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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용헌 Apr 29. 2024

존 르 카레의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

영화 <추운 곳에서 온 스파이>  1965년

<추운 곳에서 온 스파이>(The Spy Who Came in from the Cold)는 1965년 개봉한 영국의 냉전 첩보 영화이다. 마틴 리트가 감독을 맡았으며, 존 르 카레의 동명 소설이 영화의 원작이다. 1966 영국 아카데미상 영국 작품상 수상작이다.   

  

그 빌어먹을 여자, 리머스는 생각했다. 카를은 그 여자에 대해 거짓말을 했다. 말하지 않는 것도 거짓말의 일종이다. 세계 곳곳의 첩보원들이 모두 그런 거짓말을 한다. 당신이 그들에게 남을 속이는 법과 증거를 감추는 법을 가르쳐 주면, 그들은 당신도 속인다. 카를은 작년에 쉬르츠 가에서 저녁을 먹은 뒤 딱 한 번 그 여자를 소개했다.         (P12-13)     


정보부 활동에는 한 가지 도덕률이 있다. 결과가 모든 것을 정당화해 준다는 것이다. 화이트홀의 궤변조차 그 도덕률의 비위를 맞추었다. 리머스는 성과를 올리고 있었다. 문트가 등장할 때까지는,               (P16-17)     

“우리는 동정심을 버리고 살아야 돼. 안 그런가? 물론 그건 불가능한 일이지. 우리는 서로 가혹하게 굴지만, 정말로 그렇게 가혹한 인간은 아니라는 뜻일세..... 사람이 추운 바깥에 줄곧 나가 있을 수는 없지. 때로는 따뜻한 실내로 돌아와야 해. 무슨 뜻인지 알겠나?”          (P23)     


“나는 자네가 추운 바깥에 좀 더 오래 남아 있기를 바라네.” 리머스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관리관이 말을 이었다.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의 윤리는 하나의 전제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생각하네. 정당한 이유가 없으면 절대로 남을 공격해서는 안 된다는 것. 자네는 그게 공정하다고 생각하나?”

리머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하기를 피하기 위한 몸짓이다.

“따라서 우리는 불쾌한 일을 하지만 <방어적>이야. 그래도 그건 공정하다고 생각하네. 우리가 불쾌한 일을 하는 것은 동서 양쪽에 사는 보통 사람들이 밤에 침대에서 안전하게 잘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야. 지나치게 낭만적이라고 생각하나? 물론 때로는 아주 못된 짓도 하지.” 그는 초등학생처럼 히죽 웃었다. “도덕성을 비교 평가하면, 우리는 비교적 부정직한 일에 종사하고 있네. 어쨌든 한쪽의 관념을 다른 쪽의 방법과 비교할 수는 없지, 안 그런가?”

리머스는 어리둥절했다. 그는 관리관이 상대를 비수로 찌르는 듯한 말을 하기 전에 쓸데없는 말을 늘어놓은 것은 들어 보았지만, 이런 말은 일찍이 들어 본 적이 없었다.

“방법은 방법과, 관념은 관념과 비교해야 한다는 뜻일세. 전쟁이 끝난 뒤, 우리의 방법, 그러니까 우리와 상대의 방법은 거의 같아졌네. 우리 정부의 정책이 자비롭다는 이유만으로 상대편보다 덜 무자비할 수는 없다는 뜻일세. 안 그런가?” 그는 혼자 소리 없이 웃었다. “그건 결코 바람직하지 않을 걸세.”            (P23-24)  

    

“미안하지만 당신이 오해했어. 나는 미국인과 퍼블릭스쿨을 좋아하지 않아. 군대 행진도 좋아하지 않고, 군인답게 행동하는 사람들도 좋아하지 않아.” 그는 웃지도 않고 덧붙여 말했다. “그리고 인생에 대해 대화를 나누는 것도 좋아하지 않아.”

“하지만 엘릭, 그렇게 말하기보다는 차라리.....”

