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모래의 여자> 1964년
소설 <모래의 여자>는 구덩이 속에 갇혀 끊임없이 모래를 퍼내는 노역을 해야 하는 한 남자의 이야기이다, 삶의 부조리와 모순 속에서 자유의 의미를 되묻는 작품이다. 영화 <모래의 여자>는 1964년 칸 영화제 수상작이다.
8월 어느 날, 한 남자가 행방불명되었다. 휴가를 이용하여 기차를 타면 반나절 정도 걸리는 해안으로 떠난 채 소식이 끊어진 것이다. 수색 신청서도 신문 광고도 모두 헛수고였다.
물론 이런 실종 사건이 그리 드문 것은 아니다. 통계상으로도 연 수백 건에 달하는 실종 신고서가 접수되나 발견 될 확률은 의외로 적다고 한다. 살인이나 사고로 실종됐다면 확실한 증거가 남아 있을 것이고, 납치 같은 경우라도 관계자에게는 일단 그 동기가 명시되는 법이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속하지 않는 실종은 단서 잡기가 몹시 힘들다. 가령 그런 경우를 순수한 도망이라고 한다면, 대다수의 실종이 그 순수한 도망에 해당될 것이다. (P9)
사구에 마을이 겹쳐져 버린 것이다. 아니면 마을에 사구가 겹쳐져 버린 것이다. 어느 쪽이든 사람을 답답하고 불안하게 만드는 풍경이었다.
하지만 목적지인 사구에 도착했으니, 그것으로 족하다. 남자는 물통의 물을 한입 가득 마셨다. 그러고서 입안 가득 바람을 들이켜자, 투명하게 보였던 그 바람이 입안에서 까끌거렸다.
남자의 목적은 모래땅에 사는 곤충을 채집하는 것이었다. 물론 모래땅에 사는 곤충은 몸집도 작고 색도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하지만 웬만한 마니아가 되면 나비나 잠자리쯤은 거들떠보지도 않게 된다. 그들 마니아들이 노리는 것은, 자기의 표본 상자를 화려하게 장식하는 일도 아니고 분류학적 관심도 아니고 물론 한방 약재를 찾는 것도 아니다. 곤충 채집에는 훨씬 더 소박하고 직접적인 기쁨이 있다. 새로운 종을 발견하는 것 말이다. 신종 하나만 발견하면, 긴 라틴어 학명과 함께 자기 이름도 곤충도감에 기록되어 거의 반영구적으로 보존된다. 비록 곤충이란 형태를 빌려서이기는 하나 오래도록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을 수 있다면, 노력한 보람도 있는 셈이다. (P15)
요컨대 모래란 부서진 암석 중에서 자갈과 점토의 중간에 있는 물질이다. 그러나 단순히 중간 물질이라는 것만으로는 완전한 설명이라고 하기 어렵다. 돌과 모래와 점토, 세 가지가 복잡하게 섞여 있는 흙 속에서 어째서 모래만 분리되어 독립된 사막과 모래땅이 될 수 있었는지? 만약 단순히 중간 물질에 불과하다면, 풍화와 물의 침식 작용에 의해 암석 지대와 점토 지대 사이에 다음 단계로 옮겨지는 무수한 중간 형태가 형성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돌과 모래와 점토, 이렇게 분명하게 구분되는 세 가지 형태뿐이다. 더 기묘한 것은 에노시마 해변에 있는 모래든 고비 사막에 있는 모래든, 그 알갱이의 크기는 거의 다르지 않다는 점이다. (P18)
물이든 공기든 모든 흐름은 난류(亂流)를 일으킨다. 이 난류의 최소 파장이 사막에 있는 모래의 직경과 거의 비슷하다. 그 특성 때문에 흙 속에서 모래만 선별되어 흐름과 직각 방향으로 날아간다. 흙의 결합력이 약하면, 돌은 물론이요 점토도 날지 못할 미풍이 불어도 모래는 일단 날아올랐다가 다시 낙하하면서 바람을 따라 이동하게 되는 것이다.
아무래도 모래의 특성은 오로지 유체역학에 속하는 문제인 것 같았다.
거기에다 다음과 같은 정의를 덧붙이면--
.... 덧붙여, 암석 파편 중에서 유체에 의해 가장 멀리 이동될 수 있는 크기의 입자.
