실험의 결과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P110-111)   

  

높은 의자에 앉아 있던 톰은 이 ‘야단스러운’ 춤을 바라보면서 아래쪽에서 화려한 차림새의 인물들이 어지럽게 뒤엉키며 엮어 내는 휘황찬란한 색깔에 그만 넋을 잃고 있었다. 바로 그 순간, 누더기 옷을 걸친 진짜 어린 왕세자가 시비를 가리겠노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사기꾼 가짜 왕자를 비난하면서 시청으로 들여보내 달라고 외쳐 대고 있는 것이 아닌가! 군중들은 거지의 이 엉뚱한 행동을 무척 재미있어하면서 난폭하게 구는 사내아이의 모습을 쳐다보려고 앞으로 밀고 나와 목을 길게 뺐다. 그러고 나서 거지 소년을 놀리고 조롱하기 시작하여 일부러 약을 올려 그 아이가 좀 더 화내는 것을 보며 즐거워했다. 왕자는 너무 분하여 눈물이 나왔지만 물러서지 않고 난폭한 군중들에게 왕자답게 의연히 맞섰다. 그러나 짓궂은 사람들이 계속하여 약을 올리고 빈정거리자 마침내 버럭 고함을 질렀다.              (P122-123)   

  

“명예를 걸고 내가 묻는 말에 솔직히 대답해 주시오! 만약 내가 이 자리에서 오직 왕만이 특권으로 내릴 수 있는 명령을 내린다면, 어느 누구도 거부하지 않고 모두 그 명령에 따를까요?” 

“폐하, 여부가 있겠습니까? 이 나라에 살고 있는 온 백성이 그 명령에 따를 것이옵니다. 폐하께서는 이제 이 나라의 주인이시옵니다. 폐하는 이제 왕이십니다.... 폐하의 말씀은 곧 법이옵니다.”

그러자 톰은 강하고도 엄숙한 목소리로 힘차게 말했다. 

“그렇다면 오늘부터 왕의 법은 자비의 법이 될 것이오! 이제 무자비한 피의 법은 사라질 것이오! 그대는 어서 일어나서 달려가시오! 런던탑으로 가서 왕명으로 노퍽 공작을 사형하지 않겠노라고 전하시오!”

이 말은 연회장 안에 있는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순식간에 그곳 사람들에게 두루 퍼졌다. 하트퍼드 백작이 서둘러 자리를 뜨자 또다시 엄청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이제 피의 통치는 끝났도다! 영국 왕 에드워드 만세!”                  (P127)     


“일어나라. 얘야, 넌 누구냐? 무슨 일로 왔느냐?”

소년은 일어서서 정중하면서도 편안한 자세로 서 있었지만 얼굴에는 불안한 빛이 역력했다. 그 아이가 톰에게 말을 건넸다. 

“저를 모르실리 없을 텐데요. 폐하, 폐하를 대신해 매를 맞는 아이이옵니다.”

“나를 대신해 ‘매를 맞는’ 아이라고?”

“네, 그러하옵니다. 폐하, 소인은 험프리..... 험프리 말로라고 합니다.”

톰은 보호자들이 자기에게 먼저 알려 주었어야 했지만 알려 주지 않은 누군가가 나타난 것을 알아차렸다. 그러나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는 난처한 입장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이 아이에게 아는 척을 할 수도 있겠지만, 그랬다가 자기 입에서 나오는 한 마디 한 마디 때문에 그 아이를 전에 한 번도 본적이 없다는 사실이 탄로 날 것이 뻔했다. 아니, 그 방법은 통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때 톰한테 다행스럽게도 이런 생각 하나가 떠올랐다. 하트퍼드와 세인트는 존이 유언 집행인이니 급한 일로 자주 자기 옆에 붙어 있을 수 없을 테니 이런 일은 앞으로도 자주 겪게 될 것만 같았다. 그러니까 이제부터는 혼자 힘으로 이 어려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 좋을 듯했다. 그렇지, 그렇게 하는 것이 좋은 방법일 거야. 이 아이를 속여 얼마나 성공할 수 있을는지 한번 알아보기로 하자. 그래서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잠깐 동안 이마를 어루만지고는 곧 톰이 입을 열었다. 

