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애수The End of the Affair> 1999년
영화 <사랑의 종말>(1955)
〈애수〉는 〈제3의 사나이(The Third Man)〉(1949년)의 원작자이자 유명한 영국 소설가 그레이엄 그린(Graham Greene)의 자전적인 소설 <사랑의 종말(The end of affair)>을 닐 조단이 직접 각색, 감독한 영화다. 동일한 원작으로 이미 〈사랑의 종말〉이라는 원제 그대로 1955년 에드워드 드미트릭(Edward Dmytryk) 감독에 의해 데보라 카, 밴 존슨 주연으로 영화화된 적이 있으니 리메이크 작품이라고도 할 수 있다. 1999년 골든글로브 작품상, 감독상, 여우주연상 등의 후보에 올랐지만 수상하지는 못했다.
이야기는 시작이나 끝이 있는 게 아니고, 화자(話者)가 경험의 특정한 순간을 제 나름으로 선택해서 거기서부터 뒤돌아보거나 앞을 내다보는 것이다. 나는 — 상당히 유명해졌을 때 — 기교가 돋보인다는 찬사를 들은 직업 작가로서의 막연한 자부심에서 ‘화자가 선택한다’고 했지만 1946년 1월 비 오는 캄캄한 밤, 빗물이 넓은 강을 이룬 공원을 비스듬히 가로질러 걸어 오는 헨리 마일스를 본 그 순간을 선택한 것은 과연 내 의지였을까, 아니면 그 심상이 나를 선택한 것일까? 통상적인 내 창작 기법에 따라 바로 거기서 시작하는 것이 편리하고 적절한 게 사실이지만, 만약 내가 당시 하느님을 믿었다면 어떤 손이 팔꿈치를 잡아당기며 “저이한테 말을 건네렴. 저이는 아직 너를 보지 못했어.”라고 넌지시 이끌었다는 것도 믿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왜 그에게 말을 건네야 했을까? 증오가 사람과의 관계에서 사용하기에 지나치게 도를 넘은 말이 아니라고 한다면 나는 헨리를 증오했다. 그의 아내 세라도 증오했다. 그리고 헨리도 그날 밤 그 일이 있은 지 얼마 안 가서 나를 증오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때때로 아내도 증오하고, 또 당시에는 세라와 내가 다행히도 믿지 않았던 또 다른 존재도 증오했을 게 틀림없다. 그러므로 이것은 사랑의 기록이라기보다는 증오의 기록에 훨씬 더 가까우며, 따라서 만약 내가 헨리와 세라를 두둔하는 말을 한다면 그대로 믿어 주어도 될 것이다. 나는 편견에 휘둘리지 않으며 애쓰며 글을 쓰고 있다. 왜냐하면 직업 작가로서의 내 자존심은 증오에 가까운 감정을 표현하는 것보다도 진실에 가깝게 그려 내는 것을 더 좋아하기 때문이다. (P11-12)
“세라는 잘 지내나?” 묻지 않으면 이상할 것 같아서 내가 물었다. 그녀가 아프다거나 불행하다거나 죽어 간다는 말을 듣는다면 더 없이 기쁠 것 같았다. 그 당시 나는 세라가 어떤 식으로든 고통을 겪는다면 내 고통은 줄어들 것이고, 혹시 그녀가 죽기라도 한다면 나는 해방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죽는다면 내가 처한 비루한 상황에서는 누구나 상상할 법한 그 모든 것들을 이제 나는 더 이상 상상하지 않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세라가 죽는다면 심지어 가엾고 어리석은 헨리조차도 좋아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P14)
“만나서 반가워요.” 내가 말했다. 이것도 증오의 순간 중 하나였다. “산책 다녀온 거예요?”
“네.”
“날씨가 참 고약한 밤이군요.” 내가 비난조로 말하자 헨리가 걱정된다는 듯이 덧붙였다. “흠뻑 젖었어, 세라. 이러다가 감기에 걸려 죽겠어.”