“이 말을 덧붙였어야 하는데 깜박 잊었군.” 리머스가 리즈의 말을 가로막았다. “나는 이렇게 생각하는 편이 낫다고 나에게 충고해주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아.”

리즈는 리머스가 화를 내기 시작한 것을 알았지만, 이제 자신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

“그건 당신이 생각하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이에요. 감히 생각할 용기가 없는 거죠! 당신 마음속에는 독기가 있어요. 증오가 있어요. 당신은 광신자에요. 나는 알아요. 하지만 당신이 무엇을 광신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어요. 당신은 남을 개종시키고 싶어하지 않는 광신자예요. 그건 위험한 존재죠. 당신은........ 복수나 무언가를 맹세한 사람 같아요.”

갈색 눈이 그녀에게 고정되었다. 그가 입을 열었을 때 리즈는 그의 목소리에 담긴 위협에 겁을 먹었다. 

“내가 당신이라면..... 남의 일에 상관하지 않을 거야.” 리머스가 거칠게 말했다.          (P41-42)  

     

신참 죄수는 대개 두 부류로 나뉜다. 수치심이나 공포심이나 충격 때문에 옥살이에 대한 기초 지식을 설레는 두려움 속에서 기다리는 부류가 있는가 하면, 감옥 공동체의 귀여움을 받기 위해 옥살이에 서투른 신참의 지위를 이용하는 부류도 있다. 그런데 리머스는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았다. 그는 그들 모두를 경멸하는 듯했다. 바깥세상과 마찬가지로 리머스도 그들을 필요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도 모두 리머스를 싫어했다.               (P51)   

  

“아무도 없었습니다. 다만 문제를 분명히 해놓고 싶었을 뿐입니다. 나는 이 일이 어떻게 진행될지 알고 있습니다. 이 공격 작전 말입니다. 진행 과정에 다른 사건을 낳기도 하고, 예기치 않은 쪽으로 방향을 틀기도 하지요. 이 물고기를 잡은 줄 알았는데, 알고 보면 다른 물고기를 잡은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일에 그 여자를 끌어들이고 싶지 않습니다.”          (P59)     

그 순간 리머스는 리즈가 준 게 무엇인지 깨달았다. 영국으로 돌아가게 되면 그것을 되찾아야 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하찮은 것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었다. 평범한 생활이 가치 있다는 믿음, 빵 부스러기를 종이 봉지에 넣고 해변으로 걸어가 갈매기들에게 던져 주는 소박함. 하찮은 것에 대한 이 관심은 리머스가 이제껏 가질 수 없었던 것이었다. 갈매기에 던져 줄 빵이든 사랑이든, 다른 무엇이든 간에, 그는 돌아가서 그것을 찾을 것이다. 스스로 찾지 못하면 그를 대신해서 리즈가 그것을 찾게 할 것이다. 일주일이나 2주일 뒤에는 귀국할 수 있을 것이다. 관리관은 그들이 준 돈을 다 가져도 좋다고 말했다. 그 돈이면 충분할 것이다. 1만 5천 파운드에다 퇴직금과 연금을 받으면, 관리관 말마따나 추운 바깥에서 따뜻한 실내로 충분히 들어갈 수 있다.             (P106)  

   

“지금은 이러쿵저러쿵 떠들고 있을 때가 아니오.” 피들러가 말했다. “당신도 불평해 봐야 아무 소용없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을 텐데 그래요. 우리 일, 그러니까 우리와 당신의 일은 개인보다 전체가 중요하다는 이론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공산주의자가 첩보 기관을 제 팔의 일부로 생각하는 것도 그 때문이고, 당신네 정보부가 영국식 염치에 싸여 있는 것도 그 때문이지요. 개인에 대한 착취를 정당화할 수 있는 것은 집단의 요구뿐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당신이 그렇게 화를 내는 걸 보니 좀 우스운 느낌이 드는 군요. 우리는 영국 생활의 도덕률을 지키기 위해 여기 온 게 아닙니다. 어쨌든...... ” 그가 부드럽게 덧붙였다. “당신의 행동도 순수주의자의 관점에서 보면 나무랄 데 없다고 할 수는 없을 것 같은데요.”          (P131-132)     

“철학이라니 무슨 뜻이오?” 리머스가 되물었다. “우리는 마르크스주의자도, 아무것도 아니오, 그냥 인간일 뿐이오.”

