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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용헌 Apr 30. 2024

헤르만 코흐의 <디너>

영화 <더 디너>  2017년

<더 디너>(2014), <더 디너>(2013), <보통의 가족>(2022)

     

더 디너(The Dinner)는 미국에서 제작된 오렌 무버만 감독의 2017년 드라마, 미스터리, 스릴러 영화이다. 리차드 기어 등이 주연으로 출연하였고 칼데콧 첩 등이 제작에 참여하였다. 노숙자를 구타해 죽인 열다섯 살 소년. 만일 이 소년이 나의 아들이면 신고를 할까 말까? 자식의 폭력성의 뿌리는 부모였다.     

그런 고민을 할 때마다 내 옆에는 늘 끌레르가 있다. 특히 오늘 같은 저녁, 그녀는 이게 정상적인 저녁 약속이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끌레르는 나보다 현명하다. 진심도 아니면서 일부러 페미니스트인 척하려고 하는 말이 아니다. 여자한테 잘 보이려고 하는 말은 더더욱 아니다. 난 여자가 ‘대체로’ 남자보다 더 현명하다고 주장할 생각이 전혀 없다. 여자가 감수성이 더 풍부하고 더 직관적이라고 말할 생각도 없다. 뭐 그렇다고 해서 “여자가 인생을 훨씬 더 현실적으로 살아간다” 내지는 “어처구니없는 짓을 하는 건 여자가 아니라 감성적인 남자이다”라고 말하려는 것도 아니다. 

어쨌든 끌레르는 나보다 현명하다.               (P14)     


드디어 우리는 자리에 앉았다. 세르게는 대각선으로 내 맞은편 자리, 즉 끌레르 옆자리에 앉았고, 바베테는 내 옆자리에 앉았다. 바베테가 의자에 앉을 때 총지배인이 거들었다. 세르게의 시중은 검은색 비스트로 앞치마를 두를 여종업원이 맡았다. 

의자에 앉기 전에 세르게는 한 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로 홀 안을 휙 둘러보았다. 

“오늘의 하우스 아페리티프는 샴페인 로즈입니다.” 총지배인이 말했다.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정말로 아주 깊이. 여러 가지 의미가 담긴 눈빛으로 아내가 날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눈동자를 굴리지도 않았고, 느닷없이 잔기침을 하지도 않았으며, 테이블 밑으로 내 정강이뼈를 걷어차지도 않았다. 내가 허튼 짓거리를 하려들 때, 혹은 벌써 그런 일이 벌어졌을 때 아내가 보내는 경고의 신호는 그런 것들이 아니었다.             (P45)     

그게 진정 그들의 본심이었는지에 대해서는 판단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부르키나 파소에서 데려온 그 새카만 아이를 자신의 아이들과 차별 없이 사랑한 것은 훗날 세르게한테 커다란 명예를 가져다주었다. 기본적으로 입양은 와인과 마찬가지였다. 그를 장식해주는 기능을 수행했다. 세르게 로만, 아프리카 출신의 아이를 입양한 정치가.  

이제 그는 더 자주 가족사진을 찍었다, 이미지를 높이는 데 상당한 효과가 있었기 때문이다. 세르게와 바베테는 소파에 앉아 있고, 발치에는 세 아이가 나란히 앉는다. 베아우 로만은 세르게 로만이라는 정치인이 결코 이기주의자가 아니라는 것, 또한 평생에 적어도 한 번은 사리사욕에서 벗어난 행동을 했다는 것을 입증해 주는 살아 있는 증거였다. 게다가 다른 두 아이의 존재는 굳이 그가 부르키나 파소에서 아이를 입양할 필요가 없었다는 사실을 아주 자연스럽게 부각시켜 주었다. 그건 결국 그는 정치를 할 때도 사적인 이해관계만 쫓지는 않을 거라는 믿음으로 이어졌다.                     (P74-75)  

   