지상에 바람과 흐름이 있는 이상 모래땅의 형성은 불가피한지도 모르겠다. 바람이 불고 강이 흐르고 바다가 넘실거리는 한, 모래는 토양 속에서 끊임없이 생성되어 마치 살아 있는 생물처럼 장소를 가리지 않고 기어다닐 것이다. 모래는 절대로 쉬지 않는다. 조용하게, 그러나 확실하게, 지표를 덮고 멸망시킨다...... (P19)
노인이 혼자서 다시 내 쪽으로 되돌아왔다.
“그런데 자네, 앞으로 어쩔 작정인가?”
“어쩌다뇨? 벌레를 찾는다고 했잖습니까.”
“하지만 올라가는 버스는 벌써 끊어졌을 텐데.....”
“어디, 묵을 만한 데가 있을 테죠.”
“묵다니, 이 부락에 말인가?”
노인의 얼굴이 피뜩 떨렸다.
“여기에 없으면, 옆마을까지 걸어서 가지요.”
“걸어........?”
“어차피, 서두를 이유도 없는데요, 뭐”
“아니지 아니야, 그렇게 성가시게 멀리까지 갈 필요 없지....”
갑자기 참견쟁이 노인네처럼 주절주절 늘어놓는 말투로, “보시다시피, 가난한 마을이라서 그럴듯한 집 한 채 없지만, 자네만 좋다면야, 내가 그 정도 편리는 봐줄 수 있지”하고 말했다.
딱히 악의가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들은 그저 무언가 — 아마 조사하러 나올 예정인 현청의 공무원이나 뭐 그런 사람 —를 경계하고 있을 뿐인 것이다. 경계만 풀면 선량하기 짝이 없는 어민에 지나지 않는다. (P25)
노인이 그를 안내한 곳은, 부락 가장 바깥쪽 사구의 능선에 접해 있는 구멍 가운데 하나였다.
능선 안쪽으로 나 있는 좁은 길을 걷다가 오른쪽으로 돌아 조금 더 걸어간 곳에서, 노인은 어둠 속에 몸을 구부리고 손뼉을 치면서 큰소리를 질렀다.
“어이, 할멈!”
발치에 펼쳐져 있는 어둠 속에서 등잔불이 흔들리고, 대답 소리가 들렸다.
“여기, 여기, ...... 그 가마니 옆에 사다리가 있으니까......”
과연 사다리를 사용하지 않고서야 이 모래 벼랑을 어찌 감당하랴. 지붕 높이의 거의 세 배에 가깝다. 사다리를 사용한다 해도 내려가기가 그리 쉽지 않을 것 같았다. 낮에 보았을 때는 경사가 더 완만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지금은 거의 수직에 가깝게 보인다. 사다리는 덜컥 겁이 날 만큼 들쭉날쭉한 새끼줄로 만들어져 있어 자칫 균형을 잃으면 도중에 뒤틀리고 말 것 같았다. 마치 천연의 요새 속에 살고 있는 것 같다.
“어려워 말고, 편히 쉬시우......”
노인은 아래로 내려가지 않고 그 자리에서 돌아갔다. (P27)
미안하다는 듯 웃자 여자의 왼쪽 뺨에 보조개가 생겼다. 눈초리만 빼놓으면 그런대로 애교 있는 얼굴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눈초리도 아마 눈병 탓이리라. 아무리 화장을 해도 벌겋게 부어오른 눈가는 숨길 수 없다. 자기 전에 잊지 말고 안약을 넣어주어야겠군.....
“그보다, 우선 목욕을 좀 하고 싶은데.....”
“목욕......?”
“목욕탕, 없습니까?”
“미안하지만, 내일 모레 하세요.”
“내일 모레? 내일 모레는, 나 없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큰소리를 내며 웃는다.
“그래요....”
여자는 얼굴을 돌리고, 일그러진 표정을 지었다. 실망한 것이리라. 참, 시골 사람들은 꾸밈이 없군. 그는 몸이 근질거리는 듯한 기분에 열심히 입술을 핥았다.
“목욕탕이 없으면, 물이라도 끼얹으면 됩니다. 온몸이 모래투성이라서 말이죠.” (P29)
남자의 표정이 굳어졌다. 애써 가다듬은 기분을 다시 헤집어놓은 것 같아 불쾌했다. 그러나 그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혈관 속에서 무언가가 제멋대로 부풀어오른다. 마치 피부에 들러붙은 모래가 혈관으로 스며들어가 안쪽에서 그의 감정을 깎아내는 것 같았다.