일반적으로 쓰이는 상투적 표현이 운명의 통고처럼 대화에 끼어드는 수가 있다. 그러나 설사 그가 사실을 얘기했다는 걸 우리가 알았다 해도 우리 둘 중 누가 안달하고 불신하고 증오하면서도 그녀의 파멸을 진실로 불안해했을지 궁금하다. (P33)
나는 과거의 그때를 그냥 내버려 두고 싶었다. 왜냐하면 1939년의 일을 쓸 때면 나의 모든 증오가 되살아나는 것을 느끼기 때문이다. 증오는 사랑이 작동시키는 분비샘과 동일한 분비샘을 작동시키는 것 같다. 심지어 사랑이 초래하는 행동과 동일한 행동을 초래한다.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의 수난 이야기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배우지 않았다면 과연 우리는 그리스도를 사랑한 사람이 질투 많은 유다였는지 아니면 비겁한 베드로였는지 그들의 행동만으로 알 수 있겠는가? (P47-48)
사람은 행복하기만 하면 어떤 규율도 견뎌 낼 수 있다. 글쓰기 습관을 깨뜨린 것은 바로 불행이었다. 우리가 얼마나 자주 다투는지, 내가 얼마나 자주 짜증을 부리며 그녀의 신경을 건드리는지 깨달았을 때 나는 우리의 사랑이 불행한 운명을 맞이하리라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사랑이 시작과 끝이 있는 정사로 변한 것이었다. 나는 사랑이 시작된 그 순간을 말할 수 있었다. 그리고 어느 날, 사랑이 끝난 마지막 시간을 말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세라가 가고 나면 나는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나는 우리가 주고받은 말을 곱씹으며 스스로 분노와 회한을 부채질했다. 그리고 언제나 내가 그 발길을 재촉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내가 사랑한 유일한 것을 내 인생에서 자꾸만 몰아내고 있었다. 사랑은 오래도록 변치 않는 것인 척할 수 있는 한 나는 행복했다. 심지어 나라는 사람은 함께 살기 좋은 사람이고 따라서 사랑도 변치 않을 것처럼 나 자신을 속였던 것 같다. 그러나 사랑이 죽어야 한다면 빨리 죽어 버리기를 바랏다. 우리의 사랑은 덫에 걸려서 피를 흘리며 죽어 가는 조그만 짐승과도 같았다. 나는 눈을 질끈 감고 그 목을 비틀어야만 했다.
그래서 나는 그동안 글을 쓰지 못했다. 앞에서 말했듯이 소설가의 글쓰기 작업의 태반은 무의식중에 일어난다. 그러한 깊은 무의식 속에서 첫 단어가 종이 위에 나타나기도 전에 마지막 단어가 써지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이야기의 세부적인 내용을 기억하는 것이지 그걸 지어내는 것이 아니다. 전쟁도 그러한 심해 동굴을 방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 나에게는 전쟁보다, 내 소설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그것은 사랑의 종말이었다. 그것이 지금 하나의 소설처럼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었다. 세라를 울린 날카로운 말이, 아주 자연스럽게 입 밖으로 나온 것 같았던 그 말이 실은 그동안 그 심해의 동굴 속에서 날카로워지고 있었던 것이다. 내 소설은 진행이 더뎠지만, 내 사랑은 영감에 고취된 것처럼 종말을 향해 달음질쳤다. (P60-61)
만약 이 소설이 똑바로 나아가지 못한다면, 그 이유는 내가 이상한 데서 길을 잃었기 때문이다. 나는 지도를 가지고 있지 않다. 나는 종종 내가 여기에 쓰고 있는 것이 과연 진실인지 의문스러울 때가 있다. 그날 오후, 묻지도 않았는데 그녀가 갑자기 “난 당신을 사랑하는 것만큼 그 누구도 그 무엇을 사랑해본 적이 없어요.”라고 말했을 때 나는 더없는 신뢰감을 느꼈다. 반쯤 먹은 샌드위치를 손에 들고 의자에 앉아 있는 세라는 마치 5분 전에 그 딱딱한 마룻바닥에서 그랬던 것처럼 자신을 완전히 방기하고 있는 듯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처럼 완전한 말을 하는 것을 꺼린다. 과거를 떠올리고 앞날을 예상하고 의문을 품기 때문이다. 세라는 의문을 품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이 순간만이 중요했다. 영원이란 시간의 확장이 아니라 시간의 부재라고 한다. 때때로 내 눈에는 그녀가 자신을 방기하는 태도가 무한이라는 그 이상한 수학적 지점 — 폭도 없고 공간도 차지하지 않는 지점 — 에 닿아 있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었다. 시간이 뭐가 중요한가? 세라의 모든 과거와 그녀가 때때로 만났을 다른 남자들(또 이런 말을 하는군), 또는 그녀가 똑같은 진실한 감정으로 똑같은 말을 할지도 모르는 모든 미래, 이런 것이 뭐가 중요하단 말인가? 내가 나도 그만큼 그녀를 사랑한다고 대답했을 때, 그녀는 거짓말쟁이가 아니었지만 나는 거짓말쟁이였다. 왜냐하면 나는 결코 시간에 대한 의식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내게는 현재가 여기에 존재한 적이 한 번도 없다. 나에게 현재는 언제나 작년이거나 다음 주 같은 것이다. (P90-91)
“우리는 — 어떤 면에서는 — 사랑의 종말에 이르렀던 것 같아. 우린 달리 함께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어. 세라는 자네하고는 함께 쇼핑을 하고 요리를 하고 잠이 들 수 있었지만, 나하고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사랑을 나누는 것뿐이었지.”