난 우리 테이블의 대화 내용이 너무 지겨워서 잠시 화장실에 온 참이었다. 휴가와 도르도뉴 이야기에 이어 우리는 인종차별에 대해 대화를 나눴다. 아내는 내 의견을 지지해 주었다. 다들 안 그런 척 시치미를 떼고 있지만 인종차별이라는 악행은 줄어들기는커녕 점점 더 강력하게 확산되고 있다는 게 내 주장이었다. 아내는 내 얼굴을 쳐다보지도 않고 무작정 내 편을 들었다. “난 전적으로 파울 생각에 동의해요, 파울의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그녀는 늘 그런 식으로 말을 시작했다. 자신도 전적으로 나와 같은 의견이며, 내 의견은 이러저러한 거라고 설명을 거드는 방식. 만약 아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왔다면, 아마 내가 의견을 조리 있게 설명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비난으로, 때로는 옹호나 격려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하지만 아내의 입에서 나온 “파울의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이라는 표현은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상대방이 내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의미였다. 남편이 분명하고 명료하게 알아들을 수 있도록 설명했는데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답답함의 표출이자 그녀의 인내심이 점차 사람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P94-95)     


“난 지금 발전에 대해 말하는 게 아니에요. 세르게.” 끌레르가 말했다. “난 우리가 -- 네덜란드 사람들, 백인 그리고 유럽인이 -- 다른 문화에 대해 갖고 있는 이미지에 대해서 말하는 거예요. 우리가 갖고 있는 두려움이요. 길을 걸어가다가 혹시 맞은편에서 흑인 일행이 다가오면, 게다가 그 사람들이 우리 같은 옷차림, 이를테면 외교관이나 사무원들 같은 단정한 옷차림이 아니라 야구모자에다가 에어쿠션이 달린 나이키 운동화를 신고 있으면 대부분 다른 길로 돌아가지 않나요?”

“난 절대 다른 길로 돌아가지 않아. 오히려 우리 모두 동등한 자격으로 만나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오. 지금 우리가 두려움을 갖고 있다고 했던가? 그건 끌레르 당신 말이 옳아. 하지만 두려워하는 걸 멈추면 서로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될 거요.”

“세르게. 난 지금 진보니 이해니 하는 공허한 개념들에 대해 논쟁을 벌이고 싶은 게 아니에요. 그러고픈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어요. 난 당신 동생의 아내에요. 지금 여긴 우리밖에 없어요. 친구이자 가족이죠. 그런데 이런 자리에서까지 꼭 그런 논쟁을 벌여야겠어요?”               (P97-98)  

   

“동성애자를 다룬 프로그램이었는데, 두 명의 동성애자가 사는 집 아래층의 어떤 여자를 인터뷰했어, 동성애자는 게이들이었는데, 가끔 그 이웃집 여자의 고양이를 돌봐 주곤 했지.” 인터뷰에서 여자는 이렇게 말했어. “정말 좋은 사람들이에요. 그 두 젊은이요!” 하지만 여자가 정말로 하고 싶은 말은 이거였어. “그 남자들은 게이예요. 하지만 내 고양이를 돌봐주는 걸 보니 나랑 별반 다르지 않네요.” 웅크리고 앉아 인터뷰를 하는 동안 이웃집 여자는 완전히 자기 말에 도취돼 있었지. 자기가 마음이 아주 넓고 관용적인 사람이라는 사실을 만천하에 알렸으니까. 위층의 두 젊은이는 비록 역겨운 짓거리를 하기는 하지만 정말로 아주 착한 사람들이었어. 여자는 사실 동성애를 자연의 섭리에 어긋나는 아주 불건전한 짓이라고 생각해. 한마디로 말해 변태들이나 하는 짓거리지. 그런데 자신의 고양이를 다정하게 보살펴 준다는 한 가지 사실만으로 그 모든 것을 잊어버린 거야.“ 잠시 말을 멈췄다. 바베테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세르게는 벌써 여러 번 눈썹을 찌푸렸다. 그리고 내 아내 끌레르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일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잘 알고 있을 때 나오는 표정이었다.  

