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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용헌 Apr 28. 2024

존 어빙의 <일년동안의 과부>

영화 <킴 베신져의 바람난 가족>  2004년

영화 <킴 베신져의 바람난 가족>(The Door in the Floor)은 미국에서 제작된 토드 윌리엄스 감독의 2004년 드라마 영화이다. 엘르 패닝 등이 주연으로 출연하였고 앤 캐리 등이 제작에 참여하였다. 

     

[1]

“제가 생각한 건 아줌마예요.” 에디가 불쑥 내뱉었다. “아줌마 생각만 햇어요.”

“그렇다면 부끄러워하지 마.” 매리언이 말했다. “너는 늙은 여자를 행복하게 해 줬어.”

“아줌마는 늙은 여자가 아니에요.”

“나를 더욱더 행복하게 하는 구나, 에디.” 갑자기 매리언이 가려는 사람처럼 벌떡 일어섰다. 마침내 그가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매리언이 에디의 표정을 보고 입을 열었다. “나에 대한 네 감정에 조심해야 돼, 에디. 내 말은 네 걱정을 더 많이 하라는 뜻이야.” 그녀가 타이르듯 말했다. 

“사랑합니다.” 에디가 용기를 내어 말했다. 

그녀는 마치 그가 다시 울음을 터뜨리기라도 한 것처럼 급작스럽게 에디 곁에 앉았다. “나를 사랑하지 마, 에디.” 그녀가 말했다. 에디의 예상보다 더 진지한 목소리였다. “그냥 내 옷만 생각해. 옷은 너를 아프게 하지 않아.” 매리언은 에디에게 가까이 몸을 기울이면서 경박하지 않은 말투로 말했다. “말해 보렴. 네가 특별히 좋아하는 게 있니? 내가 입는 옷 중에서 말야.” 그는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고 매리언이 되풀이 말했다. “내 옷만 생각해, 에디.”       (P98-99)     

“실밥에 대해 다 말해 줘.” 에디가 좌회전을 하는 사이에 루스가 에디에게 말했다.

“실밥을 뽑는 동안 별 느낌도 없을 거야.” 에디가 말했다. 

“왜?” 꼬마가 물었다. 

그가 다시 우회전을 하지 전에, 백미러에 매리언과 메르세데스의 마지막 모습이 비쳤다. 그녀가 우회전을 하지 않으리라는 걸 에디는 알고 있었다. 이삿짐 트럭은 메르세데스 앞에서 직진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매리언의 왼쪽 얼굴이, 메르세데스의 운전석 창문을 통해 밝게 들어오는 아침 햇살을 받아 환하게 빛났다. 창문이 열린 채였고, 에디는 바람에 나부끼는 매리언의 머리카락을 볼 수 있었다. 그라 우회전을 하기 직전에 매리언이 그에게(그리고 그녀의 딸에게) 손을 흔들었다. 마치 에디오 루스가 돌아왔을 때에도 여전히 그곳에 머물러 있겠다는 듯이.

“실밥을 뽑는 게 왜 아프지 않아?” 루스가 다시 에디에게 물었다. 

“상처가 아물었으니까. 새살이 돋았거든.”

이제 매리언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그게 그 말인가? 그는 궁금했다. “안녕, 에디.” 그게 에디에게 남긴 매리언의 마지막 말인가? “그럴 거야.....”는 딸에게 남기는 마지막 말이었다. 에디는 그처럼 갑작스러운 이별을 믿을 수 없었다. 메르세데스의 열린 창문, 바람에 나부끼던 매리언의 머리카락, 창밖으로 내밀어 흔들던 매리언의 손, 그리고 햇살을 받아 환하게 빛나던 매리언의 한쪽 얼굴. 매리언의 다른 부분은 보이지 않았다. 에디 오헤어가 앞으로 37년 동안 자기나 루스가 매리언을 못 보리라는 걸 알 리는 없었다. 그러나 그 오랜 세월 내내 에디는 냉담하게만 보였던 그녀의 갑작스러운 떠남을 의아하게 여기리라.

어떻게 그럴 수 있단 말인가? 에디는 생각하리라. 언젠가 루스 역시 엄마에 관해 그런 생각을 하겠듯이.           (P168-169)     

“상처 얘기나 더 해 줘.” 꼬마가 말했다. 