“이제야 조금 기억이 나는 것 같구나..... 하지만 여전히 머리가 막혀 있고 몽롱한 게.....”          (P169-170)     

“아, 폐하!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소인처럼 지극히 보잘것없는 놈이 감히 폐하를 가르치다니요?”  

“그럼 도대체 왜 너에게 매를 든다는 말이냐? 이게 무슨 수수께끼 같은 소리야? 내가 정말로 미친 것이냐, 아니면 네가 미친 것이냐? 어디 설명 좀 해 보아라...... 솔직하게 말 좀 해 봐.”

“폐하, 쉽게 설명하고 뭐하고 할 거리가 없습니다. 어느 누구도 감히 왕세자님의 몸에 함부로 매를 들 수 없나이다. 그래서 폐하께서 잘못을 저지르시면 소인이 매를 맞는 겁니다. 그래야만 지당한 것이지요. 그게 소인이 맡은 일이고, 소인은 그 일로 밥을 먹고 살고 있사옵니다.”

톰은 이 얌전한 아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혼잣말로 이렇게 말했다.

“아, 이처럼 놀라운 일이 다 있나...... 아주 이상야릇하고도 별난 직업이로구나. 나를 대신해 머리를 빗고 옷을 입을 아이를 고용하지 않은 게 놀라울 정도야...... 그렇게 했으면 좋겠는걸! ..... 또 신하들에게 이런 일도 하게 하자. 매는 내가 직접 맞겠다고 하는 거야. 이런 변화를 주신 데 대해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면서 말이지.”                (P172)     


“군중을 멈추게 하고 무슨 이유로 그렇게 소란을 피우는지 그 이유를 물어보도록 하라! 어명이시다!”

잠시 번쩍거리는 갑옷을 입은 왕궁 수비병들이 문 밖으로 줄지어 나가 한길을 가로질러 군중 앞에 섰다. 곧 시동이 돌아와 나라의 치안과 명예 위반죄를 범하여 처형장으로 끌려가는 남자 하나와 여자 하나 그리고 여자아이 하나를 군중들이 뒤쫓는 중이라고 보고했다.

이 불행하고 불쌍한 사람들에게 죽음. 그것도 끔찍스러운 죽음이라니! 그런 생각이 들자 톰의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다. 동정심이 뭉클 솟아오르자 다른 일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 범죄자 세 사람이 나라의 법을 어겼다거나, 그들 때문에 피해를 당하고 고통 받는 사람이 있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그는 오직 사람의 목을 자르는 단두대와 그들이 맞이해야 할 끔찍한 운명에 대해서만 생각했다. 얼마나 걱정이 됐는지 톰은 순간적으로 자신이 진짜 왕이 아니라 가짜 왕이라는 사실마저 깜빡 잊어버렸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엉겁결에 이런 명령을 내렸다. 

“그들을 이곳으로 데려오라!”                (P182)     


"잘 왔소! 이곳에 몸을 숨기러 온 사람은 많았지만 자격이 없어서 그냥 돌려보냈지요. 하지만 왕관을 벗어 던지고 왕위라는 헛된 명예를 경멸하며 누더기 옷을 걸치고 평생을 거룩함과 육체적 고행에 바치려는 왕이라면...... 그런 소중한 분이라면 환영이지요! ...... 이곳에서 죽을 때까지 머물러도 괜찮소이다.“

왕은 중간에 서둘러 말을 가로채어 해명하려고 했지만 은자는 아예 상대방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의 말을 듣기는커녕 들뜬 목소리로 힘차게 계속 자기 이야기만 늘어놓았다.