“그럼 나도 거들어볼까.”
“괜찮아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첫날부터 어떻게, 미안해서......”
“첫날부터? ....... 아직도 그런 이상한 소리를.... 내가 여기 머무는 것은 오늘밤뿐이라고요.”
“그런가요......”
“나 그렇게 한가한 사람이 아니니까..... 자, 그 부삽 좀 이리 줘봐요.”
“손님 부삽은, 저기에 있는데요....”
과연 입구 옆 처마 밑에 부삽 하나와 손잡이가 달린 석유통이 두 개 따로 놓여 있었다. 아까, 일인분 더, 라면서 길 위에서 떨어뜨린 것이 틀림없다. 너무도 착착 앞뒤가 맞아떨어져, 꿰뚫어보았는지는 그도 알 수 없었다. 아무튼 사람을 너무 얕보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고, 기분이 나쁘기도 하였다. 굵직한 옹이투성이 잡목으로 만든 부삽 손잡이는 손때로 까맣게 빛났다. 일을 거들 마음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어머, 벌써 삼태기가 옆에 왔어요.” (P38)
모래는 절대로 쉬지 않는다. 남자는 몹시 당황스럽다. 작지 싶어서 별 생각 없이 밟은 뱀의 꼬리가 뜻밖에 커서, 정신을 차리고 보니 뱀의 머리가 자기 목덜미에 있더라는 식의 당혹감이다.
“그렇지만, 어디 이래서야 오로지 모래를 치우기 위해서 살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는 꼴이잖소!”
“야반도주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잖아요.”
남자는 점점 더 갈팡질팡한다. 생활의 속내까지 관계할 생각은 없었다.
“왜 못해! ...... 간단하지 않소.....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할 수 있지!”
“그렇지가 않아요.....”
여자는 부삽질을 하는 동작에 맞추어 숨을 쉬면서 넌지시 말했다.
“부락이 그럭저럭 유지되는 것도, 우리들이 이렇게 열심히 모래를 퍼내는 덕분이니까요..... 우리들이 그냥 내버려두면, 열흘도 못 가서 완전히 모래에 묻혀버려서..... 그 다음에는, 뒷집이 똑같은 일을 당하게 돼요.”
“이거야 원, 황송스런 미담이로군...... 그래서, 그 삼태기꾼들도 그렇게 열심이었단 말이지.”
“그야, 구청에서 일당을 받고 있기는 하지만......”
“그럴 돈이 있으면, 왜 제대로 된 사방림(砂防林)를 만들지 않는 거요?”
“계산해 보았더니, 역시 이렇게 하는 식이 싸게 먹히는 모양이에요.....” (P43)
여자가 겨우, 부시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그 어깨를 붙잡고 흔들면서, 남자는 애원하였다.
“어이, 사다리가 없어! 어디로 올라가면 되지! 사다리가 없으면 올라갈 수가 없잖아!”
여자는 당황한 몸짓으로 수건을 집더니, 두세 번 얼굴을 세게 흔들고는 빙그르르 등을 돌려 엎드렸다. 부끄럽다는 뜻인가. 하지만 너무도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몸짓이었다. 남자는 봇물이라도 터진 듯 악을 썼다.
“이게 무슨 짓이야! 난 시간이 없다고! 빨리 사다리 안 내놓고 뭐하는 거야! 어디다 숨긴 거야, 어! 장난질 그만하고, 빨리 꺼내놔!”
그런데도 상대방은 아무 대답이 없었다. 똑같은 자세로, 그저 목을 좌우로 흔들 뿐이었다.
갑자기 남자의 몸이 경직되었다. 초점을 잃은 시선은 공허하고, 경련을 일으키며 호흡도 거의 멈췄다. 자기가 얼마나 무의미한 질문을 하고 있는지, 불현 듯 깨달은 것이다. 그렇지, 그건 새끼줄로 만든 사다리였다.... 새끼줄 사다리는 스스로 설 힘이 없다...... 손에 쥐어준다 한들, 밑에서 걸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자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가 사다리를 걷어가 버렸다는 뜻이 아닌가...... 모래로 얼룩진 턱수염이 갑자기 볼품없게, 눈에 거슬리기 시작했다. (P52)
“여기 사정을 밖에서 알게 되면, 곤란하지요....”