“의사 선생님이 실밥을 뽑았을 때 아주 가느다란 하얀색 흉터가 곧게 남아 있었잖아.” 에디가 말했다. “앞으로 평생 동안 용감할 필요가 있을 때면 그 흉터를 들여다봐.”

루스가 흉터를 바라보았다. “언제나 여기 있어?” 꼬마가 에디에게 물었다. 

“언제나.” 에디가 대답했다. “네 손이 더 커지고 네 손가락도 더 커지겠지만, 흉터는 언제나 그대로 있을 거야. 네가 다 자라서 어른이 되면, 흉터는 더 작아 보이겠지. 그건 네 몸의 다른 부분이 다 커졌기 때문이야. 흉터는 언제나 똑같을 테고, 아예 알아차리기조차 힘들지도 몰라. 점점 더 눈에 안 보이게 된다는 말이야. 아마 너는 밝은 데서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해야 할 걸. ‘제 흉터 보이세요?’ 그럼 사람들은 정말 가까이서 들여다봐야 해. 그래야만 보이거든. 너야 언제나 볼 수 있겠지. 너는 어디를 봐야 할지 아니까. 물론 지문에는 언제나 흉터가 나타날 거야.”

“지문이 뭐야?” 루스가 물었다. 

“차 안에서는 보여주기 힘들어.” 에디가 말했다. 

두 사람이 해변에 도착했을 때 루스가 다시 에디에게 물었지만, 루스의 손가락이 너무 작았기 때문에 젖은 모래에도 지문이 뚜렷하게 찍히지 않았다. 모래가 너무 거칠기도 했다. 루스가 얕은 물에서 텀벙거리자 황갈색의 소독약 흔적이 깨끗이 씻겨나갔다. 가느다란 흰색 흉터가 손가락에 선명하게 드러났다. 그들이 식당에 가서야 루스는 지문을 볼 수 있었다.       (P217-218)    

 

갑자기 에디는 페니 피어스에게 써 준 글의 다른 용도가 떠올랐다. 앨리스가 도착하면 그녀에게 지금까지 벌어진 일을 알려주는 데 유용하리라. 분명히 앨리스는 알 필요가 있었다. 적어도 루스가 느낄 모든 감정에 민감할 만한 여자라면, 앨리스도 알 필요가 있었다. 에디는 편지지를 접어 오른쪽 뒷주머니에 찔러넣었다. 청바지가 약간 축축했는데, 바닷가를 떠날 때 수영복 위에 걸쳐 입었기 때문이다. 매리언이 준 10달러짜리 지폐도 약간 눅눅했고, 페니 피어스가 자기 집 전화번호를 손으로 적어 건넨 명함도 그러했다. 그는 그것들을 더블백에 집어넣었다. 그것들은 이미 58년 여름의 기념물이 되었고, 에디는 그것들이 자기 인생의 분수령이기도 하고 루스가 그녀의 흉터만큼이나 오래도록 껴안고 살아갈 유산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가엾은 꼬마는 아직 이 일이 인생의 분수령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모른다고 에디는 생각했다. 열여섯 살 에디 오헤어는 더 이상 자기 안에만 파묻히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십대를 벗어난 셈이었다. 에디는 오늘밤 남은 시간 동안 오직 루스를 위해 할 일을 하고 할 말을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는 복도로 나가 루스의 방으로 걸어갔다. 테드는 이미 매리언과 발 사진을 삭막한 벽 여기저기에 튀어나온 많은 사진 걸이 중 하나에 걸어두었다.            (P228)     

에디는 또 루스를 살펴보았는데, 평화롭게 자는 네 살배기를 그렇게 슬쩍 들여다보는 일이 30년 이상 못 볼 아이에 대한 마지막 인사가 되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한 채였다. 자기가 루스가 일어나기도 전에 떠날 줄은 전혀 몰랐으리라.

아침에 루스에게 자기 부모의 선물을 주고 작별 키스를 하리라고 에디는 가정했다. 그러나 에디는 너무 많은 걸 가정했다. 매리언과 많은 걸 경험했지만, 그는 여전히 감정의 거친 앙금들이 남는 순간을 과소평가하는 열여섯 살 소년에 불과했다. 어찌됐든 에디는 그러한 순간들을 겪은 적이 없었다. 네 살배기의 방에서 아이가 잠든 모습을 지켜보며 에디는 쉽사리 모든 게 잘되겠거니 생각했다.