“세라는 자네를 무척 좋아해.” 그는 마치 나를 위로해 주는 것이 자기 일인 양, 쓰라린 눈물에 젖었던 눈이 내 눈인 양 말했다.
“좋아하는 걸로는 만족하지 못하네.”
“난 그걸로 만족했네.”
“나는 사랑이 끊임없이 계속되기를 원했어. 시들어 가는 일 없이....” 나는 세라 말고는 누구에게도 이런 말을 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헨리의 대답은 세라의 대답과는 달랐다. 헨리가 말했다. “그건 인간의 본성이 아냐. 우린 만족할 줄 알아야 해.....” 세라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빅토리아 공원에서 그렇게 헨리 옆에 앉아 하루가 저물어 가는 것을 보면서 나는 모든 ‘사랑’의 종말을 떠올렸다. (P119-120)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나는 정말 당신이 죽은 줄 알았어요.”
“그렇다면 기도할 것이 별로 없었을 텐데. 안 그래요?” 나는 세라를 놀렸다. “기적을 바라는 거 말고는.”
“희망이 아주 없을 땐,” 그녀가 말했다. “기적을 바라는 기도를 올릴 수밖에요. 기적은 가련한 사람들에게 일어나는데, 내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잖아요.” (P127-128)
“사람들이 정말 당신을 찾아오나요? 남몰래 말입니다.”
“알면 놀라실 거예요.” 미스 스마이스가 말했다. “사람들은 희망의 메시지를 간절히 바라고 있거든요.”
“희망?”
“예, 희망.” 리처드 스마이스가 말했다. “만약 온 세상 사람들이 이 지상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이 전부이고 그 밖의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걸 안다면, 그 어떤 내세의 보상도 응보도 천벌도 없다는 걸 안다면, 어떤 희망이 생겨날 것인지 당신은 모르겠습니까?” 그의 얼굴은 한쪽 뺨이 눈에 띄지 않으면 무척 고귀해 보였다. “그렇게 되면 우린 이 세상을 천국처럼 만들기 시작할 겁니다.” (P145-146)
“난 세라가 죽었다는 것을 자꾸 잊어버리고 있네.” 헨리가 말했다. 나도 1945년 — 비참한 한 해였다 — 내내 그와 같은 경험을 했었다. 눈을 뜨면 우리의 사랑이 끝났다는 것을 잊어버렸고, 전화가 오면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세라가 아닌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자꾸 잊어버리곤 했다. 나에게 세라는 그때도 지금처럼 죽어 있었다. 그랬는데 올해 한두 달 유령이 나타나서 희망으로 내게 고통을 주었다. 그러나 그 유령이 누워 버렸으니 이제 고통도 끝날 것이다. 나는 매일 조금씩 죽어갈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그 고통의 감정을 간직하고 싶어 하는 것이었다. 사람은 고통스러워하는 한 살아 있는 것이니까. (P252-253)
나는 부서진 계단을 올라가서 현관 안으로 들어섰다. 스테인드글라스 말고는 1944년 그날 밤과 같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어떤 일이 시작된 지점이 어디인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없다. 세라는 죽은 줄 알았던 내 몸을 보았을 때 종말이 시작되었다고 믿었다. 그녀는 그보다 훨씬 오래전에 종말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절대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이미 오래전에 이런저런 억지스러운 이유로 전화를 덜 하게 되었다는 것, 사랑이 끝날 것 같은 위험을 알아차렸기에 내가 그녀와 말다툼을 하기 시작했던 것에서부터 종말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그녀는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우리는 이미 이후를 내다보기 시작했으나, 우리가 그 방향으로 치닫고 있다는 것을 알아챈 사람은 나 혼자뿐이었다. (P264-265)
나는 장례식에 늦었다. 조그만 평론지에 내 작품에 대한 평론을 쓰려는 워터베리라는 사람을 만나러 시내에 들렀기 때문이다. 나는 그를 만나러 갈지 말지를 결정하기 위해 동전 던지기를 해 보았다. 나는 그가 거만한 문구를 구사하여 평론을 쓴다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내가 모르고 있던 숨은 의미와, 맞닥뜨리고 싶지 않은 결함을 발견해 낼 것이다. 마지막에는 생색을 내면서 아마도 나를 몸보다 조금 더 위에 올려 놓을 것이다. 몸은 대중적이지만 나는 아직 그 죄를 범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면서 말이다. 아직은 말이다. 그러나 비록 내가 지금은 성공에 연연하지 않는 배타적인 태도를 얼마간 유지하고 있긴 하지만, 조그만 평론지들은 민첩한 탐정처럼 금세 수상쩍은 냄새를 맡을 수 있다.