“그럼, 나는 괜찮다는 말이야? .... 말도 안 돼! ..... 그야말로 얼토당토않은 착각이라고! 미안하게도 나는 집도 절도 없는 부랑자가 아니라고..... 세금도 내고, 주민등록증도 있고.... 수색이 시작되면, 보기 좋게 당할 테니까! 그래도 모르겠어, 그만한 일을..... 대체 뭐라고 변명할 거지? ...... 자, 책임자를 불러...... 이게 얼마나 얼빠진 짓인지, 내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얘기할 테니까!”
여자는 눈을 내리깔고 맥없는 한숨을 토했다. 그뿐, 어깨를 떨구고는 움쩍도 하려 들지 않는다. 마치 말도 안 되는 생트집을 잡힌 불쌍한 강아지처럼, 그 태도가 오히려 남자의 분노에 기름을 끼얹는 결과를 불렀다. (P63)
“하지만, 밖으로 나가 봐야, 딱히 할 일도 없고.....”
“걸어다니면 되잖아!”
“걸어다녀요.......?”
“그래, 걷는 거야..... 그냥 걸어다니기만 해도 충분하잖아..... 내가 여기 오기 전까지는 당신도 마음대로 나다녔을 것 아니야?”
“하지만 볼일도 없는데 나다녀봐야, 피로하기만 할 뿐이니까요.....”
“무슨 그런 웃기는 소리를 하는 거야! 자기 마음을 열어 보라고, 모를 리가 없으니까! .... 개도 우리 속에만 갇혀 있으면 미쳐버려!”
“걸어봤어요.....”
여자는 불쑥, 껍질을 닫은 조개처럼 억양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이지, 끔찍하도록 걸었어요.... 이곳에 올 때까지..... 애를 안고, 오래오래..... 이제, 걷는 데는 지쳤어요.....”
남자는 허를 찔리고 말았다. 참으로 묘한 논리도 다 있다, 그런 식으로 나오면 그도 받아칠 자신이 없다. (P87)
“소리내지 마.... 해치지는 않을 거야.... 입 꼭 다물고 있어....”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이면서 수건을 마구 입속에 쑤셔넣는다. 여자는 그 거칠고 서툰 행위에도 저항하지 않고 거의 남자에게 몸을 맡기고 있었다.
여자의 수동적인 태도를 알아차리자 남자는 겨우 자제력을 되찾는다. 절반 정도 쑤셔넣었던 수건을 꺼냈다가 다시 입에 물리고 목 뒤에다 단단히 묶었다. 이어 준비한 각반으로 여자의 두 손을 뒤로 하여 힘껏 묶었다.
“자, 집 안에 들어가!”
여자는 완전히 기세가 꺾여 행동뿐만 아니라 말에도 아주 순종적이었다. 적의는커녕 항의의 빛조차 보이지 않는다. 아마 일종의 최면 상태에 빠진 것이리라. 내 손으로 한 일이지만 그다지 솜씨가 좋았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 서투름이 오히려 폭력적인 효과를 발휘하여 여자의 저항력을 빼앗아 버렸는지도 모르겠다.
여자를 봉당으로 밀어넣는다. 남은 각반을 꺼내 발목에 둘둘 감는다. 어둠 속에서 더듬더듬 하는 일이라 꼼꼼하게, 남은 부분으로 한번 더 감아 꽉 묶는다.
“잘 들어, 꼼짝않고 있는 거야..... 얌전하게만 있으면 해칠 생각은 없어.... 하지만 나 역시 필사적이니까 여차하면....” (P100)
남자의 몸은 분노와 굴욕으로 경직되었다. 끈적거리는 손바닥에 손톱이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꽉 쥐고 계속 고함을 지른다.
“아직도 모르겠어! 입으로 말해서는 모르는 것 같아서, 알도록 해줬잖아! 여자를 묶어놓았다고 말했잖아! ..... 당장 나를 끌어올리든가, 아니면 사다리를 내려주든가, 그때까지 여자는 꼼짝도 못해! ..... 이 구멍 속에서 모래를 파낼 사람은 이제 없다고.... 그래도 상관없어, 어? ..... 잘 생각해 보라고..... 여기가 모래에 묻히면 곤란한 건 그쪽일텐데! ...... 모래가 여기를 덮치고 부락으로 밀려들 거라고! ...... 왜 그렇게 조용한 거야? ....... 왜 아무 말이 없냐고!”