잠든 아이의 모습이야말로 ‘진짜 세계’가 범접지 못한 듯이 보이는 몇 안 되는 장면이니 말이다.           (P253-254)    

 

대부분의 열여섯 살짜리들은 단지 어둠의 영속만을 본다. 어디서나 그들은 암흑을 보고 어둠을 본다. 행복인지 불행인지 희망과 기대를 버리지 못한 에디 오헤어는 빛이 영속성을 찾는 경향이 있었다. 깜깜한 어둠 속에서 에디는 처음에는 매리언이 다시 돌아왔다고 생각했다. 

“아줌마예요?” 소년이 나직이 물었다. 

“젠장.... 너는 대책 없는 낙관론자냐?” 테드 콜이 말했다. “잠에서 영영 안 깨는 줄 알았다.” 테드의 목소리가 사방에서, 어느 특정한 공간이 아닌 주위를 둘러싼 어둠에서 들려왔다.        (P255-256)    

 

비록 3년 전에 출간되었고 루스가 읽을 마음이 있었다면 이미 읽었을 책이었지만, 에디는 루스에게 줄 생각으로 [예순 번]에 미리 증정 서명을 해 두었다. 에디는 종종 [예순 번]의 주제에 대해 테드 톨이 딸에게 무슨 말을 할지 상상했다. “희망 사항이지.” 테드는 아마 그렇게 말했으리라. 혹은 이렇게. “허풍일 뿐이야. 네 엄마는 남자를 몰라.” 테드에게 루스가 실제로 한 말은 더 흥미롭고 에디에게 꼭 맞는 얘기였다. 테드는 딸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 불쌍한 애는 네 엄마랑 잔 일을 결코 극복하지 못했구나.”

“그는 더 이상 애가 아니에요, 아빠.” 루스가 대답했다. “제가 삼십대니까 에디 오헤어는 사십대네요, 그렇죠?”

“그는 아직 애야, 루시.” 테드는 말했다. “에디는 언제나 애일거야.”          (P319-320)   

  

개인적인 삶을 건드리는 문제에 관해서는 왜 여자들이 최악의 독자일까? 루스는 생각했다. 무슨 근거로 여자들은 자기가 겪은 강간이나 유산, 결혼, 이혼, 사별 등이 유일하게 보편적인 경험이라고 가정하는 것일까? 단지 루스의 독자들은 대부분 여성일 뿐이고 소설가들에게 자기의 비참한 사연이나 늘어놓는 편지를 쓰는 여자들은 가장 형편없는 부류의 여자들일 따름인가?        (P516)

[2]

루스는 과거의 열성 독자가 어떤 면에서는 처음부터 그녀를 미워했던 독자보다 더 무서웠다. 개인적으로 루스를 알 수 없게 되자 크게 실망한 열성 독자가 악의적인 독자로 돌변하곤 했다. 소설을 쓰는 일은 사생활을 필요로 한다. 사실상 고립된 생활을 해야 한다. 그에 비해 출판은 떠들썩한 공적 행사가 되기 십상이다. 루스는 그런 공적 행사가 편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P10-11)  

   

내가 아직 시차를 극복하지 못했거나 새 소설의 구상이 은근슬쩍 머릿속에 들어왔는지, 무엇을 읽어도 건성으로 읽게 된다. 룸서비스 메뉴도 그렇고 호텔의 시설 목록도 그렇다. 애초에 가져올 생각이 없었지만 무심코 가방에 넣었던 노먼 셰리의 [그레이엄 그린의 삶] 1권도 마찬가지다. 그나마 중요해 보이는 단락의 마지막 문장들, 행간을 띄우기 직전의 마지막 문장들만 읽힌다. 단락 중간에 나오는 문장은 아주 가끔씩만 눈에 띈다. 마음만 자꾸 앞서가니 무슨 글이든 차근차근 읽을 수가 없다.