왜 내가 굳이 동전 던지기를 했을까? 나는 워터베리를 만나고 싶지 않았고, 내 작품이 평해지는 것을 결코 원치 않았다. 이제는 내 작품에 대한 흥미가 사그라들었기 때문이다. 누가 칭찬한다고 해서 기쁘지도 않았고 비난한다고 해서 기분이 상하지도 않았다. 관료에 관한 소설을 쓰기 시작했을 때만 해도 나는 아직 흥미가 있었지만, 세라가 나를 떠나고 난 뒤에는 내 작품을 과장 없이 있는 그대로 인식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그것은 몇 주일 혹은 몇 해에 걸쳐 달고 사는 담배나 약물만큼이나 하찮은 것이라는 인식이었다. 만약 우리가 죽음으로써 소멸되는 존재라고 한다면 — 나는 아직도 이 생각을 믿으려 한다 — 죽은 뒤에 몇 권의 책을 남기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으며, 술병이나 옷이나 값싼 보석을 남기는 것과 다를 게 뭔가? 그리고 만약 세라의 생각이 옳다면 예술의 그 모든 의의가 얼마나 하찮은 것인가? 내가 동전 던지기를 한 것은 단순히 외로움 때문이었던 것 같다. 장례식 이전에는 할 일이 아무것도 없었으므로 나는 한두 잔의 술로 마음을 다잡고 싶었다(사람들은 자신의 일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을 수 있으나 관습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다. 사나이는 사람들 앞에서 허물어지면 안 된다). (P270-271)
그녀의 역 앞 공터까지 나를 바래다준 다음 돌아가려고 했다. 그녀가 이토록 큰 수고를 해 준 것이 내게는 낯설고 이상해 보였다. 나는 나에게 여자들이 좋아할 만한 어떤 자질이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그랬다. 슬픔과 실망은 증오와 흡사해서 자기 연민과 신랄함으로 사람을 추하게 만든다. 또한 우리를 매우 이기적으로 만들기도 한다. 나는 실비아에게 줄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의 스승 중 한 사람이 될 생각도 없었다. (P286)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해. 나는 2층으로 올라가면서 속으로 중얼거렸다. 세라는 이제 죽은 지 꽤 됐어. 죽은 사람을 계속 이처럼 강렬하게 사랑할 수는 없어. 오직 살아있는 사람만을 그렇게 사랑할 수 있는데, 세라는 살아 있지 않아. 살아 있을 수 없어. 세라가 살아 있다고 믿어선 안 돼. 나는 침대에 누워 눈을 감고 사리에 맞게 생각하려 애썼다. 내가 종종 그러하듯이 세라를 무척이나 증오한다면 어떻게 그녀를 사랑할 수 있을까? 누군가를 정말로 증오하면서 동시에 사랑할 수도 있는 걸까? 어쩌면 내가 정말로 증오하는 것은 오직 나 자신뿐인 게 아닐까? 나는 대수롭지 않은 얕은 재주로 쓴 나의 책들을 증오한다. 나는 소설의 이야깃거리에 탐욕스러운, 그리하여 내가 쓰려는 소설의 정보를 얻기 위해 좋아하지도 않은 여자를 유혹하기 시작한 내 안의 작가 정신을 증오한다. 나는 그토록 많은 쾌락을 즐겼으면서도 마음이 느끼는 것을 잘 표현하지 못하는 이 육체를 증오한다. 그리고 나는 파키스를 감시자로 고용해서 초인종에 가루를 뿌리게 하고 휴지통을 뒤져 당신의 비밀을 훔쳐 내게 한 나의 의심 많은 마음을 증오한다. (P332-333)
나는 집으로 돌아와서 다시 소설을 써 보려 했다. 소설을 쓸 때마다 나는 늘 도무지 생생히 살아나지 않는 인물이 하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인물의 묘사에 심리적인 오류가 있는 것이 아닌데도 그는 꼼짝도 하지 않으려 해서, 나는 독자들에게 그 인물을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려고 그를 이리저리 떠밀어야 하고, 그를 위한 언어를 찾아야 하고, 오랜 세월에 걸쳐 어렵게 터득한 모든 기교를 발휘해야 한다. 때로는 비평가가 내 소설에서 그 인물이 가장 잘 그려졌다고 칭찬을 해서 씁쓸한 만족감을 느끼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가 잘 그려지지 않는 경우 그는 질질 끌려다녔을 게 분명하다. 그는 내가 작업을 시작할 때마다 마치 배 속의 잘 소화되지 않은 음식처럼 내 마음속에 거북하게 걸리적거리고, 그가 나오는 어떤 장면에서나 내게서 창작의 기쁨을 빼앗아 가 버린다. 그는 예기치 않은 일을 하는 법이 없고, 나를 놀라게 하는 일도 없고, 책임을 지는 법도 없다. 다른 모든 인물은 도움을 주지만 그만은 방해를 할 뿐이다.