대답 대신, 남자들은 다짜고짜 삼태기를 끄는 소리만 남기고 사라졌다.
“왜! ...... 왜 아무 말도 없이 가버리는 거야!”
그 목소리는 이미 자기 자신만 겨우 들을 수 있는 맥없는 비명이었다. (P105)
남자는 물을 찾아 개수대 주변을 손에 닥치는 대로 휘저었다. 모든 화합물 중에서 물은 가장 단순한 화합물이다. 책상 서랍에서 일 엔짜리를 발견하는 만큼 손쉽게 찾지 못하란 법도 없다. 보라, 물 냄새가 난다. 틀림없는 물 냄새다. 남자는 항아리 속에 고여 있는 눅눅한 모래를 한줌 움켜잡고 입안 가득 문다. 토악질이 올라왔다. 몸을 구부리자 위가 들썩거렸다. 누런 위액과 눈물이 넘쳐흘렀다.
두통이, 납의 차양처럼 눈 위로 주르륵 떨어진다..... 정욕은 결국 파멸에 이르는 거리를 단축시켰을 뿐인 모양이다. 갑자기 남자는 기어서 개처럼 봉당의 모래를 파 뒤집기 시작했다. 팔뚝 깊이만큼 파자, 모래가 검게 물기를 띤다. 그 속에 얼굴을 처박고, 빠작빠작 타는 이마를 밀어붙이고, 가슴 가득, 모래 냄새를 빨아들였다. 잘하면 위속에서 산소와 수소가 결합해 줄지도 모른다.
“제길, 치사한 수작 부리고 말이야!”
주먹을 꽉 쥐고 목소리까지 떨면서 여자를 돌아보았다.
“대체 어쩌자는 거야! 정말 물 한 방울도 없는 거야!”
드러난 사타구니로 옷을 끌어당기면서 윗몸을 비틀며 여자가 속삭였다.
“네, 없어요....”
“없다고!....... 없다고 말만 하면 다 되는 줄 알아! ..... 이렇게 되면 나도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일이니까...... 죽일 놈들! .... 빨리 어떻게 좀 하라고! ...... 부탁이야...... 부탁이라잖아!”
“그러니까 우리가 일만 시작하면 지금 당장이라도.....”
“좋아, 알았어, 내가 졌어! .... 할 수 없지, 져주지.....”
말린 정어리도 아니고, 이렇게 죽기는 싫다. 물론 정말로 굴복한 것은 아니다. 물을 얻기 위해서라면 원숭이춤이라도 추어줄 것이다.
“져주겠어....... 하지만 배급 시간까지 기다려야 한다면, 그건 못 참아.... 이렇게 목이 말라서야 어떻게 일을 할 수 있겠어..... 그러니까 지금 당장 연락을 하라고..... 당신도 목마를 것 아니야.”
“일을 시작하면 금방 알려져요..... 항상 누구 한 사람은 망루에서 망원경으로 지켜보고 있으니까.....”
“망루?”
감방에서, 구금되었다는 사실을 절실하게 실감하게 하는 것은 철창도 아니고 벽도 아니고 그 조그만 쪽창이라고 한다. 남자는 허둥거리면서도 재빨리 기억 속을 둘러본다. 수평으로 나뉜 하늘과 모래..... 망루가 파고들 여지 따위 어디에도 없다. 이쪽에서 보이지 않는데 어떻게 저쪽에서 보일 리가 있겠는가.....
“뒤켠의, 벼랑가에서 보면 금방 눈에 띄는데요....”
남자는 순순히 허리를 구부리고 부삽을 주워들었다. 이제 와서 자좀심 따위를 운운해 본들, 때로 얼룩진 셔츠에 다림질을 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얘기다. 쫓기듯 밖으로 나갔다. (P140-141)
“..... 난 학교 선생이에요.... 동료 교사도 있고, 교조도 있고, 교육위원회며 운영위원회도 있습니다.... 내가 행방불명되었는데 세상이 조용하게 가만히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까?”
노인은 혀끝으로 윗입술을 축이고, 별 관심 없다는 듯이 미소를 띠었다. 아니, 미소가 아니다. 그저 바람과 함께 불어오는 모래를 막으려다가 눈꼬리에 주름이 졌을 뿐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애가 타는 그는, 주름 하나라도 놓칠수 없었다.