셰리는 그린에 대해 이렇게 썼다. “그의 일기가 보여 주듯, 그린은 추잡하고 더러운 것, 음란하고 기괴한 것을 추구했기 때문에 다양한 경험을 했다.” 내 일기도 저런 걸 보여줄 수 있을까. 그랬으면 좋겠다. 추잡하고 더러운 것, 음란하고 기괴한 것을 추구하는 게 남성 작가들의 (바람직한 행동까지는 아니라도) 당연한 행동으로 치부되는 세태가 소름끼친다. 나한테 더 추잡하고 더 더러운 것, 더 음란하고 더 기괴한 것을 추구할 용기가 있었다면 작가로서는 분명히 도움이 되었으리라. 하지만 여자들이 그런 걸 추구하면 수치심을 느끼지 않을 도리가 없고,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자기를 변호하는 모양이 허풍선이처럼 꼴 사납고 우스워질 테다.

창녀에게 돈을 지불하고 손님을 상대하는 장면을 보여 달라고 하면 어떨까. 돈을 내고 창녀와 손님의 은밀한 만남을 구석구석 들여다볼 수 있게 해 달라면 어떨까.... 모름지기 작가라면 이렇게 해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여성 작가에게는 다루지 못하는 주제가 있기 마련이다. 과거에 관한 이분법적 사고와 다를 바 없다. 남자들은 과거가 있어도 무방하고 심지어는 과거 있는 남자가 더 매력 있게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과거가 있는 여자들은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는 게 낫다. 

내가 새 소설을 시작한 게 틀림없다. 시차 때문이라고만 하기에는 정신이 너무 산만하다. 나는 지금 여성 작가를 생각한다. 나보다 더 극단적인 여성 작가, 작가로서나 여자로서나 더 극단적인 인물. 그녀는 모든 것을 구석구석 세밀하게 관찰하기 위해 온 힘을 기울인다. 굳이 독신을 고집하지는 않지만, 결혼은 자유를 옥죄는 고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섹스의 모험가는 아니기 때문에 몸소 온갖 경험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모든 것을 직접 보기를 원하는 여자다. 

그녀가 창녀에게 돈을 지불하고 고객과 함께 있는 장면을 보여 달라고 했다고 치자. 그런데 혼자 나설 만큼 대범하지는 않다. 남자 친구랑 함께 하는 걸로 하자. (물론 나쁜 남자 친구다.) 창녀의 행위를 목격한 결과로 남자 친구가 아주 품위 없는 짓(수치스러운 짓)을 벌이고 그 탓에 여성 작가는 인생을 바꿀 결심을 하게 된다.

하지만 그 짓이 추잡한 정도로는 부족하다. 더럽거나 기괴한 걸로도 부족하다. 이 소설은 일종의 성적 불평등을 예시하는 작품이다. 여성 작가는 인간사의 이면을 관찰하겠다고 나섰지만 너무 멀리 나갔다. 작가가 남자라면, 창녀와 함께 있을 때 무슨 일이 벌어지든 죄책감이나 수치심을 느낄 리 없다. 

그린의 전기 작가 노먼 셰리는 ‘자신과 타인의 경험을 이용할 수 있는 소설가의 권리와 필요’에 대해 말한다. 셰리는 소설가의 이러한 ‘권리’와 저렇게 해야 할 끔찍스러운 ‘필요’에는 무자비한 구석이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관찰과 상상의 관계는 무자비하다는 말로 표현하기에는 부족하다. 그보다 훨씬 복잡하다. 작가는 우선 좋은 이야기를 상상해야 하고 그 다음에는 세부를 진짜처럼 보이게 묘사해야 한다. 세부를 진짜처럼 보이게 할 때 그 세부의 일부가 정말로 진짜라면, 분명 도움이 된다. 개인적 경험은 과대평가되기 십상이지만, 관찰이야말로 소설의 핵심이다. 

내가 산만했던 건 시차 증후군 탓이 아니었다. 소설 탓이었다. 창녀에게 돈을 지불하는 장면부터 시작하자. 창녀에게 돈을 지불하는 것은 전통적으로는 수치스럽게 여겨지는 행동이다. 아니다. 이건 어리석은 시작이다. 나쁜 남자 친구부터 시작하자. 당연히 왼손잡이로 설정할 게다. 불그레한 금발의 남자 친구...                 (P15-16)     

어떤 면에서 보면, 나는 소설을 실제로 쓰는 단계보다 이렇게 구상하는 단계가 더 좋다. 처음에는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법이니까. 하나씩 세목을 정하고 단어 하나하나에 정성을 기울여 쓰기 시작하면, 선택의 자유도 사라지는 법이므로.               (P25)    