“이곳에서는 마음 편히 지낼 수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당신의 피난처를 찾아내어 하느님의 뜻에 따라 당신이 포기해 버린 그 공허하고 어리석은 삶으로 다시 돌아와 달라고 성가시게 굴지 않을 겁니다. 이곳에서 당신은 기도를 드리고 성경을 읽으며 속세의 어리석음과 망상에 대해, 또 앞으로 다가올 하늘나라의 거룩함에 대해 묵상하게 되지요. 당신은 빵 조각과 약초로 살아가고 날마다 몸을 채찍으로 다스려 영혼을 깨끗이 하겠지요. 입는 옷은 살갗에 걸치는 헤어 셔츠 하나면 될 것이요. 마시는 것은 오직 물뿐입니다. 당신은 평화를, 그렇지요, 그야말로 완전한 평화를 누리게 될 겁니다. 누군가 찾아온다고 해도 그 사람은 실망만 하고 다시 발길을 돌리게 될 겁니다. 결국 그들은 당신을 찾지 못할 것이니 당신을 괴롭힐 리도 없겠지요.”              (P255)     

시간이 꽤 흐른 뒤 여전히 사내아이를 바라보던 노인은 문득 잠들어 있던 사내아이가 눈을 떴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러나 그의 마음이 어떤 몽상적인 일에 몰두해 있었기 때문에 눈으로 직접 보고 있지는 않았다. 그런데 그 아이가 눈을 크게 뜨고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겁에 질려 식칼을 올려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만족스러워하는 악마의 미소가 노인의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 노인은 태도를 바꾸거나 하던 일을 중단하지도 않고 태연스럽게 그에게 말했다.

“헨리 8세의 자제분께서는 기도를 올리셨나?”

온몸이 결박된 어린아이는 뭄부림을 쳤지만 헛수고였다. 이와 동시에 붕대에 묶인 턱을 움직여 억지로 소리를 질렀지만 질식한 소리밖에는 나오지 않았다. 은자는 그 소리를 자기가 묻는 질문에 대한 긍정적인 대답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럼, 다시 기도를 드리시게나. 죽어가는 사람을 위해 드리는 마지막 기도를 드리란 말씀이야!”                  (P264-265)     


“자, 조심해서 다루시오. 포졸 양반, 그 손을 치우시구려.... 그분은 고분고분 따라갈 테니, 내가 책임지겠소. 자, 댁이 앞장을 서면 우리가 뒤따라가리다.” 

그리하여 포졸이 꾸러미를 든 아낙네와 함께 앞장을 서자 헨든과 왕이 그 뒤를 따르고 군중이 바로 뒤에서 그들의 뒤를 쫓아갔다. 왕은 반항하고 싶었지만 헨든이 그에게 나지막하게 귀엣말을 했다. 

“통촉하옵소서, 폐하..... 폐하의 법은 폐하의 왕국에 생명을 불어넣는 생기입니다. 법을 만든 분이 법을 거역하면서 백성들한테 그 법을 지키라고 요구할 수 있겠습니까? 분명히 누군가가 이런 법 중의 하나를 위반한 건 사실입니다. 폐하께서 뒷날 옥좌에 다시 계시게 되면, 폐하께서 짐짓 일반 백성처럼 생활할 무렵 왕의 신분을 숨기고 법의 요구에 순순히 따랐다는 기억을 떠올리시면서 마음 아파하실까요?”

“그대의 말이 옳소. 그러니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소. 영국의 왕이 백성들에게 법의 심판에 따라 무엇을 요구하든, 왕 또한 백성의 신분을 유지하고 있을 때에는 말없이 그 요구에 따라야 할 것이오.”

아낙네는 재판관 앞으로 불려 나갔을 때 피고석에 앉아 있는 사내아이가 바로 도둑질을 한 장본인이라고 증언했다. 그 증언을 뒤집을 수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왕은 혐의를 그냥 뒤집어쓸 수밖에 없었다.                     (P284-285)    

 

“하지만 우리 두 사람 모두의 권리를 회복해 줄 계획이 한 가지 있소. 내가 세 나라 말로 편지 한 통을 써 줄 테니 -- 라틴어, 그리스어, 영어로 말이오 -- 그대는 내일 아침에 그 편지를 갖고 서둘러 런던으로 가오. 다른 사람은 말고 꼭 내 외삼촌 하트퍼드 경에게 그 편지를 전하시오. 외삼촌이 그 편지를 보면 내가 쓴 편지라는 걸 단번에 알아볼 것이오. 그럼 나한테 당장 사람을 보낼 거요.”

“폐하, 소인의 신원을 증명하고 제 소유권을 되찾을 때까지 이곳에서 기다리는 게 최선책이 아니겠나이까? 지금 같아서는 소인만큼 더욱 잘할 수 있는......”

