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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용헌 May 03. 2024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 실격>

영화 <인간 실격>  2019년

영화 <인간 실격>(2009)


다자이 오사무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2009년 5월 아라토 겐지로 감독이 실사 영화화를 발표했다. 크랭크인은 동년 7월. 2010년 2월 20일 일본 내 전국 주요 영화관에서 개봉되었다. 이후 동명의 영화 인간 실격(No Longer Human, 人間失格, 2019) 이 2019년 니나가와 미카 감독을 통해 만들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인간실격(2019)은 소설에 관한 내용이 아니라 다자이 오사무의 일생에 관한 내용이다.    

 

나는 그 사나이의 사진을 석 장 본 적이 있다.

한 장은 그 사나이의 유년 시절이라고나 해야 할까. 열 살 전후로 추정되는 때의 사진인데, 굵은 줄무늬 바지를 입은 아이가 여러 여자들에게 둘러싸여(그 아이의 누나들, 누이동생들, 그리고 사촌 동생들로 생각된다.) 정원 연못가에 서서 고개를 왼쪽으로 삼십 도쯤 갸우뚱 기울이고 보기 흉하게 웃고 있다. 보기 흉하게? 그렇지만 둔감한(미추 따위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면 그냥 지나가는 말로 “귀여운 도련님이군요.” 라고 적당히 사탕발림을 해도 그것이 괜한 공치사로는 들리지 않을 만큼은, 말하자면 통속적인 ‘귀염성’ 같은 것이 그 아이의 웃는 얼굴에 없다는 것은 아니다.             (P9)    

 

두 번째 사진 속의 얼굴. 이건 또 깜짝 놀랄 만큼 변해 있다. 교복 차림이다. 고교 시절 사진인지 대학 시절 사진인지는 분명치 않지만 어쨌든 대단한 미남이다. 그러나 이것 또한 이상하게도 사람이라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 교복 왼쪽 가슴에 있는 주머니에는 하얀 손수건을 꽂고 등의자에 걸터앉아 다리를 꼬고, 그리고 이번에도 역시 웃고 있다. 이번 미소는 주름투성이의 원숭이 웃음이 아니라 꽤 능란한 미소가 되어 있지만, 그러나 인간의 웃음이라고 하기에는 어딘지 걸린다. 피의 무게랄까 생명의 깊은 맛이랄까. 그런 충실감이 전혀 없는, 새처럼 가벼운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깃털처럼 가벼운, 그냥 하얀 종이 한 장처럼 그렇게 웃고 있다.       (P10-11)  

   

또 다른 한 장의 사진이 가장 기괴하다. 이제는 나이를 짐작할 수도 없을 정도다. 머리는 희끗희끗하다. 그런 남자가 몹시 더러운 방(방 벽이 세 군데 정도 허물어져 내린 것이 그 사진에 뚜렷하게 찍혀 있었다.) 한쪽 구석에서 작은 화로에 양손을 쪼이고 있는데, 이번에는 웃고 있지 않다. 아무런 표정이 없다. 말하자면 쭈그리고 앉아 화로에 양손을 쪼이다가 그냥 그대로 죽어간 것 같은, 정말로 기분 나쁘고 불길한 냄새를 풍기는 사진이다. 이상한 것은 그뿐이 아니다. 그 사진에는 얼굴이 비교적 크게 찍혀 있어서 그 생김새를 자세히 살펴볼 수가 있었는데 이마도 평범, 이마의 주름도 평범, 눈썹도 평범, 눈도 평범, 코도 입도 턱도..... 아아, 그 얼굴에는 표정이 없을 뿐만 아니라 인상조차 없다. 특징이 없는 것이다.          (P11)     


부끄럼 많은 생애를 보냈습니다.