 

내가 들고 간 암스테르담 가이드북을 보니, 발레트예스(‘작은 벽’)라 불리는 홍등가는 벌써 14세기에 당국의 인가를 받았다고 한다. ‘옷을 거의 걸치지 않은 유리창의 여자들’에 대한 비웃는 듯한 소개말도 실려 있다. 추잡하고 더러운 것, 음란하고 기괴한 것에 대한 글은 어째서 대부분 근거 없이 우월한 어조를 띠는 것일까? (쾌활함은 무심함처럼 우월감의 표현이다.) 보기 흉한 행동이나 장면에 짐짓 쾌활해하거나 무심해하는 것은 보통은 허위의식의 발로다. 사람들은 보기 흉한 행동이나 장면에 매혹되거나 그것을 비난한다. 혹은 매혹되는 동시에 비난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모습에 쾌활한 척하거나 무심한 척함으로써 그보다 우월한 사람처럼 행세하려 한다. 

“성적 고민이 없는 사람은 없어. 적어도 하나씩은 있어.” 해나는 그런 말을 했다. (하지만 해나는 자기의 고민이 무엇인지는 말해 주지 않았다.)                (P34-35)   

  

늦은 오후에 브리예 대학교에서 강연 — 루스의 유일한 강연이었다 —을 하면서 루스는 줄곧 구상을 바꾸었지만, 본질적으로는 변함이 없었다. 강연은 그녀 자신에게 솔직하지 못한 내용으로 들렸다. 여기서 루스는 기억에 반대되는 상상력의 순수성을 지적했고 자전적인 세부 묘사에 반대되는 꾸며낸 세부 묘사를 찬양했다. 주변의 친구나 가족 — ‘헤어진 애인을 비롯해서 우리의 실제 생활에서 뽑아내는 몇 안 되는 실망스러운 사람들’ — 등으로 소설을 가득 채우는 대신 순전한 상상력으로 새로운 인물을 창조하는 것이 우월하다고 역설했다. 강연은 이번에도 성공적이었다. 청중은 흡족해했다. 루스와 해나의 논쟁으로 시작된 것이 소설가 루스에게 커다란 도움이 되었으니 이번 강연은 그녀의 신조(信條)가 되었다.      

루스는 가장 훌륭한 세부 묘사란 기억이 아니라 선택에 기반한 세부 묘사라고 주장했다. 허구의 진실은, 저널리즘의 진실에 다름 아닌 관찰의 진실에 불과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가장 훌륭한 세부 묘사는 소설의 인물이나 사건이나 분위기를 명확히 드러내는 것이다. 허구의 진실이란 실제로 일어난 일이 아니라 이야기 내에서 일어났음직한 일이다. 

루스 콜의 강연은 실화 소설에 대한 공격, 자전 소설에 대한 혹평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막상 자신이 가장 자전적인 소설을 쓸 준비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었기에 그녀는 몹시 부끄러웠다. 해나가 입버릇처럼 루스는 루스 캐릭터와 해나 캐릭터에 관한 소설을 쓴다고 비난한 게 사실이라면, 이번에 그녀가 쓰려는 소설은 도대체 어떤 소설일까? 정확히 말하면 해나처럼 나쁜 결정을 내리는 루스 캐릭터에 관한 소설이었다.

그래서 루스는 식당에서 이번 강연을 주최한 브리예 대학교의 후원자들에게 칭찬을 들을수록 마음이 괴로웠다. 그들은 호의적으로 그런 칭찬을 했던 것이지만, 대부분 이야기짓기의 구체적인 방법보다는 이론과 이론적인 논의를 더 좋아하는 학자 부류였다. 루스는 그런 이들에게 지금은 스스로도 상당한 의혹을 품고 있는 허구에 관한 이론을 제공한 자신이 미웠다.