그러자 왕이 명령조로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요! 나라의 안녕과 왕실의 법통이 달려 있는 문제와 비교하여 자네의 하찮은 재산, 자네의 하찮은 이해관계가 뭐 그리 대단하단 말이오!” 그러고 나서 그는 너무 심하게 말했다고 생각한 듯 다시 목소리를 낮추어 덧붙여 말했다. “아무 걱정 말고 내가 시키는 대로 하시오. 내가 자네의 권리를 되찾아줄 테니, 자네 문제를 말끔히 해결해 주겠소..... 암, 그 이상으로 해 주겠소. 내가 기억해 뒀다가 잊지 않고 반드시 갚아 주겠소.”

그렇게 말하면서 왕은 펜을 들어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P310-311)  

   

감방은 하나같이 사람들로 붐볐다. 그래서 어린 왕과 마일스 헨든은 흔히 경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을 가두는 커다란 방에 쇠사슬로 묶여 수감되었다. 그 방에는 두 사람 말고도 수갑이나 족쇄를 찬 남녀노소의 죄수가 스무 명가량 있었다. 음란하고 시끄럽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왕은 임금 신분으로서 받게 된 이 엄청난 수모 때문에 잔뜩 화가 나 있었지만 헨든은 말없이 시무룩했다. 헨든은 몹시 당황하고 있었다. 환희에 찬 탕아가 되어 고향 집에 돌아오면 모두 자기를 미칠 듯이 반가워할 것으로 기대했는데, 오히려 냉대를 받고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으니 말이다. 꿈과 현실이 너무 달라 그저 망연자실할 따름이었다.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무지개를 보고 밖에서 신바람 나게 춤을 추다가 갑자기 벼락을 맞은 듯한 느낌이었다.                  (P317)     


형틀에 묶여 있어야 하는 처형 시간을 모두 채우고 풀려나자 헨든은 이 지방을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다. 칼을 돌려받았고, 노새와 당나귀도 모두 돌려받았다. 그는 당나귀에 올라타 길을 떠났고 왕이 그 뒤를 따르자 군중들은 존경스러운 눈길로 두 사람이 지나갈 수 있도록 말없이 길을 터 주었고, 그들이 가 버리자 사람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헨든은 곧 생각에 몰두했다. 해결해야 할 아주 중요한 문제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 어디로 발길을 돌려야 하나? 믿고 기댈 만한 든든한 도움을 찾지 못한다면, 그는 자신의 유산을 포기해야 할 뿐만 아니라 사기꾼이라는 누명을 벗지 못한 채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렇게 믿고 기댈만한 든든한 도움을 어디서 찾기를 기대할 수 있단 말인가? 과연 어디에서? 골치 아픈 문제였다. 마침내 한 가지 그럴 듯한 생각이 떠올랐다. 물론 아주 실낱같은 가능성이기는 했지만, 달리 뾰족한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그것이라도 고려해 볼 가치는 있었다. 전에 앤드류스 영감이 새로 등극한 나이 어린 왕이 억울하고 불행한 사람들을 따뜻하고도 너그럽게 옹호해 준다고 한 말이 기억났다. 왜 그분을 찾아 뵙고 억울한 사정을 아뢰려고 하지 않는가? 그래, 그게 좋겠어. 하지만 이런 거지 같은 몰골로 근엄한 왕을 뵙도록 누가 들여보내 주기나 할까? 그건 걱정할 것 없어, 어떻게 되겠지. 아직 다리에 도착하지도 않았는데 다리를 건널 걱정을 할 필요는 없는 법이지. 헨든은 노련한 군인으로 온갖 방편과 임시변통에 뛰어났다. 어떤 문제든 틀림없이 해결 방법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렇다. 그는 런던으로 가기로 했다.                  (P342-343)   

  

다들 자리에서 일어섰고, 왕을 승인하는 예식이 뒤이어 거행되었다. 