저는 인간의 삶이라는 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저는 동북 지방의 시골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꽤 자란 다음에야 기차를 처음 보았습니다. 정거장에 있는 육교를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면서도 그것이 선로를 건너기 위해서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전혀 생각 못하고 다만 그것이 정거장 구내를 외국의 놀이터처럼 복잡하고 즐겁고 세련되게 만들기 위해서 설치된 것이라고만 믿었습니다.              (P13)     


즉 저에게는 ‘인간이 목숨을 부지한다.’라는 말의 의미가 지금껏 전혀 이해되지 않았다는 얘기가 될 것 같습니다. 제가 가진 행복이라는 개념과 이 세상 사람들의 행복이라는 개념이 전혀 다를지도 모른다는 불안. 저는 그 불안 때문에 밤이면 밤마다 전전하고 신음하고, 거의 발광할 뻔한 적도 있었습니다. 저는 과연 행복한 걸까요? 저는 어릴 때부터 정말이지 자주 참 행운아다, 라는 말을 들어왔습니다. 하지만 저 자신은 언제나 지옥 가운데서 사는 느낌이었고, 오히려 저더러 행복하다고 하는 사람들 쪽이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훨씬 더 안락해 보였습니다. 

나한테는 재난 덩어리가 열 개 있는데, 그중 한 개라도 이웃 사람이 짊어지게 되면 그것만으로도 그 사람에게는 충분히 치명타가 되지 않을까, 라고 생각한 일도 있습니다. 

즉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웃 사람들의 괴로움의 성질과 정도라는 것이 전혀 짐작이 가지 않았던 것입니다.                  (P16)     

그런 것치고는 자살도 하지 않고 미치지도 않고 정치를 논하며 절망도 하지 않고 좌절하지도 않고 살기 위한 투쟁을 잘도 계속하고 있다. 괴롭지 않은 게 아닐까? 철저한 이기주의자가 되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고 확신하고 한번도 자기 자신에게 회의를 느낀 적이 없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편하겠지. 하긴 인간이란 전부 다 그런 거고 또 그러면 만점인 게 아닐까. 모르겠다..... 밤에는 푹 자고 아침에는 상쾌할까? 어떤 꿈을 꿀까? 길을 걸으면서 무얼 생각할까? 돈? 설마 그것만은 아니겠지. 인간은 먹기 위해 산다는 말은 들은 적이 있지만 돈 때문에 산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어. 아닐 거야. 그러나 어쩌면..... 아니, 그것도 알 수 없지....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익살이었습니다.

생각하면 할수록 사람이란 것이 알 수가 없어졌고, 저 혼자 별난 놈인 것 같은 불안과 공포가 엄습할 뿐이었습니다. 저는 이웃 사람하고 거의 대화를 못 나눕니다. 무엇을 어떻게 말하면 좋을지 몰랐던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에 대한 저의 최후의 구애였습니다. 저는 인간을 극도로 두려워하면서도 아무래도 인간을 단념할 수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해서 저는 익살이라는 가는 실로 간신히 인간과 연결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P17)     


저는 어렸을 때부터 제 가족에 대해서조차도 그들이 얼마나 힘들어하고 또 무엇을 생각하며 살고 있는지 전혀 짐작할 수가 없었고, 그저 두렵고 거북해서 그 어색함을 못이긴 나머지 일찍부터 숙달된 익살꾼이 되어 있었습니다. 즉 저는 어느 틈에 단 한마디도 진실을 이야기하지 않는 아이가 되어버렸던 것입니다.

그 당시 가족과 함께 찍은 사진 따위를 보면 다른 사람들은 모두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는데 저 혼자 언제나 기묘하게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웃고 있습니다. 그것 또한 제 어린 소견의 서글픈 익살의 일종이었던 것입니다.

또 저는 가족한테 꾸중을 듣고 말대꾸한 적이 한번도 없습니다. 그 사소한 꾸중은 저에게는 청천벽력과도 같아 저를 미칠 지경에 이르게 했기 때문에 말대꾸는커녕 그 꾸중이야말로 말하자면 만세일계(万世一系), 즉 고대로부터 단일 계통을 이어온 일본인의 ‘진리’임에 틀림없다. 나한테는 그 진리를 행할 능력이 없으니까 더 이상 인간과 더불어 살 수 없는 게 아닐까, 라고 확신해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말싸움도 자기변명도 하지 못했습니다. 남이 저에게 욕을 하면 그래 정말이야. 내가 엄청 잘못 생각하고 있었어, 그렇게 생각되어서 언제나 그 공격을 잠자코 받아들이고 속으로는 미칠 듯한 공포를 느꼈던 것입니다.         (P18)  

   

예컨대 소가 풀밭에서 느긋하게 잠자고 있다가 갑자기 꼬리로 배에 앉은 쇠등에를 탁 쳐서 죽이듯이, 갑자기 무시무시한 정체를 노여움이라는 형태로 드러내는 모습을 보면 저는 언제나 머리털이 곤두서는 듯한 공포를 느꼈습니다. 이 본성 또한 인간이 되는 데 필요한 자격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저 자신에 대한 절망감에 휩싸이곤 했습니다.