“그럼 기독교도인가요?”

“기독교도는 별로 많지 않아요. 내가 보기에는 그런 것 같소. 어쨌든 내가 아는 사람 중에는 기독교도가 별로 없소.”

“그럼 그 일을 하는 동기가 뭡니까?” 피들러는 끈질기게 캐물었다. “그들 나름의 철학이 있을 텐데요.”

“왜 그래야 하지요? 그들은 아마 철학을 모를 테고, 관심도 없을 거요. 누구나 다 철학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오.” 리머스는 좀 무력하게 대답했다. 

“그럼, 당신의 철학을 들어 볼까요?”

그들은 한동안 말없이 걸었다. 하지만 피들러는 단념하지 않았다. “자기가 무엇을 원하는지 모른다면, 자기가 옳다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겠습니까?”

“확신한다고 누가 그래요?” 리머스는 짜증스럽게 대답했다. 

“행동에는 정당성이 필요한 법인데, 그렇다면 어떻게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죠? 어젯밤에 말했듯이 우리는 그 점이 뚜렷합니다. 동독에서 인민 보위부는 공산당 활동의 자연스러운 연장이라고 할 수 있지요. 우리 요원들은 평화와 진보를 위한 투쟁의 전위에 서 있습니다. 공산당이 사회주의 전위이듯, 우리 보위부는 당의 전위라고 할 수 있어요. 스탈린이 그렇게 말했지요. 정보부는 공산당의 전위라고.” 피들러는 메마른 미소를 지었다. “스탈린의 말을 인용하는 것은 시대에 뒤떨어진 일이지만, 언젠가 스탈린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지요. <50만 명이 숙청당하는 것은 통계지만, 한 사람이 교통사고로 죽는 것은 국가적인 비극이다.> 스탈린은 대중의 부르주아적 감수성을 비웃는 겁니다. 스탈린은 위대한 독설가였어요. 하지만 그의 말은 아직도 진리예요. 반혁명에 맞서서 자신을 지키는 운동이 몇 사람을 착취하거나 제거하기를 망설일 수는 없습니다. 결국 그래야 하는 것이죠. 우리는 사회를 합리화하는 과정에서 우리 행동이 전적으로 옳았다고 하지는 않습니다. 어떤 로마인은 이렇게 말했지요. 당신네 기독교 성경에도 나와 있듯이, 많은 사람의 이익을 위해 한 사람을 죽이는 것은 온당한 조치라고 말입니다.”

“그럴지도 모르지요.” 리머스는 지친 듯이 대답했다. 

“그럼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당신의 철학은 뭐지요?”

“나는 당신들 모두 개새끼라고 생각할 뿐이오.” 리머스는 거칠게 말했다.          (P142-143)

         

“그게 당신들의 활동을 정당화해 줍니까. 예를 들면 그렇기 때문에 사람의 목숨을 빼앗아도 좋다는 건가요? 손님들도 붐비는 식당에 폭탄을 던져도 좋다는 건가요? 그게 당신들이 막무가내로 활동해도 좋다는 근거가 될 수 있느냔 말입니다.”

리머스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그럴지도 모르지요.”

“우리라면 그게 통합니다.” 피들러가 말을 이었다. “우리를 한 발짝이라도 앞에 나아가게만 해준다면 나는 식당에 폭탄을 던지는 것도 주저하지 않을 겁니다. 대차대조표는 나중에 만들면 되니까. 많은 여자와 아이들이 희생되었지만, 그만큼 많은 진보가 이루어졌다고. 하지만 기독교도들........ 당신네 기독교도들은 대차대조표를 아예 만들지도 않을 겁니다.”

“왜요? 그들도 자신을 방어해야 하지 않나요?”