그런 뒤 거룩한 송가가 풍성한 선율을 펼치면서 성당 안에 울려 퍼졌다. 이렇게 입장을 알리고 대대적인 환영을 받으면서 톰 캔티는 왕좌로 안내되었다. 방청객들이 바라보는 동안 유서 깊은 의식이 아주 엄숙하게 거행되었다. 그 의식들이 막바지를 향해 치달으면 치달을수록 톰 캔티의 얼굴이 점점 창백해졌다. 또한 깊어 가는 비애와 무력감이 끝없이 그의 정신을 짓누르고 후회로 얼룩진 가슴을 짓눌렀다. 

마침내 맨 마지막 의식이 다가왔다. 캔터베리 대주교가 방석 위에 놓여 있던 영국의 왕관을 집어 들어 몸을 떨고 있는 가짜 왕의 머리 위로 들어올렸다. 바로 그 순간, 널찍한 건물 날개에서 무지갯빛 광채가 번쩍거렸다. 한데 모여 있는 귀족 한 사람 한 사람이 일제히 작은 관을 들어 올리더니 머리 위에서 그대로 평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자세로 가만히 있었다. 

그러자 성당 안은 쥐죽은 듯 고요해졌다. 이런 감동적인 순간에 유령 하나가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면서 난데없이 이 장면에 나타났다. 그런데 대관식 장면에 넋을 빼앗기고 있던 군중들은 이 유령이 갑자기 나타나 커다란 중앙 복도를 따라 걸어 올라갈 때에야 비로소 그를 지켜보았다. 모자도 쓰지 않고 다 떨어진 신발을 신고 넝마가 되고 있는 조잡한 평민 옷을 걸친 사내아이였다. 그 아이는 땟국에 전 초라한 몰골과는 어울리지 않게 엄숙한 태도로 한 손을 들면서 이런 경고의 말을 던졌다. 

“왕의 자격을 박탈당한 그 자의 머리에 영국의 왕관을 얹는 것을 금하노라. 왕은 바로 나란 말이다!”

그 순간 분개한 사람 몇 명이 손으로 그 아이를 잡았다. 그러나 그와 똑같은 순간 왕 옷을 입은 톰 캔티가 재빨리 앞으로 나서서 낭랑한 목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그 손을 놓아라! 그분은 왕이시다!”                 (P370-371) 

    

섭정은 고개를 돌리며 이렇게 말했다. 

“토머스 경, 이 아이를 체포하게..... 아니, 잠깐!”

섭정의 얼굴이 갑자기 환해지더니 누더기 옷을 걸친 아이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국새(國璽)가 어디에 있는가? 이 질문에 옳게 대답하여라. 그러면 수수께끼가 풀릴 테니까. 왜냐하면 오직 왕세자만이 그 질문에 대답할 수 있으니까 말이야! 그렇게 하찮은 일에 왕위와 왕조의 운명이 달려 있다니!”

그 생각은 기발하고도 적절했다. 다른 고위 관리들이 만족스러운 시선을 서로 주고받음으로써 말없이 박수갈채를 보내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들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렇다. 진짜 왕자가 아니고서는 그 어느 누구도 사라진 국새의 비밀을 도저히 풀 수 없을 것이다.                       (P374)    

 

“저희는 장난삼아 서로 옷을 바꿔 입었지요. 폐하, 그러고 나서 거울 앞에 섰지요. 저희는 생김새가 너무 닮아서 마치 옷을 바꿔 입지 않은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요, 그것도 기억하시는군요, 그러다가 왕자님께서는 병사가 제 손에 입힌 상처를 보셨나이다..... 자, 보세요! 바로 여기에 그 상처가 있습니다. 손가락이 너무 뻣뻣하여 아직도 저는 이 손으로 글씨를 제대로 쓰지 못합니다. 이 상처를 보신 왕자님께서 노발대발하며 그 병사를 당장 요절내야겠다고 궁전 문으로 달려가셨사옵니다.... 바로 그때 탁자를 지나치셨고요..... 그 국새라는 물건이 그 탁자 위에 놓여 있었습니다...... 왕자님께서는 그것을 집어 들더니 마치 숨길 곳을 찾는 것처럼 주위를 열심히 돌아보셨습니다...... 그러다가 왕자님의 시선이.....”     