그럼에도 그 없이는 소설이 되지 않는다. 하느님도 우리 중 어떤 사람에 대해서 그와 같이 느낄 거라고 생각된다. 성인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스스로를 창조한다고 여길 수 있다. 그들은 생생히 살아 있다. 그들은 놀라운 행동이나 말을 할 줄 안다. 그들은 플롯의 바깥에 서 있고, 플롯에 구애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런 성인들과는 달리 우리는 이리저리 떠밀리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유통성이 없고 고집이 세다. 우리는 도저히 벗어날 수 없을 만큼 플롯에 얽매여 있어서 하느님은 피곤해하면서 하는 수 없이 자신의 외모에 따라 우리를 이리저리 밀고 다닌다. 우리는 시심(詩心)이 없고 자유의지도 없는 인물들이다. 우리의 유일한 가치는 어느 시점, 어느 장소에서 살아있는 인물이 움직이고 말하는 장면을 꾸미는 데 도움을 주고, 성인들이 그들의 자유의지를 발휘할 기회를 제공해 주는 데 있을 따름이다. (P338-339)
나는 이 글을 시작하면서 이것은 증오의 기록이라고 썼다. 헨리와 저녁 맥주를 한잔 걸치러 걸어가면서 나는 이 겨울 분위기에 어울릴 법한 기도를 하나 생각해 냈다. 오, 하느님, 당신은 할 만큼 했습니다. 저에게 충분히 빼앗아 갔잖아요. 저는 사랑을 배우기엔 너무 지쳤고 너무 늙었습니다. 저를 영원히 혼자 있게 놔두세요. (P351)
이 소설은 사랑과 증오의 이야기인 동시에 신앙의 이야기이다. 벤드릭스와 세라는 누가 누구를 더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을 만큼 지극히 서로 사랑한다. 둘의 육체적 사랑은 강렬하며 더없이 만족스러운데, 그것은 인간 경험의 한 정점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벤드릭스는 이 사랑을 방해하는 것들을 증오한다. 그래서 세라의 남편 헨리를 미워하고, 세라를 빼앗아 간 신을 증오한다. 작품의 서두에서 화자인 벤드릭스는 이것은 사랑의 기록이라기보다는 증오의 기록에 훨씬 더 가깝다고 말한다. 이후 벤드릭스의 의식을 통해 보게 되는 증오의 모습, 질투의 모습은 가히 압권이다. 독자는 작가의 예리한 펜이 이끄는 대로 속절없이 끌려 들어가 우매하고 옹졸하고 변덕스러운 사랑의 민낯을 확인하고는 경악한다. 그러면서도 화자의 모습에서 얼마간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씁쓰레한 미소를 지을 것이다. 어쩌면 증오는 사랑의 반대가 아니라 사랑과 한 몸이고, 질투 없는 사랑은 사랑도 아닌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 제임스 설터라는 작가는 <소설을 쓰고 싶다면>에서 소설은 전적으로 꾸며 낸 게 아니라 완벽하게 알고 자세히 관찰한 것에서 비롯되며, 거의 모든 위대한 소설에는 그 안에 실제 사람이 담겨 있다는 말을 했는데, 이 소설에서 느끼는 공감의 원천 역시 작가가 그린 사랑의 모습에 관념이 아니라 실제 사람이 담겨 있기 때문이리라. (P374, 옮긴이의 말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