“그 여자가 이웃집 젊은이들에 대해 한 말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다시 내가 말을 이었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기 때문이다. “상황을 이렇게 한 번 바꿔보면 돼. 진짜 마음씨 착한 그 두 명의 게이가 고양이한테 먹이를 주기는커녕 돌멩이를 던져 내쫓거나 독을 넣은 미끼를 발코니에 던져놓는 사람이었으면 과연 어땠을까? 그럼 아마 그들은 금세 다시 역겨운 게이가 됐을 거야. 끌레르가 <초대받지 않은 손님>을 예로 들어 말하려고 한 건 바로 그 점이었어. 친절한 시드니 포에티어 역시 착한 남자였다는 거. 그 영화의 감독은 방송에서 인터뷰를 한 여자랑 한 치도 다를 게 없어. 사실 시드니 포에티어는 일종의 본보기 기능을 한 거야. 그는 다른 불쾌한 흑인들, 도둑이나 조폭, 마약 운반책 같은 위험한 흑인들을 대신해 본보기로 이용당한 거지. 너희들도 시드니 포에티어처럼 멋진 양복을 차려입고 모범적인 사윗감처럼 행동하면 우리 백인들은 분명 니들을 품에 안아줄 거다, 뭐 이런 식으로 말이야.”            (P98-99)    

 

“우리가 정작 이야기를 나눠야 할 문제는 다른 거라는 거 너도 알지. 파울?” 그가 말했다. 

안 그래도 저녁 내내 그것 때문에 명치 끝에 돌멩이가 떡 하니 자리잡고 있는 것 같았는데, 그 말을 들으니 심장이 차갑게 얼어붙는 기분이었다. 

“우린 아이들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야 해.” 세르게 로만이 말했다.          (P106)    

 

“아빠?”

“미헬? 너 어디 있는 거야?”

“집이에요. 난..... 난..... 그런데 아빠는 지금 어디예요?”

“레스토랑이다. 우리가 너한테 그 얘기를 안 했나 보구나. 그런데 대체 어떻게.....”

‘대체 어떻게 내가 네 휴대폰을 갖고 있는 거지?’라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순간적으로 그건 좋은 질문이 아닐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왜 아빠가 내 휴대폰을 갖고 있어요?” 오히려 미헬이 나한테 그 질문을 던졌다.             (P126-127)     

사실 동영상 속의 역사가 어느 지하철역인지 난 금세 눈치챘다. 어디 구역에 있는 역인지, 어느 노선에 속하는지도. 다만 그걸 크게 떠벌이고 싶지 않을 뿐이다. 역 이름을 밝히는 건 아무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을 테니까.

땅바닥을 향한 카메라가 일정한 속도로 선로 위를 걸어가고 있는 흰색 운동화를 뒤따르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카메라 렌즈가 다시 위로 올라가면서 한 남자의 얼굴이 화면에 잡혔다. 늙수그레한 남자였다. 그런 사람들의 경우 나이를 알아맞히는 게 아주 힘들지만, 대충 60대 정도로 보였다. 하지만 운동화의 주인은 그 남자가 아니었다. 카메라가 더 가까이 다가가자 면도도 안 한, 땟자국이 얼룩덜룩한 얼굴을 알아볼 수 있었다. 거리를 떠돌며 사는 노숙자 같았다. 

갑자기 온몸에 한기가 느껴졌다. 아까 초저녁에 미헬의 방에서 느낀 것과 똑같은 한기였다. 

노숙자의 머리 옆으로 이번에는 릭의 얼굴이 화면에 잡혔다. 세르게의 아들이 카메라를 향해 씩 웃으며 외쳤다. “테이크 원. 액션!”

그런 다음 다짜고짜 노숙자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손바닥이 귀를 절반쯤 가렸다. 그런데 얼마나 격렬하게 따귀를 후려치던지 노숙자의 머리가 퍽퍽 옆으로 돌아갔다. 남자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조금이라도 방어하려는 듯 두 손으로 귀를 막았다. 