늘 인간에 대한 공포에 떨고 전율하고 또 인간으로서의 제 언동에 전혀 자신을 갖지 못하고 자신의 고뇌는 가슴속 깊은 곳에 있는 작은 상자에 담아두고 그 우울함과 긴장감을 숨기고 또 숨긴 채 그저 천진난만한 낙천가인 척 가장하면서, 저는 익살스럽고 약간은 별난 아이로 점차 완성되어 갔습니다.

뭐든 상관없으니까 웃게만 만들면 된다. 그러면 인간들은 그들이 말하는 소위 ‘삶’이라는 것 밖에 내가 있어도 그다지 신경 쓰지 않을지도 몰라. 어쨌든 인간들의 눈에 거슬려서는 안 돼. 나는 무(無)야. 바람이야. 텅 비었어. 그런 생각만이 강해져서 저는 익살로 가족을 웃겼고, 또 가족보다 더 불가사의하고 무시무시한 머슴이랑 하녀들한테까지도 필사적으로 익살 서비스를 했던 것입니다.           (P19)     

저는 매달 신간 소년 잡지를 열 권도 넘게 구독하고 있었고 또 그 밖에도 여러 가지 책을 도쿄에서 주문해서 묵묵히 읽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 인기 있던 연재물인 엉망진창 박사라느니 또 무슨 무슨 박사라느니 하는 존재와는 무척 친숙했습니다. 또 괴기담, 무사담, 만담, 에도 이야기 따위도 많이 알고 있었기 때문에 우스꽝스러운 이야기를 진지한 얼굴로 해서 집안사람들을 웃기는 데 소재가 부족했던 적은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아아, 학교!

저는 학교에서 존경을 받을 뻔했습니다. 존경받는다는 개념 또한 저를 몹시 두렵게 했습니다. 거의 완벽하게 사람들을 속이다가 전지전능한 어떤 사람한테 간파당하여 산산조각이 나고 죽기보다 더한 창피를 당하게 되는 것이 ‘존경받는다’는 상태에 대한 제 정의였습니다. 인간을 속여서 ‘존경받는다’해도 누군가 한 사람은 알고 있다. 그리고 인간들도 그 사람한테서 듣고 차차 속은 것을 알아차리게 되었을 때, 그때 인간들의 노여움이며 복수는 정말이지 도대체 어떤 것일까요. 상상만 해도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것이었습니다.             (P23-24)     


이제는 내 정체를 완벽하게 은폐할 수 있나 보다 하고 마음을 놓으려던 참에 저는 실로 불의에 등 뒤에서 칼을 맞았습니다. 그것은 등 뒤에서 남을 찌르는 사나이의 예에 어긋나지 않게 반에서 가장 빈약한 몸집에 얼굴도 시퍼렇고, 아버지나 형한테 물려받은 것이 분명하고 소매가 쇼토쿠 태자의 옷처럼 긴 윗도리를 입은, 공부는 전혀 못하고 교련이나 체육 시간에는 언제나 견학을 하는 백치 비슷한 학생이었습니다. 저조차도 미처 그 학생까지 경계할 필요성은 못 느끼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날 체육 시간에 그 학생(성은 기억 못합니다만, 이름은 다케이치였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다케이치는 여느 때와 같이 견학하고 있었고 저희들은 철봉 연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일부러 될 수 있는 대로 엄숙한 얼굴로 철봉을 향해 에잇 하고 소리를 지르며 달려가서는 그대로 멀리뛰기 하는 것처럼 앞으로 날아가 모래밭에 쿵 엉덩방아를 찧었습니다. 모두 계획적인 실패였습니다. 예상했던 대로 모두 폭소를 터뜨렸고 저도 쓴웃음을 지으면서 일어나 바지에 묻은 모래를 털고 있으려니까 언제 왔는지 다케이치가 제 등을 찌르면서 낮은 목소리로 이렇게 속삭였습니다.