“그래, 이제 알겠어! ....... 하느님 감사합니다!” 왕을 자처하는, 남루한 옷을 입은 거지 아이가 무척 흥분하며 소리를 질렀다. “세인트 존 경, 어서 가 보게..... 벽에 걸려 있는 밀라노 갑옷의 팔 부분에 국새가 들어 있으니까!”

“네, 맞습니다. 폐하! 맞사옵니다!” 톰 캔티가 소리를 질렀다. “이제 이 나라 영국의 왕위는 폐하의 것이옵니다. 이 사실을 부정하느니 차라리 벙어리로 태어났다고 말하는 게 더 나을 것이오! 어서 가시오, 세인트 존 경. 신발에서 불이 나도록 어서 다녀오시오!”           (P381-382)     


왕은 톰에게 몸을 돌리고 부드럽게 말을 건넸다. 

“얘야, 나도 어디에 숨겼는지 기억하지 못하는 일을 어떻게 네가 기억할 수 있었단 말이냐?”

“아, 폐하, 그야 어려울 게 없었사옵니다. 제가 여러 날 그것을 사용했기 때문이옵니다.”

“네가 그것을 썼다고?..... 그런데도 그것이 있는 곳을 설명할 수 없었단 말이냐?”

“사람들이 찾고 있는 게 그 물건인지 몰랐사옵니다. 이러저러하게 생겼다고 저한테 말해 주지 않았사옵니다. 폐하.”

“그럼 그것을 어디다 썼느냐?”

그러자 톰의 얼굴이 조금씩 붉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두 눈을 내리깔고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어서 말해 보아라, 얘야, 두려워할 것 없다.” 왕이 다시 말했다. “영국의 국새를 무슨 일에 사용했느냐?”

애처롭게도 톰은 당황한 나머지 잠시 더듬거리다가 이렇게 내뱉었다. 

“호두 까는 데 썼사옵니다!”                    (P384-385)  

   

에드워드 6세는 애석하게도 몇 년밖에는 더 살지 못했지만 그 짧은 생애를 값지게 살았다. 왕의 부유한 신하인 어떤 고위 관리가 왕의 관대한 정책에 여러 번 반기를 들며, 지금 왕이 온 힘을 다해 고치려고 하는 어떤 법이 너무 너그러워서 막상 고통이나 고난을 받을 필요가 있는 사람한테 그런 것을 주지 못한다고 주장하자, 왕은 애틋하면서도 동정 어린 눈길로 그 신하를 바라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고통 받고 고난을 당한다는 게 어떤 것인지 경은 아시오? 짐도 백성도 알고 있지만, 경은 잘 모를 것이오.”

그 무렵은 잔인한 시대였지만 에드워드 6세가 다스리던 기간은 특별히 자비로웠다. 이제 그와 작별하려는 마당에 그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이 사실을 명심해 두기로 하자.                   (P403-404)  

   

마크 트웨인이 <왕자와 거지>를 처음으로 집필하기 시작한 것은 1877년이다. 그해 여름 그는 빅토르 위고의 작품들을 비롯하여 마리 앙투아네트의 전기, 샬럿 M. 영의 작품 등을 읽었다. 이 밖에도 J. 해먼드 트럼불의 <코네티컷과 뉴헤이븐의 진짜 엄격한 법과 가짜 엄격한 법>, 윌리엄 레키의 <유럽 도덕사>. 이폴리트 텐의 <앙시앵 레짐의 역사>, 제임스 프라우드의 <영국사>, 그리고 데이비드 흄의 <영국사>등을 읽기도 하였다. 

이 중에서도 특히 샬럿 영의 <어린 공작>은 트웨인이 <왕자와 거지>를 집필하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트웨인은 이 작품의 구상과 관련하여 한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 재미있고 그림 같은 작은 역사책, 즉 영의 <어린 공작>”에서 힌트를 얻었다고 밝힌다. 그러면서 “지금까지 살면서 저는 한 번도 창조적으로 작품을 구상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한 사실은 프랜시스 버넷이나 다른 어떤 작가도 마찬가지이지요.”라고 말한다.(버넷은 <소공자>, <소공녀>, <비밀의 화원>등을 쓴 영국태생의 미국 여성 작가이다.)             (P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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