“이 거지새끼야. 꺼져버려. 꺼지란 말이야. 병신새끼야!” 릭이 소리 질렀다. 영어로 욕설을 퍼붓는 릭의 말투가 미국영화나 영국영화에 나오는 네덜란드 배우의 억양을 닮아 있었다. 

카메라가 더 가까이 다가가 면도를 하지 않은 노숙자의 얼굴만 아주 크게 클로즈업했다. 피가 철철 흘러내리는 눈을 껌뻑거리며 노숙자가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로 중얼거렸다. 

“뭐라고 말 좀 해봐, 이 거지새끼야.” 새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화면 밖에서 들리는 소리였다. 내 아들의 목소리라는 것을 금세 알아챘다. 

노숙자의 얼굴이 화면에서 사라지고 다시 릭의 얼굴이 잡혔다. 내 조카가 카메라를 보며 일부러 바보 같은 표정을 지었다. “집에서는 절대  흉내 내지 마세요.”라고 말하면서 손을 들어 올렸다. 다시 구타하기 위해서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맞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어디 씨불여 보라니까. 개새끼야.” 다시 미헬의 목소리였다. 

남자의 머리가 다시 화면에 잡혔다. 멀리 뒤에 보이던 다른 노숙자들의 모습이 화면에서 사라지고, 보이는 건 단지 회색의 선로뿐이었다. 그런데 바로 거기, 선로 위에 그 노숙자가 쓰러져 있었다. 두 눈을 감은 채 입술을 부르르 떨면서.

“개....... 새...... 끼.....” 노숙자가 말했다. 그 장면에서 동영상이 끝났다. 갑자기 정적이 시작되면서 소변기 벽을 타고 물 흘러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우린 아이들 문제에 관해 이야기를 나눠야 해.” 세르게가 그렇게 말했었다. 대체 시간이 얼마나 흐른 거지?                      (P134-136)     

하지만 CCTV 화면이 모든 걸 바꿔 버렸다. 비록 화질이 떨어지고 두 아이 모두 모자를 눈썹까지 푹 내려쓰고 있어 얼굴을 제대로 알아 볼 수 없었지만, 아이들의 얼굴이 -- 사건을 저지른 아이들의 얼굴이 -- 문제였다. 이제 시청자들은 사건을 완전히 다른 시각에서 보게 됐다. 아이들이 재미 삼아 그런 짓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무방비상태의 누군가에게, 즉 보이지 않는 희생자를 향해 아이들이 연속적으로 물건을 던진 뒤 -- 맨 처음에는 사무용 의자, 그다음에는 쓰레기봉투와 탁상용 스탠드, 그리고 맨 마지막으로 빈 석유통을 던진 뒤 -- 거의 데굴데굴 구르다시피 하면서 웃고 있는 광경이 고스란히 동영상에 담겨 있었다. 흔들이는 흑백 화면에는 아이들이 쓰레기봉투를 던진 다음 하이파이브를 하면서 서로 격려하는 모습까지 담겨 있었다. 게다가 아이들은 화면에는 잡히지 않는 피해자를 향해 엄청난 욕설까지 퍼부었다. 비록 소리는 녹음되지 않았지만.                (P154)    

 

돌이켜 생각해보니 내가 결심을 굳힌 것은 바로 그때였다. 정확히 우리가 두 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로 서 있던 그 몇 분 사이에 결심했다. 그때 난 오래전 미헬이 공을 차다 자전거 가게의 유리창을 깨드렸던 일을 떠올렸던 것 같다. 미헬이 여덟 살 때의 일이었다. 그때 난 미헬을 데리고 자전거 가게 주인한테 가서 충분히 보상을 해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런데 물질적 보상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는지 남자는 우리한테 일장 연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코흘리개 말썽꾸러기들’이 날이면 날마다 가게 앞에서 축구를 했을 뿐만 아니라 ‘일부러’ 공을 가게 유리창을 향해 날렸다는 게 요지였다. 단지 정확한 시점을 몰랐을 뿐, 언젠가 분명히 이런 일이 일어날 거라고 예측했었다는 말도 덧붙였다. 내기를 걸어도 좋을 만큼 확실한 예측이었다면서, “이 꼬마 악당들이 작당하고 저지른 일이 분명해요.”라는 말로 끝맺었다. 