“부러 그랬지?”
 세상이 뒤집히는 것 같았습니다.                 (P31) 

    

그때부터 계속된 나날의 불안과 공포.

겉으로는 여전히 서글픈 익살을 연기해서 모두를 웃기면서도 문득 자기도 모르게 괴로운 한숨이 나왔습니다. 무슨 짓을 하든 모두 다케이치가 낱낱이 간파하고 있다. 그리고 그 녀석이 이제 곧 아무한테나 이 얘기를 퍼뜨리고 다닐게 틀림없다고 생각하면 이마에 축축하게 진땀이 솟았고, 미치광이 같은 묘한 눈초리로 희번덕거리며 공연히 주변을 둘러보게 되었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아침, 낮, 밤, 스물 네 시간 꼬박 다케이치 곁에서 떨어지지 않고 그가 비밀을 퍼뜨리지 못하게 감시하고 싶었습니다. 그한테 들러붙어 있는 동안 내 익살이 ‘일부러 하는 행동’이 아니라 진짜라고 믿게끔 할 수 있는 노력이란 노력을 다하고, 잘만 된다면 녀석하고 다시없는 친구가 돼버리고 싶다. 만일 이도저도 다 불가능하다면 그때는 그의 죽음을 빌 수밖에 없다, 라고까지 외곬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를 죽이려는 마음만은 안 일어났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남이 저를 죽여줬으면 하고 바란 적은 여러 번 있었지만 남을 죽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한번도 없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상대방을 행복하게 만드는 일일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P32) 

    

호리키는 또 그 최신 유행을 좇는 허세에서(호리키의 경우, 저는 지금도 그 외의 이유는 떠올릴 수가 없습니다.) 어느 날 저를 공산주의 독서회라든가 하는(R.S.라고 했던 것 같은데 기억이 분명치 않습니다.) 그런 비밀 연구회에 데리고 갔습니다. 호리키 같은 인물에게는 공산주의 비밀 모임도 예의 ‘도쿄 안내’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았는지도 모릅니다. 저는 소위 ‘동지들’한테 소개되었고, 팸플릿을 몇 개 사게 되었고, 그리고 상석에 있던 퍽 못생긴 청년한테서 마르크스 경제학에 대한 강의를 들었습니다.                 (P49-50)    

 

비합법. 저는 그것을 어렴풋하게나마 즐겼던 것입니다. 오히려 마음이 편했던 것입니다. 이 세상의 합법이라는 것이 오히려 두려웠고(그것에서는 한없는 강인함이 느껴졌습니다.) 그 구조가 불가해해서, 도저히 창문도 없고 뼛속까지 냉기가 스며드는 그 방에 앉아 있을 수가 없어서 바깥이 비합법의 바다라 해도 거기에 뛰어들어 헤엄치다 죽음에 이르는 편이 저한테는 오히려 마음이 편했던 것 같습니다.

‘음지의 사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인간 세상에서는 비참한 패자, 또는 악덕한 자를 지칭하는 말 같습니다만, 저는 태어날 때부터 음지의 존재였던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이 세상에서 떳떳하지 못한 놈으로 손가락질당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언제나 다정한 마음이 되곤 했습니다. 그리고 저의 그 ‘다정한 마음’은 저 자신도 황홀해질 정도로 정다운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P51)     


그날 밤 저희는 가마쿠라의 바다에 뛰어들었습니다. 여자는 이 허리띠는 가게 친구한테 빌린 거니까 하면서 허리띠를 풀어서는 개어서 바위 위에 올려놓았고, 저도 망토를 벗어서 같은 곳에 놓아두고 함께 물속으로 뛰어들었습니다.

여자는 죽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살아남았습니다.

제가 고등학생이기도 했고 또 아버지 이름도 얼마간은 소위 뉴스 가치라는 것이 있었는지, 신문에서도 꽤 크게 다루었나 봅니다.