소설은 논쟁이 아니다. 이야기는 그 나름의 장점에 따라 통하거나 통하지 않는다. 세부 묘사가 실제이건 상상이건 무슨 상관인가? 중요한 것은 세부 묘사가 실제처럼 보이는지 여부이며 그것이 소설적 상황에 적합한 가장 훌륭한 세부 묘사인지 여부이다. 이게 무슨 대단한 이론은 아니지만, 루스가 지금 이 순간 진심으로 의탁할 수 있는 전부였다. 이제 저 낡은 강연은 기억에서 지워버릴 때였고 그녀의 이전 신조에 대한 사람들의 찬양은 속죄의 의미로 견뎌내야 마땅했다.                    (P79)    

 

“저는 기자보다 나을 게 없어요.” 빔이 상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루스는 빔이 자기가 한 말을 인용하자 움찔했다. 분명히 그녀가 강연에서 한 말이었다. 정확히 그녀가 한 말은 이러했다. “이야기를 꾸며낼 줄 모르는 사람은 기자보다 나을 게 없습니다.”           (P82)    

 

하리는 주로 소설을 읽었다. 소설에서 인간 본성의 참다운 묘사를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리가 좋아하는 소설가들은 인간의 가장 나쁜 행동이 바뀔 수 있다는 암시를 결코 하지 않았다. 이런 저런 캐릭터를 도덕적으로 지탄할 때도 있지만, 소설가는 본래 세상을 바꾸는 개혁가는 아니다. 소설가는 평범한 수준 이상의 이야기를 늘어놓는 이야기꾼이고 좋은 소설가는 그럴듯한 인물들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줄 따름이다.            (P192)   

  

하리는 복잡한 플롯의 가치도 인정했지만, 취향이 좀 구식이어서 연대기적인 이야기를 더 좋아했다. 목격자를 찾기 전에 살인범을 찾는 것은 분명히 엉뚱하게 뒤집어진 이야기 전개였다. 제대로 된 이야기라면 먼저 목격자를 찾아야 했으니까.

루스 콜을 찾는 사람은 단순한 경찰이 아니었다. 이 경우에는 구식 취향을 가진 소설 독자였다.              (P198)     

“그녀는 1년 동안 과부였다.” 루스 콜은 썼다. (그녀 자신이 과부가 되기 불과 4년 전이었다.) 그리고 앨런이 죽은 후 1년 동안, 루스는 — 그녀가 소설 속의 과부에 대해 썼듯이 — ‘어느 과부와 마찬가지로 과거의 기억을 통제하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훌륭한 소설가는 무엇이든 (진실되게) 상상할 수 있어야 한다고 언제나 주장했던 루스였지만, 이제 그녀는 모든 걸 미리 알 수는 없는 법이라고 생각햇다. 실생활의 경험은 과대평가된 게 분명하다는 주장도 곧잘 했던 루스였지만, 이제 그녀는 자신이 과부에 대해 얼마나 정확하게 상상했던지 스스로도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루스는 앨런이 죽은 지 꼬박 1년이 흐른 후에도 정확히 그녀가 소설 속의 과부에 대해 썼던 대로 ‘그날 아침 잠에서 깨어 곁에 죽어 있던 남편을 발견했던 기억의 홍수에 휩쓸리기 일쑤’였다.                (P265-266)  

   

에디는 헨리 제임스가 ‘오후의 다과회라는 의식’을 묘사한 [여인의 초상]의 긴 서장이 지나치게 의례적이라고 언제나 생각했지만, 민티는 그 대목이야말로 수없이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대목이라고 단언했다. 그러나 에디는 그 대목을 읽을 때마다 처음 직장경 검사를 받기 위해 이름이 불릴 때처럼 머리 한쪽이 마비되는 느낌을 받았다.                (P276-277)     

아버지가 무수하게 밑줄 친 문장에서 민티는 옛 제자들을 기쁘게 할 법한 대목을 찾을 수 있어서 에디는 흡족했다. 그가 고른 것은 [허영의 시장]의 마지막 단락이었다. 민티는 언제나 새커리의 팬이었다. “아! 헛되고 헛되도다! 이 세상에서 누군들 행복하랴? 누군들 욕망을 가졌으며, 설령 가졌더라도 누가 만족했으랴? 오라 제군들이여, 어서 상자를 닫고 꼭두각시를 거두자, 이제 연극은 끝이 났구나.”                  (P278)     


“슬픔은 전염되는 법이야.” 매리언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네가 내 슬픔에 감염되는 걸 바라지 않았어, 에디. 루스가 감염되는 것은 정말로 원하지 않았지.”          (P3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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