가게 주인이 말하는 동안 난 계속해서 미헬의 손을 꼭 붙잡고 있었다. 죄의식에 사로잡힌 여덟 살짜리 내 아들은 뚫어져라 바닥만 보고 있었다. 가끔 붙잡고 있는 내 손을 힘껏 누르기도 하면서.

가게 주인은 연신 미헬을 꼬마 악당 중 한 놈으로 몰아붙였고, 내 아들 역시 분명히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태도였다. 그런 못마땅한 상황이 내 머리꼭지를 돌게 했다. 

“어이, 잠깐만, 그 아가리 좀 닥치지그래!” 내가 말했다. 

계산대 뒤쪽에 서 있던 가게 주인은 처음에 내 말을 못 알아들은 척 했다. “방금 뭐라고 하셨죠?” 그가 물었다. 

“귓구멍이 막혔어? 못 들은 척하기는. 이 멍청한 자식아. 내가 여기까지 아들을 데리고 온 이유는 축구하는 아이들에 대한 네 녀석의 말도 안 되는 궤변을 들으려던 게 아니라 깨진 유리창 값을 변상해 주기 위해서야. 근데 대체 뭐가 문제야. 이 멍청한 새끼야? 요는 창문이 깨진거잖아. 그거 하나 깨뜨렸다고 여덟 살짜리 꼬마를 이런 식으로 모욕해? 원래는 좋은 마음으로 피해 보상을 해줄까 해서 찾아온 건데, 네놈 말본새를 보아하니 그런 마음이 싹 달아났어. 어떡해야 돈을 받을 수 있는지 몰라? 머리가 그렇게도 안 돌아가?”            (P163-164)     


그 순간 가게 주인이 너무 빨리 꼬리를 내렸을 때 마음 한 켠에서는 아쉬움이 꽤 컸다는 것을 확실히 깨달았다. 그때의 기분이 지금도 생생하게 느껴진다. 자전거펌프를 다시 제자리에 돌려놓았을 때 난 아직 싸울 힘이 충분히 남아 있었다.          (P166)     

“아빠?”

“응?”

“정말 그 아저씨를 때릴 작정이었어? 자전거펌프로?”

“내 말 잘 들어, 미헬. 그 아저씨는 신사가 아니야. 그냥 쓰레기 같은 작자야. 축구하는 아이들을 좋아하지 않는 인간 쓰레기일 뿐이지. 아빠가 정말로 자전거펌프로 그 녀석의 머리통을 갈기려고 했느냐 안 했느냐는 중요하지 않아. 충분히 그럴 만한 상황이었으니까.”     (P167)     

난 미헬의 입장이 되어 생각했다. 현금자동인출기 부스 안에서 방해물을 발견했을 때, 누군가 침낭을 뒤집어쓰고 떡 하니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때, 나라면 과연 어떤 식으로 반응했을까? 악취에 대해서는? 현금 자동인출기 부스를 자기 잠자리로 독차지해도 좋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제부터는 노숙자나 부랑자라는 표현 대신에 사람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도록 하겠다)에 대해서는? 두 아이가 그러면 안 된다고 설득하려 들자 분노의 욕설부터 내뱉는 사람에 대해서는? 잠자리를 방해받자 몹시 흥분했을 뿐만 아니라 고약한 악취까지 풍긴 사람에 대해서는? 간단히 말해 그 사람의 시건방진 태도에 대해서는? 어디서나 그런 식의 태도를 보이는 사람에 대해 나라면 과연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생각해 봤다.               (P169-170)     


노숙자의 머리 옆으로 이번에는 릭의 얼굴이 화면에 잡혔다. 세르게의 아들이 카메라를 향해 씩 웃으며 외쳤다. “테이크 원. 액션!”