“하지만 그들은 인간 생명의 존엄성을 믿습니다. 개개인의 영혼이 구원받아야 한다고 믿고 있지요. 그들은 희생의 가치를 믿고 있어요.”

“나는 모르겠소. 아무래도 상관없으니까. 스탈린도 별로 상관하지 않았잖소?”

피들러는 빙긋 웃었다.

“나는 영국 사람을 좋아합니다. 우리 아버지도 그러셨지요. 아버지는 영국 사람을 무척 좋아하셨어요.”

“그 말을 들으니 마음이 흐믓해지는군요.”                 (P144)   

   

“당신이 나를 믿든 안 믿든 상관없소.” 리머스는 거친 말투로 대답했다. 

피들러는 빙긋 웃으면서 말했다. 

“기쁘군요. 그 점이. 바로 당신의 장점이에요. 대단한 장점이죠. 무관심의 미덕 말입니다. 마음 한 구석에는 적개심이 조금 있고, 저쪽 구석에는 자존심이 조금 있지만, 그건 아무것도 아니에요. 녹음기에서 나오는 소리가 조금 일그러지는 정도에 불과하죠. 당신은 객관적이에요. 문득 생각이 났는데.........”                  (P147) 

    

“솔직히 말하지요.” 피들러가 대답했다. “당신도 알다시피, 전향자를 심문할 때는 두 단계가 있습니다. 당신의 경우, 첫째 단계는 거의 끝났어요. 우리가 납득할 수 있는 사실을 모두 말해주었으니까. 하지만 당신네 정보부가 핀을 좋아하는지 아니면 클립을 좋아하는지는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그건 우리가 물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고, 당신은 그것이 자진해서 대답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양쪽에서 무의식중에 선택 과정이 진행되고 있었다고 볼 수 있겠지요. 하지만 한두 달 안에 예기치 않게 그 핀과 클립에 대해 꼭 알아야할 필요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아주 귀찮은 일이긴 하지만, 언제라도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그것은 대개 두 번째 단계에서 처리되지요. 네덜란드에서 당신은 계약의 그 부분을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그래서 나를 계속 붙잡아 두겠다는 거요?”               (P148-149)  

    

남들과 떨어져 혼자 사는 사람은 명백한 심리적 위협에 노출된다. 남을 속이는 행동 자체는 특별히 힘들지 않다. 그것은 경험의 문제이고, 직업적인 전문 기술의 문제다. 대다수 사람은 쉽게 그 능력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사기꾼이나 연극배우나 도박사는 무대에서 내려와 그의 재주에 탄복하는 관객의 신분으로 돌아갈 수 있지만, 비밀 첩보원은 그런 위안을 얻을 수 없다. 상대를 속이는 것은 그에게는 무엇보다도 먼저 자신을 지키는 수단이다. 그의 적은 외부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도 있다. 그는 가장 자연스러운 충동과 맞서서 자신을 보호해야 한다. 큰돈을 벌었다 해도, 자신이 맡은 역할 때문에 면도칼 하나 마음대로 사지 못할 수 있다. 아무리 박식하다 해도 자신이 맡은 역할 때문에 진부한 말만 중얼거려야 하는 처지가 될 수도 있다. 애정이 넘치는 남편이고 아버지라면 가족한테 비밀을 털어놓는 것이 당연하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가족한테 털어놓는 것을 삼가야 한다.

자신의 속임수 속에 영원히 고립된 사람은 압도적인 유혹에 시달린다. 그 유혹을 알고 있는 리머스는 최선의 방어책에 의존했다. 혼자 있을 때라도 가면을 벗어 던지지 않고 자신이 채택한 성격이나 인격을 가진 인물로 살도록 자신에게 강요한 것이다. 발자크는 임종할 때도 자신이 창조한 인물들의 안부를 염려했다고 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창조력을 잃지 않은 리머스는 자신이 창조한 인격과 자신을 동일시했다. 그가 피들러에게 보여준 성격, 잠시도 가만있지 못하는 불안, 부끄러움을 감추고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오만함은 그가 실제로 가지고 있는 성격에 가까운 것이 아니라 본래의 성격을 연장한 것이다. 발을 조금 질질 끌면서 걷는 걸음걸이, 옷차침에 신경을 쓰지 않는 점, 음식에 대한 무관심, 술과 담배에 대한 의존도 마찬가지였다. 혼자 있을 때도 그는 이런 습관에 충실했다. 런던 본부가 저지른 잘못을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그런 습관을 더욱 과장하기까지 했다. 

