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타자기]
물론 나는 알고 있다.
오직 운이 좋았던 덕택에
나는 그 많은 친구들보다 오래
살아남았다.
그러나 지난밤 꿈속에서
친구들이 나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강한 자는 살아남는다.”
그러자 나는 내 자신이 미워졌다.
-베르톨트 브레히트 ‘살아남은 자의 슬픔’
무릎 수술을 하고 나서 잠시 마음에 방황을 했던 것 같다. 나는 목발을 짚고 나가기도 뭐하고 골방에 틀어 박혀 이런저런 잡(雜) 생각에 잠을 못 이루었다. 마치 꿈을 꾸듯, 현실이 꿈인지, 꿈이 현실인지 모를 그럴 시간들이었다. 책상 한 귀퉁이에 있는 마라톤 타자기를 쳐다본다. 지금은 PC컴퓨터의 자판기를 두드리면 되는데, 대학시절 자취방 한 켠에 있던 타자기를 볼 때마다, 옛 기억들이 스멀스멀 기어 나오는 것 같았다. 문건을 만들거나 자료 조사했던 것들을 정리할 때 독수리타법으로 치던 기억에서부터. 우리의 삶이 길게 잡아 백년을 산다고 보면, 우주의 시간으로 보면 아마도 한 순간일지 모른다. 아마도 1/500초도 길지 않을까. 그런 세상을 비유와 상징으로 표현한다고 무슨 의미가 있을지, 인생이 덧없다는 느낌만 차곡차곡 쌓아두는 것 같다. 쓰다 버린 원고지처럼 무수히 많은 글들이 컨트롤Ctrl+X 지워지고, Ctrl+V 복사된다. Ctrl+C, Ctrl+V 무한반복 재생된다. 인생은 무한 반복된다. 아마도 강태공(姜太公)은 인생이 반복되리라고 믿고 미끼도 없는 낚시줄을 던졌을 것이다.
“山悠悠,水悠悠,碧水绕村流;鱼悠悠,虾悠悠,愿者请上钩”
“산수가 유유자적하니, 푸른 물은 마을을 에워싸고 흐르네;
물고기와 새우는 유유자적하니 원하는 자는 낚시를 하오.”
시대는 많이 바뀌어갔다. 연필은 모나미 볼펜으로, 파카 만년필로, 그리고 타자기로, PC컴퓨터의 키보드로. 인류에게 있어서 기술은 진화되었고, 그 진화에는 타자기, 축음기, 카메라가 있었다. 1839년 카메라의 발명 이래, 인간의 시각은 확장되었다. 은판 사진술은 동판에서, 유리판으로, 1888년 조지 이스트먼에 의해 출시된 코닥 필름으로, 그리고 디지털 카메라로 발전되었다. 매년 사진학과 학생들도 늘어났고, 핸드폰의 사진기능으로, 전국민이 사진을 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누구나 사진을 접하고, 누구나 사진으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고, 누구나 사진예술가가 되었다. 던져질 미끼는 누구나 가지고 있는 셈이다. 누군가가 물을 미끼는 이제 컨텐츠의 내용이다. 사진의 기술적인 것은 이제 죽었고, 더욱 그 내용(content)이 무엇이냐만이 남았다.
발자크는 그의 중편소설 <사라진느>에서 여자로 가장한 한 거세된 자에 대해 말하며, 이런 문장을 쓰고 있다. “그녀의 갑작스런 두려움, 그녀의 이유 없는 변덕, 그녀의 본능적인 불안, 그녀의 까닭 모를 대담함, 그녀의 허세, 그녀의 섬세하고도 부드러운 감수성, 그것은 분명 여자였다.” 바로 이 문장을 두고, 롤랑 바르트는 “저자의 죽음” 도입부에서 이렇게 말한다.
“누가 이렇게 말하는가? 그것은 여자 아래 감추어진 그 거세된 자를 모르는 척하고자 하는 소설의 주인공인가? 아니면 자신의 개인적 체험에 의해 여성에 대한 한 철학을 가지게 된 개인 발자크인가? 또는 여성성에 대한 ‘문학적’ 관념을 언명하는 저자 발자크인가? 보편적 지혜인가? 낭만적 심리학인가? 그것을 안다는 것은 영원히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글쓰기란 모든 목소리, 모든 기원의 파괴이기 때문이다. 글쓰기는 우리의 주체가 도주해 버린 그 중성, 그 복합체, 그 간접적인 것, 즉 글을 쓰는 육체의 정체성에서 출발하여 모든 정체성이 상실되는 음화(negative)이다.”