저는 해변에 있는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는데 고향에서 친척 중 한 사람이 와서 이런저런 뒤처리를 해주었습니다. 그는 고향에서 아버지를 비롯한 온 집안 식구가 격노하고 있으니 이젠 생가로부터 의절당할지도 모른다고 저한테 말하고는 돌아갔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그런 것보다도 죽은 쓰네코가 그리워서 훌쩍훌쩍 울고만 있었습니다. 정말로 그때까지 만났던 숱한 사람들 중에 그 궁상맞은 쓰네코만을 좋아했던 것이니까요.             (P68)     

노래하면서 시즈코가 옷을 벗겨주면 시즈코 가슴에 이마를 갖다 대고 잠드는 것이 저의 일상생활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그 다음 날도 같은 일을 되풀이하고, 

어제와 똑같은 관례를 따르면 된다.

즉 거칠고 큰 기쁨을 피하기만 한다면,

자연히 큰 슬픔 또한 찾아오지 않는다.

앞길을 막는 방해꾼 돌을

두꺼비는 돌아서 지나간다.

우에다 빈 번역의 기 샤를 크로인가 하는 사람의 이런 시구를 발견했을 때 저는 혼자 얼굴에서 불이 나는 것처럼 뻘게졌습니다.

두꺼비.

그게 나야. 세상이 용납할 것도 용납하지 않을 것도 없지. 매장이고 뭐고 할 것도 없어. 나는 개보다도 고양이보다도 열등한 동물인 거야. 두꺼비. 느릿느릿 꾸물거리기만 하는 두꺼비.               (P95)    

 

“아니, 정말이야, 정말 마셨다고. 취한 척하는 게 아니야.”

“놀리지 마세요. 못됐어.”

전혀 의심하려고도 않는 것이었습니다.

“보면 알 텐데 말이야. 오늘도 대낮부터 마셨어. 용서해 줘.”

“연기도 잘 하시네.”

“연기가 아니라니까, 바보. 키스할 테야.”

“해봐요.”

“아니야. 내게는 자격이 없어. 각시가 되어달라던 것도 단념하는 수밖에. 얼굴을 봐, 빨갛지? 정말로 마셨다니까.”

“그야 석양이 비치니까 그렇죠. 날 속이려 해도 안 될걸요? 어제 약속했는데 마실 리가 없잖아요? 손가락 걸고 약속한걸요. 술을 마셨다니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어두컴컴한 가게 안에 앉아서 미소 짓고 있는 요시코의 하얀 얼굴. 아아, 더러움을 모르는 처녀성의 숭고함. 나는 여태껏 나보다 어린 처녀랑 자본 적이 없다. 결혼하자. 그 때문에 나중에 아무리 큰 비애가 닥친다 해도 상관없다. 난폭할 만큼 큰 기쁨이 평생에 단 한 번이라도 상관없다. 처녀의 아름다움이라는 건 바보 같은 시인들의 달콤하고 감상적인 환영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 세상에 정말로 존재하는 것이었구나. 결혼해서 봄이 되면 둘이서 자전거 타고 아오바 폭포를 보러 가야지 하고 그 자리에서 결심하고, 소위 ‘단칼 승부’로 처녀성이라는 요시코의 꽃을 훔치는 데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P105)   

  

용서할 것도, 용서받을 것도 없었습니다. 요시코는 신뢰의 천재니까요. 남을 의심할 줄이라곤 몰랐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로 인한 비극.

신에게 묻겠습니다. 신뢰는 죄인가요?

요시코가 더럽혀졌다는 사실보다도 요시코의 신뢰가 더럽혀졌다는 사실이 그 뒤에도 오래오래, 저한테는 살아갈수 없을 만큼 큰 고뇌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저처럼 비루하게 쭈뼛쭈뼛 남의 안색만 살피고 남을 믿는 능력에 금이 가버린 자에게 요시코의 순결무구한 신뢰심은 그야말로 아오바 폭포처럼 상큼하게 느껴졌던 것입니다. 그것이 하룻밤 사이에 누런 오수로 변해 버렸습니다. 보세요, 요시코는 그날 밤부터 제 일비일소에조차 신경을 쓰게 되었습니다.       (P117)     


그렇지만 저는 그러고 나서 금방 그 수줍은 듯한 미소를 띤 젊은 의사의 안내를 받아 어떤 병동에 수용되었고, 철꺽 하고 열쇠가 잠겼습니다. 정신 병원이었던 것입니다.