관리관의 예상은 놀랄 만큼 옳았다. 피들러는 몽유병자처럼 그가 쳐놓은 그물 속으로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피들러와 관리관의 관심사가 점점 같아져 가는 것을 지켜보노라면 오싹한 느낌마저 들었다. 그들은 같은 계획에 합의했고, 그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리머스를 파견한 것처럼 느꼈다. 

어쩌면 그것이 정답인지도 모른다. 관리관이 그토록 필사적으로 보호하려고 애쓰는 특별히 중요한 인물은 바로 피들러인지도 모른다. 그런 문제에서 리머스는 전혀 호기심을 느끼지 않았다. 아무리 머리를 짜서 추론해 봐도 소용없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 추론이 맞기를 신에게 빌었다. 그의 추론이 적중했을 가능성도 있었다. 특히 그의 경우에는 가능성이 충분했다.                   (P149-150)  

     

“문트를 아십니까?” 피들러가 물었다. “그에 대해 아세요?”

“문트에 대해서는 이미 얘기했잖소.”

“맞습니다. 문트에 대해서는 이미 얘기했지요. 그는 총을 먼저 쏘고 질문은 나중에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기를 아예 꺽어 놓고 있지요. 질문이 총살보다 중요하게 여겨지는 직업에서는 이상한 방침이라고 할 수 있지요.”

리머스는 피들러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를 알아차렸다. 피들러는 목소리를 낮추어 계속 말했다. 

“상대의 답변을 두려워하는 게 아니라면 정말 이상한 방침이죠.”

리머스는 다음 말을 기다렸다. 잠시 뒤에 피들러가 말을 이었다. 

“문트는 지금까지 직접 심문한 적이 없습니다. 늘 나한테 맡겼지요. 그러면서 이렇게 말하곤 했습니다. <심문은 자네가 맡게. 그 일을 하는 데는 자네를 당할 사람이 없어. 나는 잡아올 테니까, 자네는 자백을 받아 내게.> 그는 또 이런 말도 자주 했지요. <역스파이 활동을 하는 사람은 화가와 비슷해서, 망치를 들고 뒤에 서 있다가 일이 끝나면 망치로 때려 줄 사람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가 무엇을 성취하려고 애쓰고 있는지를 잊어버린다.> 그는 나한테 <내가 자네의 망치가 되어 주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습니다. 처음에는 우리끼리 통하는 농담이었지만, 그게 차츰 중요해지기 시작했어요. 당신 말대로 문트가 아직 자백하지도 않은 사람들을 죽이기 시작했을 때였죠. 여기저기서 살해되었습니다. 나는 문트한테 이유를 물었고, 부탁도 했습니다. <왜 그들을 체포하지 않느냐? 왜 내가 심문할 시간을 한두 달이라도 주지 않느냐? 그들이 죽어 버리면 당신한테 무슨 도움이 되느냐?> 그러자 문트는 고개를 저으면서, 엉겅퀴는 꽃을 피우기 전에 잘라 버려야 한다고 말했어요. 내가 그 질문을 하기 전에 문트가 미리 대답을 준비해 놓고 있었던 듯한 느낌이 들더군요. 문트는 훌륭한 첩보원입니다. 아주 훌륭하죠. 당신도 알다시피 문트는 우리 보위부에서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지요. 그리고 나름대로 이론도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밤늦게 문트와 이야기를 나누곤 했지요. 문트는 커피를 마십니다. 다른 건 절대 안 마시고 항상 커피만 마시죠. 그의 말에 따르면, 독일인은 너무 내성적이어서 훌륭한 첨보원이 될 수 없다는 거예요. 그리고 방첩 활동에서 그 점이 여실히 드러난답니다. 방첩 활동에 종사하는 자들은 말라비틀어진 뼈다귀를 씹고 있는 늑대 같다고, 그들이 새로운 사냥감을 찾게 하려면 그 뼈다귀를 빼앗아야 한다는 거예요. 그건 나도 압니다.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합니다. 하지만 문트는 지나쳤어요. 문트는 왜 피어레크를 죽였을까요? 왜 피어레크를 내 손에서 빼앗아 갔을까요? 피어레크는 신선한 먹이였는데, 우리는 아직 뼈에서 고기를 발라내지도 않은 상태였어요. 그런데 왜 피어레크를 제거 했을까요? 어째서?”