그런 다음 다짜고짜 노숙자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얼마나 격렬하게 따귀를 후려치던지 노숙자의 머리가 퍽퍽 옆으로 돌아갔다. 남자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조금이라도 방어하려는 듯 두 손으로 귀를 막았다. “이 거지새끼야. 꺼져버려, 꺼지란 말이야.” 릭이 소리 질렀다.               (P183)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요.” 미헬이 말했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 이건 미헬이 자주 하는 대답이었다. 재킷을 잃어버렸을 때, 축구장에 갔다가 깜빡하고 책가방을 놓아두고 왔을 때, 설명을 요구하면 늘 그런 식으로 대답했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요...... 그냥 거기 두고 왔어. “릭한테 동영상을 메일로 보냈든데, 파소가 그걸 본 거예요. 파소가 그 자료들을 전부 릭의 컴퓨터에서 다운받아 일부를 편집해서 유튜브에 올렸어요. 그러고는 지금 당장 돈을 주지 않으면 다른 자료들도 전부 인터넷에 올릴 거라고 우리를 협박하고 있어요.”

물어보고 싶은 게 너무 많았다. 다른 아빠라면 대체 뭘 물어봤을까. 1초 정도 생각했다. 

“얼마나?” 내가 물었다. 

“3천”

미헬을 쳐다봤다. 

“스쿠터를 한 대 갖고 싶어 해요.”               (P195-196)    

 

“특별한 내용은 전혀 없었습니다. 전 그냥 계산을 한번 해보라고 한 것뿐입니다. 인구가 총 10만 명인 사회를 가정해 보자. 과연 그중에서 비열한 인간은 몇 명이나 될까? 자식들한테 호통만 치는 아버지들은 몇 명이나 될까? 자신의 심한 구취 때문에 주변 사람들을 괴롭히면서도 정작 본인은 그걸 해결할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는 남자들은 몇 명이나 될까? 한평생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불평만 늘어놓으면서 무위도식하는 날건달들은 또 몇 명이나 될까? 자, 여러분 주변을 한번 둘러보도록 해라, 라고 말입니다. 또 학급 친구 중에서 당장 내일부터라도 학교에 안 나왔으면 소원이 없겠다 싶은 아이들은 몇 명이나 될까, 생각해 보라고 했습니다.

또 여러분 가족이나 일가친척들을 떠올려 봐라. 그중에는 분명 되도 않는 자기 얘기만 줄기차게 떠들어대는 신경질적인 삼촌이나 고양이를 마구 학대하는 사촌이 있을 거다. 만약 그런 삼촌이나 사촌이 지하탄광에 매몰되거나 비행기를 타고 가다가 폭탄 테러를 당했다면 너희의 마음이, 또 너희 일가친척의 마음이 어떨까? 아마 못된 친척이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졌으니 더할 나위 없이 홀가분해질 것이다. 

그럼 이제 인류 역사에서 일어난 모든 전쟁에서 희생된 사람들을 생각해 보자. 이때 전 특별히 2차 세계대전이라고 못 박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2차 세계대전을 하나의 사례로 언급했을 뿐입니다. 일단 그것부터 시작해 보자는 의미 정도였지요. 죽든지 살든지 너희하고는 아무 상관없는 천 명 혹은 만 명 정도 되는 희생자들을 생각해보자. 통계적으로 따져볼 때 비록 그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겠지만 죽은 사람들 전부가 착한 사람들이었을 가능성은 거의 제로에 가깝다. 만약 그렇다면 못된 사람들의 이름이 무고한 희생자의 명단에 올라가 있는 것은 정말 천부당만부당한 일이 아니겠느냐. 그런 사람의 이름까지 전쟁 기념비에 새겨져 있다면, 그것만큼 불공평한 일은 없지 않을까?”