여자가 없는 곳으로 가겠다는, 디알을 먹었을 때 제가 했던 바보 같은 헛소리가 정말이지 기묘하게 실현된 셈입니다. 그 병동에는 남자 미치광이뿐이어서 간호사도 남자였고 여자라곤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이젠 저는 죄인은커녕 미치광이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아니요, 저는 결코 미치지 않았습니다. 단 한순간도 미친 적은 없었습니다. 아아, 그렇지만 광인들은 대개 그렇게들 말한다고 합니다. 즉 이 병원에 들어온 자는 미친 자, 들어오지 않은 자는 정상이라는 얘기가 되는 것이지요.

신에게 묻겠습니다. 무저항은 죄입니까?

호리키의 그 이상하고도 아름다운 미소에 저는 울었고, 판단하는 것도 저항하는 것도 잊어버렸고, 자동차를 탔고, 여기에 끌려와서 정신 이상자가 되었습니다. 이제 여기에서 나가도 저는 여전히 광인, 아니 폐인이라는 낙인이 이마에 찍혀 있겠죠.

인간 실격.

이제 저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P131)   

  

진정한 폐인.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알고 난 뒤 저는 점점 더 얼간이가 되어갔습니다. 아버님이 이젠 안 계신다. 내 마음에서 한순간도 떨어지지 않았던 그 그립고도 무서운 존재가 이젠 안 계시다. 제 고뇌의 항아리가 텅 빈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제 고뇌의 항아리가 공연히 무거웠던 것은 아버지 탓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조차 들었습니다. 모든 의욕을 상실했습니다. 고뇌할 능력조차도 상실했습니다.                (P132)  

   

아뢰옵니다. 아뢰옵니다. 나리. 그 사람은 너무해. 못됐어. 네, 불쾌한 놈입니다. 나쁜 사람입니다. 아아, 참을 수 없어. 살려둘 수 없다고.

네, 네. 마음을 가라앉히고 말씀 올리겠습니다. 그 사람을 살려두어서는 안 됩니다. 그 사람은 이 세상의 적입니다. 네,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다 말씀 올리겠습니다. 저는 그 사람이 있는 곳을 압니다. 지금이라도 당장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갈기갈기 찢어발겨서 죽여주세요. 그 사람은 제 스승입니다. 주인입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저랑 동갑입니다. 서른셋입니다. 저는 그 사람보다 겨우 두 달 늦게 태어났을 뿐입니다. 대단한 차이가 있을 턱이 없어. 사람과 사람 사이에 그렇게 큰 차이가 있을 리 없지. 그런데도 나는 여태껏 그 사람에게 얼마나 혹사당해 왔는지, 얼마나 조롱당해 왔는지. 아아, 이젠 지겨워. 참을 수 있는 데까지 참았어. 화날 때 화를 내지 못한다면 사람으로 태어난 보람이 없지. 제가 지금까지 그 사람을 얼마나 남몰래 감싸줬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 사람 자신도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니야. 그 사람은 알고 있어.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기 때문에 그 사람은 오히려 나를 더 심술 사납게 깔보는 거라고. 그 사람은 오만해. 나한테 큰 신세를 지고 있는 것이 분한 거야. 그 사람은 바보처럼 자부심이 강해. 나 따위한테 신세 지고 있다는 게 무슨 굉장한 약점이라도 되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는 겁니다. 그 사람은 뭐든지 자기 혼자 할 수 있는 것처럼 남한테 보이고 싶은 거야. 웃기는 얘기지. 세상이란 그런 게 아니라고. 이 세상을 살아나가려면 누군가에게는 어쩔 수 없이 굽실굽실 고개를 숙이지 않으면 안 되고, 한 발짝 한 발짝 남을 짓밟고 가는 것 밖에 다른 방법이 없는 거라고. 그분이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겠어요? 아무것도 못한다고요. 내가 보기엔 풋내기야. 제가 없었다면 그 사람은 이미 오래전에 저 무능하고 바보 천치 같은 제자들과 함께 어딘가의 들판에서 객사했을 게 틀림없습니다. “여우에게는 굴이 있고 새에게는 둥지가 있다. 그러나 사람의 자식에게는 잠잘 곳이 없다.” 그래그래, 바로 그거라고. 정확하게 자백하고 있잖아요?           (P141-142)    