피들러의 손이 리머스의 팔을 단단히 움켜쥐고 있었다. 캄캄한 차안에서 리머스는 피들러의 감정이 무서울 만큼 격렬해진 것을 알아차렸다. 

“나는 밤낮으로 그걸 생각했습니다. 피어레크가 사살된 이후 줄곧 그 이유를 찾았어요. 처음에는 상상이 지나치다고 생각했지요. 나는 질투심에 사로잡혀 있다고, 그 일로 내가 흥분해 있다고, 내가 모든 나무 뒤에서 배신자를 찾고 있다고. 우리와 같은 세계에서 일하는 자들은 그렇게 되기 십상이라고 나 자신을 타일렀습니다. 하지만 나도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진상을 알아야 했어요. 전에도 다른 일들이 있었습니다. 문트는 두려워했습니다. 지나치게 많이 털어놓는 첩자가 우리한테 넘어올까 봐 두려워한 겁니다!”                 (P159-160)     

그것은 그렇게 작은 세계였다. 그녀는 그들이 좀 더 정직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 역시 그 모든 일에 자신을 속였다. 다른 사람들도 모두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어쩌면 다른 사람들은 <왜> 그렇게 거짓말을 많이 해야 하는지를 더 잘 알고 있었을 것이었다. 그녀가 지부 서기로 임명된 것은 아무래도 이상했다. <우리의 젊고 열성적이고 매력적인 동지> 리즈를 서기로 추천한 것은 멀리건이었다. 그녀를 서기로 뽑아 주면 자기랑 같이 자줄 거라고 그는 생각했다. 다른 당원들은 리즈를 좋아했기 때문에, 그리고 리즈가 타자를 칠 줄 알기 때문에 찬성표를 던졌다. 그녀라면 그런 일을 해줄 것이고, 주말마다 선거 운동이나 신문을 팔러 다니게 하려고 애쓰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어쨌든 너무 자주 그러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에 찬성표를 던졌다. 그들은 고상하고 품위 있는 모임, 유쾌하고 혁명적이지만 소란스럽지는 않은 모임을 원했기 때문에 찬성표를 던졌다. 그것은 모두 지독한 기만이었다. 엘릭은 이런 사정을 이해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그것을 진지하게 생각지 않았다. 언젠가 그는 <어떤 사람은 카나리아를 키우고, 어떤 사람은 공산당에 입당하지>하고 말한 적이 있는데, 그 말은 사실이었다. 어쨌든 남부 베이스워터에서는 그 말이 사실이었고, 지구 위원회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선발된 것이 기묘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P166-167)  

   

이따금 그녀는 엘릭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사람은 무언가를 믿을 필요가 있기 때문에 믿을 뿐이고, 믿음의 대상 그 자체는 아무 가치도 없고 기능도 없다. 엘릭은 또 이런 말도 했다. <개는 가려운 곳을 긁지. 개마다 가려운 곳은 달라.> 아니야 그 말은 틀렸어. 천만의 말씀이야. 평화와 자유와 평등, 그것은 엄연히 존재하는 사실이야. 그리고 역사, 그 모든 법칙을 당이 증명하고 있어. 앨릭이 틀렸어. 진리는 사람의 내부가 아니라 외부에 존재해. 그건 역사에서 실제로 입증됐어. 개인은 진리에 따라야 하고, 필요하면 진리에 굴복해야 돼.          (P188)     