호흡을 가다듬기 위해 잠시 말을 멈췄다. 문득 나는 교장이라는 사람을 얼마나 아는 걸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는 지금 나 혼자 떠들어대도록 그냥 내버려 두고 있다. 이건 무슨 의미일까? 어쩌면 이미 날 정직(停職)시키는 데 필요한 증거자료를 충분히 갖고 있어서 직접 해명을 들을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파울......”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벗었던 안경을 다시 쓰곤 내 얼굴이 아니라 종이 위의 어떤 지점을 응시했다. “혹시 개인적인 질문 하나만 해도 되겠소, 파울?”               (P208-209) 

    

그런 면에서 토네이도, 허리케인, 쓰나미 등에 관한 다큐멘터리는 우리에게 상당히 큰 위안을 준다. 맞다. 그건 아주 끔찍한 현상이다. 우리 모두 그게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불행과 폭력이 없는 세상은 — 자연의 폭력이든 인간의 폭력이든 상관없이 — 도저히 참을 수 없을 것이다.          (P218)  

   

“바베테와 난 오늘 오후에 릭과 대화를 나눴어.” 세르게가 말했다. “릭은 그 일로 무척 괴로워하고 있어. 그 앤 지금 자신이 저지른 짓을 아주 끔찍하게 후회하고 있어. 릭은 지금 잠을 통 못 자. 얼굴도 많이 상했고, 당연히 학교성적도 엉망진창이야.”

뭔가 한마디 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언중유골이라고. 세르게는 지금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아들을 우리와 분리하려는 게 분명했다. ‘릭은 지금 잠을 통 못 자. 얼굴도 많이 상했고.’ ‘그 앤 지금 자신이 저지른 짓을 아주 금찍하게 후회하고 있어.’ 그런 말을 듣고 있으려니 끌레르와 나도 적극적으로 미헬을 옹호하고 나서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무슨 말을 할 것인가? 미헬은 릭보다 잠을 더 못 이룬다고?                 (P271-272)     


“나한테 무엇보다 중요한 건 바로 릭의 미래야.” 세르게가 말했다. “물론 최선은 그 사건이 밝혀지지 않는 거겠지. 하지만 그런 상태로 계속 살아갈 수 있을까? 릭이 그런 상태로 살아갈 수 있을까? 또 그걸 알면서 우리는 그냥 살아갈 수 있을까?” 그 말을 하면서 세르게는 처음에는 끌레르를, 다음에는 날 쳐다봤다. “두 사람은 그 사실을 알면서도 그냥 살아갈 수 있어?” 그가 물었다. “난 그럴 수 없어.” 우리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말을 이었다. “현재 추세대로라면 난 수상 자리가 거의 보장된 셈이야. 조만간 여왕님을 모시고 각료들과 함께 취임식 사진을 찍게 되겠지. 하지만 정확한 시점은 모르겠지만 언젠가는 분명 어느 기자회견에서 기자가 손을 번쩍 들고 이렇게 물을 거야.” 로만 씨, “아드님이 노숙자 살인에 가담했다는 소문이 사실인가요?”라고.                          (P273)     

“나중에, 그러니까 우리가 모든 문제를 처리하고 나면, 그 아이는 자신만의 인생을 살아가야 하오. 이 결정은 전적으로 나 혼자 내렸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소. 내 아내인..... 바베테는,,,,,”

바베테가 가방에서 말보로 담뱃갑을 꺼냈다. 포장을 뜯지 않은 담뱃갑에서 투명한 셀로판지를 뜯어냈다. “바베테는 나랑 의견이 다르지만 내 결심은 확고하오. 아내한테는 벌써 오늘 오후에 내 결심을 밝혔소.”

심호흡한 다음 그가 우리들의 얼굴을 차례차례 응시했다. 그제야 난 내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 아이를 위해서, 또한 국가를 위해서 난 수상 후보직에서 사퇴할 생각이오.” 그가 말했다. 