-저자의 죽음, P303
바르트가 던지는 질문은 내게도 유효했다. 사진의 정체성은 흔들리고 있다. 아니, 정확히 말한다면, 내 자신의 정체성이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자리를 잡지 못한 것은 나였다. 마치 음화필름이 양화(positive)로 바뀌지 못한 상태. 정체성이란 필름은 암실에서 정착액으로 진화되지 못했다. 현상액에 담겨진 양화의 그림은 휘발유처럼 증발할지 모른다. 바르트는 일찌감치 저자는 죽었다고 말했다. 니체가 ‘신은 죽었다’나 푸코의 ‘인간은 죽었다’라는 말과 같은 맥락일지 모른다. 아마도 기술복제 시대의 ‘사진가는 죽었다’라고 바꾸어 말할 수 있겠다. 전복(supervision)은 묘연(杳然)해 보인다. AI시대의 사진은 사진가의 죽음에 더 큰 못질을 한다. 과연 사진은 살아남을수 있을까? 사진의 재현성, 사진의 진실성이나 사실성을 이제는 더군다나 기대하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바르트는 글쓰기의 즐거움을 예찬한다.
바르트는 순간 자신에게 차오르는 것, ‘지금’ 자신에게 ‘돌발적으로’ 다가오는 것을 즉각적으로 적는, 그날 그날 순간의 기록으로 ‘일기’를 적는 사람의 자세를 취한다. 그는 한 눈은 종이에, 다른 눈은 자신에게 들이닥치는 현재의 사건들에 집중하면서 보는 것(읽는 것)과 쓰는 것의 ‘동시성’을 추구한다. 실제로 바르트는 수첩에 떠오르는 생각들을 적었고, 이것들을 나열하고 조합하고 순서를 바꾸다가 최종 단계에 가서 타자기로 정리했다. 바르트는 수첩에 기록된 파편화된 기억들을 길게 하나로 묶을 수 있는 형식을 탐색했다. 그가 꿈꾸는 소설은 자신이 살아오면서 남긴 기록들을 영원한 것으로 만들어 줄 수 있는 것이었다.
-롤랑 바르트 음악을 읽다, P85-
사진은 죽고, 남은 건 컨텐츠, 글쓰기만 남았다. 매일 쓰는 기록, 일기(日記)는 여전히 남아 있다. 이순신의 <난중일기>가 그러하고,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의 <전쟁일기>, 발터 벤야민의 <모스크바 일기>, 다니엘 페나크의 <몸의 일기>, 숀 비델의 <서점 일기>, 롤랑 바르트의 <애도 일기>, 버지니아 울프의 <울프 일기>, 존 치버의 <존 치버의 일기>, 안네 프랑크의 <안네의 일기>, 아니 에르노의 <바깥 일기> 등 수많은 일기들이 남아 있다. 예술은 아마도 일기에서 출발할 것이다. 전몽각 사진가의 <윤미네집> 또한 그 일기의 기록이다. 그런 자신의 죽음을 기록하기 위해 우리는 자화상(Self Portrait)을 찍는지도 모른다. 저자는 죽지만, 저자의 사진은 남는다. 자크 라캉이 “거울 단계(mirror stage)”라는 이론에서처럼, 거울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통해서 자신과 동일시하는, 정체성을 확인하려고 할지 모르겠다. 우리는 정체성은 어디에 있는가? 나의 자아의 영역은 거울을 통한 지각, 동일시, 그리고 상상에 의해 형성된다. 셀프 포츄레이트는 자신의 모습을 기록함으로써 자아의 존재를 확인하고자 한다. 사진은 뭔가 허전한 자신의 공허한 욕망을 표출한다. 존재감이 부족한 사람들이 더 자신의 사진을 많이 찍는 것인지, 자신의 욕망을 극대화하려는 것인지 몰라도, 사진은 그 욕망을 유리병에 담아두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어진다. 휘발되는 기억을 담는 용도로서 말이다.
특히 프랑스의 철학자 롤랑 바르트는 메이플소프의 1975년 <자화상> 작품을 두고 푼크툼이라는 개념을 빌어 ‘완벽한 이미지는 우리가 볼 수 있는 것 이상의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착각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순간으로 구현된다’고 설명했다. 멈춰져 있는 사진의 이미지가 하나의 행위에 대한 확장된 감각뿐만 아니라, 존재, 신체, 영혼의 절대적 완벽함을 향한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느낌은 팔을 쭉 뻗으며 해사하게 웃고 있는 젊은 날의 메이플소프 사진에서 표출된다.
-2021년 2월, 국제 갤러리에서 열린 메이플소프(R. Mapplethorpe)의 국내 첫 회고전 전시 서문에서
만우절에 죽은 장국영이 그랬고, 이선균의 죽음이 그랬고, 박원순의 죽음이 그랬고, 노회찬의 죽음이 그랬다. 현실이 아마도 더 소설 같을 것이다. 소설은 어차피 현실에서 차용된 패러디일 뿐이다. 사진은 너무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어, 그런 사실성에서 덧칠을 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예술과 현실을 혼동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런 예술을 까발리고 싶었다. 이제 나는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저자는 죽고 독자는 태어난다. “독자의 탄생은 저자의 죽음이라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