“어둠 속에서는 모든 고양이가 비슷해 보이는 법이오. 문트. 스마일리는 일이 잘못 될 수도 있다고 입버릇처럼 말했소. 우리 작전이 우리가 막을 수 없는 반작용을 일으킬 수도 있다고 말했지요.   (.....)”          (P228) 

    

“물론 나도 괴로워. 수치심과 분노 때문에 가슴이 메슥거려..... 하지만 나는 당신과는 다르게 성장했어. 나는 문제를 흑과 백으로 볼 수가 없어. 이 게임을 하는 사람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있어. 피들러는 게임에 졌고 문트는 이겼어. 런던이 이겼어. 그게 중요한 핵심이야. 물론 더럽고 비열한 공작이었지. 하지만 기대했던 성과를 올렸어. 그게 이 게임의 유일한 규칙이야.”                (P244-245)     

“도대체 뭘 불평하고 있는 거지?” 리머스가 거칠게 물었다. “당신의 당도 늘 전쟁을 하고 있잖아? 대중을 위해 개인을 희생시킨다고 말하지. 사회주의의 현실은 밤낮으로 싸우는 것이다. 그 무자비한 전투. 그게 공산당이 말하는 거잖아? 적어도 당신은 살아남았어. 나는 공산주의자들이 인명의 고귀함을 역설했다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없어. 어쩌면 내가 잘못 생각했는지도 몰라.” 그는 빈정거리는 투로 덧붙였다. “그래 당신이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건 인정해. 그럴 가능성도 있었어. 문트는 사악한 돼지야. 당신을 살려 줄 필요가 전혀 없다고 생각했지. 문트는 당신에 대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했겠지만, 문트의 약속은 별로 믿을 게 못 돼. 그러니까 당신은 죽었을지도 몰라. 오늘이나 내년, 아니면 20년 뒤에 노동자의 낙원에 있는 감옥에서 죽었을지도 모르지. 그리고 나도 마찬가지야. 하지만 내가 기억하기에 공산당은 모든 계급을 파괴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는 것 같아. 아니면 내가 잘못 생각했나?”

그는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내 성냥갑과 함께 담배 두 개비를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담배에 불을 붙여 한 개비를 리머스에게 건네주는 그녀의 손가락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당신이 그 모든 것을 생각해 냈군요. 그렇죠?” 리즈가 물었다.

“우리는 우연히 조건에 맞았던 것뿐이야.” 리머스는 고집스럽게 말했다. “유감이야. 다른 사람들, 조건에 맞은 다른 사람들도 안됐어. 하지만 표현에 대해서는 불평하지 마. 그건 공산당의 표현이야. 작은 희생으로 큰 이익을 얻는다거나, 다수를 위해 한 사람을 희생시킨다는 따위 말이야. 희생자를 고르는 것, 계획안을 실제로 사람들한테 적용하는 것이 재미없다는 건 나도 알아.”             (P245-246)  

   

“이 게임에는 규칙이 하나뿐이야.” 리머스가 대꾸했다. “문트는 영국 정보부 사람이야. 정보부가 요구하는 것을 제공하지. 아주 이해하기 쉽잖아? 레닌주의는 전략상의 일시적 동맹을 역설하지. 당신은 스파이를 뭐로 생각하는 거야? 스파이가 성직자나 성인이나 순교자라도 되는 줄 알아? 스파이는 허영심 많은 바보들의 한심한 행렬이야. 물론 반역자들이기도 하지. 동성애자, 사디스트, 술고래, 타락한 생활에 활기를 주려고 카우보이와 인디언 놀이를 하는 자들이야. 그들이 런던에 수도승처럼 앉아서 옳은 것과 그런 것을 비교하고 있는 줄 알아? 나도 할 수만 있다면 문트를 죽였을 거야. 나는 문트를 마음속 깊이 미워하고 있어. 하지만 지금은 안 돼. 공교롭게도 지금은 그들에게 문트가 필요하니까. 당신이 찬미하는 어리석은 대중들이 밤에 침대에서 단잠을 잘 수 있게 하려면 문트가 필요하니까. 당신과 나 같은 평범한 서민의 안전을 위해서는 문트가 필요하니까.”