    

당신이 할 수 있는 반항이라는 게 기껏해야 그런 겁니까. 비둘기 파는 사람의 의자를 걷어차는 일 정도입니까. 라고 나는 연민의 미소를 띠고 물어보고 싶기까지 했습니다. 이제 이분은 틀린 겁니다. 자포자기한 것입니다. 자중 자애(自重慈愛)라는 것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이제는 자기 힘으로는 더 이상 아무것도 못한다는 것을 그즈음 슬슬 깨닫기 시작해서, 허점이 너무 드러나기 전에 일부러 제사장이 자신을 체포하게 만들어서 이 세상을 하직하고 싶어진 것이겠지요. 그렇게 생각하자 확실하게 그분을 단념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렇게 젠체하는 도련님을 지금까지 외곬으로 사랑해 온 저 자신의 어리석음도 쉽게 비웃을 수가 있었습니다. 이윽고 그분은 성전에 모여든 수많은 백성들 앞에서 지금까지 했던 말씀 가운데서 가장 지독하고 오만하고 무례하기 짝이 없는 폭언을 마구잡이로 떠들어댔습니다. 그렇습니다. 분명히 자포자기한 것입니다. 저는 그 모습을 추레하다고까지 느꼈습니다. 죽고 싶어 좀이 쑤시는가 보군. “재앙이 있을지니, 위선자 바리새인들이여. 그대들은 술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안은 탐욕과 방종으로 가득 차 있나니. 재앙 있을지니, 위선자 바리새인들이여. 그대들은 하얗게 회칠한 무덤과 같나니. 외관은 아름다워 보여도 그 안은 죽은 자의 뼈와 갖가지 오물로 차 있나니. 그와 같이 너희도 외관은 올발라 보일지언정, 안은 위선과 불법으로 차 있나니. 뱀이여, 살무사의 후예여, 너희가 어떻게 게헨나의 형벌을 피할 수 있겠는가. 아아 예루살렘, 예루살렘, 예언자들을 죽이고 파송한 자들을 돌로 치는 자들이여. 암탉이 병아리를 제 날개 밑에 모으듯. 내가 그대들의 자녀들을 모으려 한 것이 몇 번인고. 그러나 그대들은 원치 아니하였나니.” 

바보 같은 얘깁니다. 웃기는 얘기죠. 그 말투를 흉내 내는 것조차도 꺼림칙합니다. 큰일 날 소리를 하는 사람이다. 그분은 미친 것입니다.                     (P153-154)   

     

저런, 그 돈은? 저에게 주시는 겁니까? 저, 저에게, 은 삼십 냥을, 아, 네, 과연, 하하하하. 아니에요. 사양하겠습니다. 제가 두들겨 패기 전에 그 돈을 집어넣으시지요. 돈이 탐이 나서 아뢰러 온 게 아닙니다. 집어넣으라니까!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받겠습니다. 그렇지. 나는 장사꾼이었지. 나는 아름답고 우아한 그분한테서 돈 때문에 늘 경멸받았지. 받겠습니다. 저야 뭐 천생 장사꾼이죠. 천시받는 돈으로 그분에게 멋지게 복수해 주겠습니다. 이런 게 저한테 가장 어울리는 복수의 수단이죠. 그것 보라고! 은 삼십 냥에 녀석은 팔린다. 나는 조금도 울지 않아. 나는 그분을 사랑하지 않아. 처음부터 티끌만큼도 사랑하지 않았어. 네, 나리. 저는 거짓말만 했습니다. 저는 돈이 탐이 나서 그분을 쫓아다녔던 것입니다. 오오, 그게 틀림없어. 그분이 저에게 돈을 조금치도 벌어주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오늘 밤 확실하게 깨달았기 때문에, 그거야 장사꾼이니까요. 재빨리 배반한 거죠. 돈, 이 세상은 돈이면 다지요. 은 삼십 냥, 이 얼마나 근사합니까. 받지요. 저는 째째한 장사꾼입니다. 예, 탐이 나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네, 네. 아, 미처 말씀 못 드렸군요. 제 이름은 장사꾼 유다. 헤헤, 가롯 유다입니다.                        (P161-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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