“뭐? 뭐라고요? ..... 설마 당신도 이게 거의 범죄라는 것을 모를 리는 없겠죠?”
“글쎄, 벌써 열흘이나 지났는데도, 파출소에서 조사를 하러 나오지도 않았고.....” (P144)
“세상 사람들이 아무리 관심을 보여도 정작 보조금이 나오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으니까.”
“그러니까, 그 보조금을 타내는 운동을 벌이자는 겁니다.”
“현청의 약관에, 모래에 의한 피해는 재해 보상의 범위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돼 있다는구먼.”
“그것을 인정하도록 압력을 가하면 됩니다!”
“이렇게 가난한 마을에서 뭘 할 수 있겠나.... 우리네는, 분명하게 말해서 이제 넌더리가 나.... 아무튼 지금처럼 하는 게 제일 싸게 먹히거든..... 기관 같은 데 맡겼다가는 그야말로 주판알 퉁기는 사이에 부락 전체가 송두리째 모래 속에....”
“하지만, 나한테도 입장이라는 게 있단 말이야!”
참다 못해 폐를 쥐어짜며 외쳤다.
“당신네들도 다 자식이 있을 거 아냐? 그렇다면 교사의 의무를 모를 리 없을 텐데!”
그 순간 노인이 로프를 끌어올렸다. 뒤통수를 얻어맞은 남자는 저도 모르게 손을 놓아버린다. 이 무슨 꼴이냐..... 오로지 로프를 끌어올릴 기회를 기다리기 위해서 얘기를 듣는 척했다는 말인가.... 아연하여, 뻗은 두 손이 공중에서 허우적거린다.
“미쳤어.... 제정신이 아니야.... 모래 퍼내는 것쯤, 훈련만 받으면 원숭이도 할 수 있는 일이잖아.....” (P147)
그저 그녀는 나와 마찬가지로 왕복표에 매달리는 것 외에는 달리 재주가 없는 어리석은 여자였을 뿐이다. 그러나 같은 왕복표라도 출발지가 다르면 목적지도 자연히 다른 법이다. 내게는 돌아오는 표인 것이 상대방에게는 가는 표일지라도, 딱히 이상할 것은 없다.
가령 여자가 무슨 착각을 했다 해도, 그래 봐야 착각은 착각에 지나지 않는다.
...... 아래를 보면 안 된다, 아래를 보면 안 된다!
등산가든 빌딩 청소부든 텔레비전 송신탑의 전기공이든 공중그네를 타는 곡예사든 발전소의 굴뚝 청소부든, 아래에 신경을 쓰면 그때가 바로 파멸의 순간이다. (P165)
가라앉는다.... 가라앉는다.... 이제 곧 허리뼈를 넘을 것이다.... 대체 어쩌면 좋단 말인가! .... 접촉면을 넓히면 그만큼 면적당 체중이 가벼워져 다소나마 침하를 막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양팔을 벌리고 몸을 푹 숙인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엎드린다고 해봐야 하반신은 수직으로 고정되어 있다. 안 그래도 지친 허리를 언제까지고 수직으로 지탱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웬만큼 숙련된 곡예사가 아닌 한 이런 자세로 있기에는 한계가 있다.
왜 이렇게 어둡단 말인가.... 이미 온 세상이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있다..... 이미 나는 죽어가고 있는데, 아무도 돌아보지조차 않는다! 목구멍 속에서 푸르르 떨고 있던 공포가 갑자기 터져나왔다. 남자는 입을 쩍 벌리고, 짐승처럼 외친다.
“살려줘!”
늘 정해져 있는 말! ..... 아무렴 어떠랴.... 다 죽어가는 판에 개성 따위가 무슨 소용이 있나. 판으로 찍어낸 싸구려 과자 신세라도 좋으니, 아무튼 살고 싶다! ...... 이제 곧 가슴까지 묻히고, 턱까지 묻히고, 코밑까지 빠지면.... 그만! 이제 그만!
“제발 살려줘! ..... 무슨 일이든 약속하겠어! ..... 제발 부탁이니까 살려줘! .... 살려달라고!”
끝내 남자는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P192)
“무슨 상관이에요. 그런, 남의 일이야 어떻게 되든!”