“하지만 피들러는요? 피들러에 대해서는 아무 감정도 느끼지 않나요?”

“이건 전쟁이야. 가까운 거리에서 소규모로 치러지는 전쟁이기 때문에 생생하고 불쾌하지. 때로는 무고한 사람의 목숨을 희생해야 하는 경우도 있어. 그건 나도 인정해. 하지만 그건 아무것도 아니야. 다른 전쟁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야. 지난번 전쟁이나 앞으로 일어날 전쟁에 비하면.”

“맙솟.” 리즈는 낮은 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모르는 군요. 알고 싶어 하지도 않아요. 당신은 자신을 납득시키려고 애쓰고 있어요. 그들이 하고 있는 짓은 그보다 훨씬 무서워요. 나처럼 이용할 수 있는 사람한테서 인간성을 찾아내어, 그것을 무기로 바꿔 남을 해치고 죽이는데 이용.......”

“그만!” 리머스가 소리쳤다. “세상이 시작된 이래 인류가 해온 일이 그것 말고 또 뭐가 있지? 나는 아무것도 믿지 않아. 파괴나 무정부 상태도 좋게 생각지 않아. 나는 죽이는 데 넌더리 나지만, 그들이 달리 어떻게 할 수 있겠어? 그들은 남을 개종시키지 않아. 설교단이나 당의 연단 위에 서서 평화를 위해, 하느님을 위해 싸우라고 말하지 않아. 그들은 설교자들이 서로 상대를 하늘 높이 날려 보내지 않도록 막으려고 애쓰는 가엾은 사람들이야.”

“아니에요.” 리즈는 절망적으로 외쳤다. “그들은 우리 모두보다 훨씬 사악해요.”

“당신을 사랑했기 때문에? 떠돌이 노동자로 생각하고 동정해 준 당신과 동침했기 때문에?” 리머스는 잔인하게 물었다. 

“경멸하기 때문이에요. 진실과 선의를 무시하고, 사랑을 무시하고.....”

“그래.” 리머스는 갑자기 맥이 빠진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우리가 치르는 대가야. 하느님과 카를 마르크스를 똑같이 무시하는 것. 당신의 말뜻이 그거라면.”

“그러면 당신도 똑같은 사람이 돼요. 문트나 그밖의 사람들과 똑같아져요..... 나는 왜 몰랐을까요. 이용당하고 있다는 것을. 그들에게 그리고 당신에게. 당신은 그러거나 말거나 상관하지 않으니까요. 피들러만 나를 이용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나를......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대가로 지불할 돈처럼 취급했어요...... 당신들은 똑같아요, 앨릭.”

“리즈.” 그는 절망적으로 말했다. “제발 나를 믿어줘. 나는 그게 싫어. 다 싫어. 나는 지쳤어. 하지만 그게 세상이야. 인류는 미쳤어. 우리는 돈을 주고 살 수 있는 하찮은 물건에 지나지 않아...... 하지만 어디나 다 마찬가지야. 속은 사람, 잘못 인도된 사람, 헛되이 보낸 평생, 총살당한 사람, 감옥에 갇힌 사람, 아무 이유도 없이 통째로 말살 당한 집단과 계층, 그리고 당신의 당은 분명 보통 사람들의 시체 위에 세워졌어. 당신은 나처럼 사람이 죽는 것을 본 적이 없겠지.....”

그가 말하는 동안 리즈는 우중충한 감옥 안마당을 생각해 냈다. 여자 교도관은 이렇게 말했다. <자기는 잘못을 저지를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역사의 진행을 늦추려고 애쓰는 사람들을 가두어 두는 감옥이죠.>                 (P246-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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