담배를 한 개비 꺼내 입에 물었던 바베테가 담배를 다시 뺐다. 그녀가 끌레르와 날 쳐다봤다. 

“사랑하는 끌레르.” 그녀가 말했다. “사랑하는 파울..... 제발 세르게한테 정신 차리라고 말해줘요. 제발 그래서는 안 된다고 좀 해줘요. 지금 세르게는 제정신이 아니에요.”          (P277)   

  

“세르게, 제발 사실을 좀 직시해요. 그건 정말 별일 아니에요. 체포된 사람도 없을 뿐만 아니라 용의선상에 올라 있지도 않아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단지 우리뿐이에요. 그건 열다섯 살짜리 두 소년의 미래를 완전히 희생시킬 만큼 대단한 일이 아니라고요. 난 지금 당신의 미래를 말하는 게 아니에요. 당신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면 돼요. 하지만 그 일에 다른 사람들까지 끌고 들어갈 권리는 없어요. 설사 자식이라 해도요. 내 아들까지 글어들이는 건 더더욱 가당찮은 일이고요. 당신은 자신의 행동을 마치 숭고한 자기희생처럼 포장하고 있어요. 개혁적인 정치인이자 우리의 새로운 수상 후보자인 세르게 로만이 자신의 정치생명을 포기하는 걸로 말이죠. 그것도 단지 그런 비밀을 평생 품에 안고 살아갈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 하지만 사실은 비밀 때문이 아니라 스캔들 때문이죠. 어찌 생각하면 아주 고상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어요. 하지만 그건 정말 이기적인 생각이에요.”  

“끌레르,” 바베테가 말했다.                         (P281-282)

끌레르와 난 미헬이 자신의 삶을 계속 살아나갈 수 있기를 원해요. 우리는 그 애가 죄책감 같은 걸 느끼게 하고 싶지 않아요. 물론 그 애가 어느 정도 책임이 있는 건 사실이겠죠. 하지만 그걸 인정한다고 해도 현금자동인출기 부스 안에서 사람들을 방해한 그 노숙자가 갑자기 순수한 희생양이 될 순 없어요. 성난 대중들은 지금 우리 아이들을 본보기로 삼으려는 거예요.                   (P291)     


오래전 일은 아니고 얼마 전에 미헬이 사형 제도에 관한 리포트를 쓴 적이 있었다. 역사 수업 과제였다. 수형생활을 마치고 자유를 얻어 사회로 복귀하자마자 다시 사람을 죽인 살인자들에 대한 다큐멘터리에 관련된 것이었다. 다큐멘터리는 사형 제도에 대한 찬반 입장을 모두 다루었는데, 미국의 한 정신과 전문의의 인터뷰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 의사는 절대 풀어주어선 안 되는 사람도 있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이 세상에는 괴물들이 돌아다니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런 괴물들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절대 감형(減刑)은 안 됩니다.”          (P299)         

아무튼 세르게와 바베테는 지금 그 일 말고 다른 문제로 골치를 썩는 중이다. 입양아인 베아우의 실종사건이다. 그들은 베아우를 찾기 위해 대대적인 조사를 취했다. 신문과 잡지에 베아우의 사진을 실은 광고도 냈고, 전국적으로 현수막도 내걸었으며, TV의 <실종자 찾기> 프로그램에도 출연했다. 

마지막 방송에서 베아우가 실종 직전 엄마 휴대폰에 음성 메시지를 남겼다는 뉴스가 나왔다. 바베테의 휴대폰은 발견되지 않았다. 메시지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비록 베아우의 메시지는 우리가 저녁 식사를 했던 그날 밤과는 좀 다른 의미로 해석되었지만.

“엄마, 무슨 일이 생기든 전 괜찮아요...... 그래도 엄마한테 이 말만은 꼭 전하고 싶어요. 엄마, 사랑해요.......”                      (P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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