남자는 주춤하였다. 마치 얼굴을 바꿔 낀 듯한 변모였다. 여자를 통해 드러난 부락의 얼굴인 듯하였다. 지금까지 부락은 일방적인 형 집행자였다. 아니면 의지가 없는 육식 식물이거나, 탐욕스런 말미잘이었다. 그는 어쩌다 거기에 걸려든 가엾은 희생자에 지나지 않았을 터였다. 그런데 부락 쪽에서 보면, 오히려 버림받은 것은 자기들이란 얘기가 된다. 따라서 바깥 세상에 의리를 지켜야 할 이유 따윈 없다. 더구나 그 역시 가해자들 중 한 사람이고 보면, 드러난 송곳니가 그를 향하고 있었다는 얘기도 된다. 남자는 자기와 부락의 관계를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어색한 낭패감을 보이고 만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렇다고 지금 물러서면 자신의 정당성을 스스로 방기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P211)
“뭐 좀, 기분 전환이라도 해야지. 살풍경해서 어디 견딜수가 있겠어....”
당황한 목소리로 여자가 겨우 대답한다.
“소나무가 좋을까요?”
“소나무? ..... 소나무는 싫어..... 소나무만 아니면, 뭐든 좋아, 잡초라도 상관없고..... 곶 쪽에는 들풀도 꽤 많이 나 있는 것 같던데, 그게 무슨 풀이지?”
“갯방풍이거나 갯방동사니겠죠. 하지만 역시 나무가 좋지 않을까요?”
“나무? 나무라면 단풍나무나 오동나무처럼 가지가 가늘고 잎이 넓적한 게 좋겠는데..... 바람에 잎이 팔랑팔랑 흔들리는 그런 나무.....”
잎이 팔랑팔랑 흔들리는 나무.... 도망치고 싶어도, 뿌리와 연결되어 있어 도망치지도 못하고 팔랑팔랑 몸부림치는 잎사귀의 무리....
기분과는 관계없이 호흡이 거칠어진다. 아무래도 울음이 터져나올 듯한 느낌이었다. (P213)
만약 이 실험에 성공하면 물 때문에 허리를 굽혀야 할 일도 없어진다. 아니 이 모래 전체가 펌프인 셈이다. 빨펌프 위에 앉아 있는 것이나 다름없는 셈이다. 남자는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 숨을 들이쉬고 잠시 꼼짝않고 있어야 할 정도였다. 물론 아직은 아무에게도 말할 필요가 없다. 언젠가를 위한 소중한 무기니까.
그런데도 웃음이 자연히 배어나온다. <희망>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킬 수 있겠지만, 들떠 있는 마음을 감추기는 역시 어려웠다. 남자는 괴성을 지르면서 잠자리를 살피고 있는 여자의 허리를 뒤에서 껴안았다. 여자가 뿌리치자 벌렁 나자빠져 다리를 퍼덕거리면서 웃는다. (P222)
11월 초, 하루에 4리터를 기록한 것을 마지막으로 그 다음에는 날마다 하강선을 그렸다. 아무래도 기온 탓인 듯했다. 본격적인 실험을 위해서는 봄을 기다려야 할 것 같았다. 마침내 모래와 함께 얼음 조각이 날아다니는 길고 혹독한 겨울이 찾아왔다. 그 사이에 조금이라도 고급스런 라디오를 살 수 있도록 여자의 부업을 열심히 거들기로 했다. 구멍 속은 바람이 불지 않는다는 장점은 있어도 거의 하루 종일 햇볕이 들지 않아, 지내기 수월한 환경은 절대로 아니었다. 모래가 얼어붙는 날에도 날아다니는 모래의 양은 조금도 줄지 않아, 모래를 퍼내는 일도 손을 놓아서는 안 된다. 몇 번이나 손등이 트고 갈라져 피가 흘렀다.
그럼에도 그럭저럭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왔다. 3월 초에 드디어 라디오를 사 지붕 위에 높은 안테나를 세웠다. 여자는 행복과 감동에 젖어, 반나절 내내 다이얼을 좌우로 돌렸다. 그 달 말에 여자가 임신을 하였다. (P225)
하얗고 커다란 새가 사흘에 걸쳐 서쪽에서 동쪽으로 날아간 다음날, 갑자기 여자가 하반신을 피로 물들이며 격통을 호소하였다. 친척 중에 수의사가 있다는 부락 사람 누군가가, 자궁 외 임신이라는 진단을 내렷다. 여자를 삼륜차에 태워 마을 병원에 데리고 가기로 하였다. 부락 사람들이 올 때까지 남자는 여자 곁에서 한쪽 손은 여자에게 맡기고, 한쪽 손으로는 허리 부근을 계속 쓰다듬어 주었다.
마침내 삼륜차가 벼랑 위에 멈췄다.
반년 만에 새끼줄 사다리가 내려졌다. 여자를 번데기처럼 이불에 둘둘 말아 로프에 묶어 올려보냈다. 여자는 시선이 닿지 않을 때까지, 눈물과 눈곱으로 거의 보이지도 않는 눈으로 애원하듯 남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는 안 보는 척, 눈길을 돌렸다.
여자를 데리고 간 후에도 새끼줄 사다리는 여전히 매달려 있었다. 남자는 조심조심 손을 뻗어, 살짝 손가락 끝으로 만져본다. 끌어올려지지 않음을 확인하고서, 천천히 오르기 시작한다. 바다는 누렇고 탁했다. 심호흡을 해보았지만, 꺼끌거리기만 할 뿐 기대한 맛은 나지 않았다. 돌아보니 부락 어귀에 모래먼지가 일고 있다. 여자를 태운 삼륜차겠지..... 아 참, 헤어지기 전에 덫의 정체만이라도 가르쳐줄 것을 그랬다.
구멍 속에서 무언가가 움직였다. 자신의 그림자였다. 그림자 바로 옆에 유수 장치가 있고, 나무틀 한쪽이 비틀어져 있었다. (P226)
물은 계산상 예정되어 있는 대로 4까지 고여 있었다. 대수로운 고장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집 안에서는 카랑카랑한 소리로 라디오가 노래를 부르고 있다. 터져나오려는 울음을 겨우겨우 참으면서 통의 물에 손을 담갔다. 물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대로 웅크리고 앉아, 꼼짝도 하지 않는다.
딱히 서둘러 도망칠 필요는 없다. 지금, 그의 손에 쥐어져 있는 왕복표는 목적지도 돌아갈 곳도, 본인이 마음대로 써넣을 수 있는 공백이다. 그리고 그의 마음은 유수 장치에 대해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은 욕망으로 터질 듯하다. 털어놓는다면, 이 부락 사람들만큼 좋은 청중은 없다. 오늘이 아니면, 아마 내일, 남자는 누군가를 붙들고 털어놓고 있을 것이다.
도주 수단은, 그 다음날 생각해도 무방하다. (P227)
사막에는, 또는 사막적인 것에는 늘 뭐라 말할 수 없는 매력이 있다. 일본에 없는 것에 대한 동경이랄 수도 있겠지만, 나는 거의 사막과도 같은 만주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어렸을 적 보고 자란 풍경을 그리는 노스탤지어라고 설명할 수도 있겠으나, 내 기억으로는 그렇게 사막적인 풍토에 에워싸여 있으면서도 사막을 동경했던 것 같다. 하늘이 암갈색으로 물들고 흙먼지가 풀풀 일어 숨이 막힐 것 같은 날, 바짝 마른 눈두덩 속으로 닦아도 닦아도 없어지지 않는 모래가 파고든다. 그 짜증스러운 기분의 이면에는 불쾌함이 아니라 일종의 들뜬 기대감이 담겨 있었다.
--아베 코보, <사막의 사상> 중에서 (P238)
한때 늘 이런 꿈을 꿨었다.
그 꿈은 나의 일상과는 아무 관련 없이 이미지로서만 홀로 살아 있었다. 그리고 꿈을 해석하는 나의 언어 앞에는 항상 <절대적>이란 수식어가 붙어 다녔다. 절대적인 고독, 절대적인 공포, 절대적인 사랑, 절대적인 단절, 절대적인 절망, 절대적인 폭력 등.
꿈이 잊혀지고도 한참이나 지난 훗날, <듄>이란 영화에서 비슷한 장면을 보고는 경악했다. 잊고 있었던 꿈이 환기되고, 모래의 이미지가 갖고 있는 <절대성>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인용문에서처럼 모래가 안고 있는 <뭐라 말할 수 없는 매력>이며 모래에 품는 <들뜬 기대감>은 바로 이 절대성에로의 인도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였다.
--옮긴이의 말 (P2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