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꽃향기 Oct 24. 2024

임무를 완수했습니다.

2023년 12월 어느 날의 일기


2023년 12월 어느 날의 일기



“1월 1일 자로 아시아나 마일리지가 없어진대!”

전화기 너머로 어머니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방금 문자가 왔다며 뭔가 큰일이라도 난 듯한 목소리였다. 그냥 놔두면 돈을 허공에 날리는 게 억울하지 않냐며 제주도라도 가자고 하셨다.




‘제주도’란 세 글자는 12월 시나리오에서 상상도 못한 내용이었다.




“엄마, 제주도 여행 같이 가고 싶은데 시간 내기가 힘드네요.”

수화기 너머로 섭섭함과 속상함이 전해졌다. 일단 문자 내용을 확인해야 했다. 이대로 모든 상황을 종료해 버린다면 마음속에 무거운 짐 하나가 한동안 자리 잡고 있을 것 분명했다. 도대체 왜 이 바쁜 12월에 이런 문자를 보내는 건지! 미리미리 보내 주던가! 불평불만을 가득 안고 친정으로 발길을 돌렸다.




***님, 소멸 예정 마일리지 안내해 드립니다.

소멸 예정 마일리지 : 904마일

소멸 예정 일 시: 2024년 1월 1일 00시 00분(한국 시각)



그런데 904마일이 얼마나 되는 걸까?



어머니는 허리를 다치신 후 한 달 이상 거의 매일 병원에 다니시며 물리치료를 받으셨다. 근육통 약을 복용하시니 혈압과 당 수치도 점점 나빠지셨다. 연세가 있고, 지병이 있는 상태라 연쇄적으로 몸 전체가 영향을 받았다. 올해 내내 건강이 좋지 않은 상태로 몸도 마음도 지쳐가고 있었다. 어쩌면 '제주도'란 세 글자는 어머니의 상태가 괜찮아졌다는 신호가 아닐까? 어머니의 구조 요청을 흘려들을 수 없었다. 막내딸이 소매를 걷고 뭐라도 해야 했다.




일단 아시아나 항공사 사이트에 접속해서 마일리지를 확인해야 했다. 그런데 접속부터 쉽지 않았다. 어머니의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알 리 없었다. 어머니 본인도 모르셨다. 예전에 큰언니가 만들어 줬다고 하시며 큰언니는 알고 있을 거라 하셨다. 큰언니에게 전화를 했지만 받지 않았다. '아, 한창 바쁠 시간이겠구나!'




자, 그럼 무엇을 해야 할까? 아! 그래 아이디와 비밀번호 찾기를 이용해야 했다. 휴우, 이 또한 한 번에 해결이 되지 않았다. 아이디 찾기 누르고 본인 인증받기 누르고, 휴대폰 옆에 놓고 휴대폰 번호 입력하고, 문자로 온 인증 번호 입력하고, 아이디를 찾아냈다! 비밀번호 찾기 누르고 인증받기 누르고, 휴대폰 번호 입력하고 문자로 온 인증 번호 입력하고, 비밀번호 변경 누르고 새 비밀번호 누르고, 비밀번호를 변경했다!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로그인 버튼을 눌렀다. 접속 성공!




마일리지 요 녀석이 얼마나 있는지 눈을 부릅뜨고 찾아야 했다. 분노 가득한 손가락으로 마우스를 이리저리 움직였다.

“마일리지는 *** 포인트 있네요. 그중에서 1월 1일 자로 904마일만 없어지는 거예요!”

다행이라고 말씀드렸고, 어머니도 평온해진 모습으로 미소를 지으셨다. 박수를 치며 이 험난한 단계를 마무리하려고 했다.

“그럼 904포인트 써야 하지 않니?”




역시나 한 번에 임무가 끝날 리 없었다.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정보를 확인해 보았다. 요즘은 뭐가 이리 복잡한 걸까? 예전에도 이렇게 헤맸었나? 금방 금방 찾았던 거 같은데! 머릿속이 하얘졌다. 찾았다!

‘오프라인 사용 제휴사, 이마트’

오프라인 매장이라면 핑계 김에 장을 보러 갈 수 있고, 겸사겸사 어머니의 걷기 운동에도 도움이 되겠다 싶었다. 눈앞에서 마일리지 사용을 확인하시면 더욱 좋아하시겠지?

“이마트 갑시다. 이마트 가서 마일리지 써요!”





‘7만 원 이상 구매 시 멤버십 카드를 제시하시면 차감 할인

 2,800마일 차감 (2만 원 할인)

 마일리지 사용 비밀번호 4자리 입력’

멤버십 카드는 어머니가 가지고 계시고, 비밀번호는 카드에 쓰여 있었다. 7만 원 구입하면 2만 원 할인이 된다는 정보도 확인했다. 904마일이란 녀석 때문에 이 사달이 났는데, 2,800마일을 쓸 수 있단다. 됐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

‘904마일, 이 녀석! 너를 오늘 사용해 주겠노라!’




큰 장바구니 몇 개를 들고 이마트로 향했다. 어머니는 휴지, 두부, 호박... 사야 할 물건들을 줄줄이 읊으시며 즐거워하신다. 행복해 보이는 어머니 모습을 보니 힘이 불끈 솟는다. 마침 이마트는 30주년 행사 중이었고 덕분에 저렴하게 파는 물건도 많았다. 어머니도 나도 신나게 물건을 고르고 골랐다. 두부, 콩나물, 휴지, 딸기…… 쇼핑 카트에 담고 담았다.




드디어 요 녀석을 쓸 시간이 됐다. 셀프 계산대에서 물건 바코드를 하나씩 찍으며 상품대에 올려놓았다. 띠익! 띠익! 띠익! 세상에 이보다 경쾌한 소리가 있을까? 임무 완료 시간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마일리지 사용 버튼을 누를 시간이 되었다. 어라, 마일리지 버튼이 보이지 않았다. 직원 분께 도움을 요청했다.




“여기 셀프 계산대에선 마일리지 사용이 안 돼요. 계산원이 있는 곳에서 하셔야 하는데……”

역시나 이대로 임무가 끝날 리 없었다. 주섬주섬 물건을 카트에 담으며 취소 버튼을 누르려 했다. 결제 취소를 하고 계산원이 있는 계산대로 가야 했다.

“저희가 도와드릴 테니 계산은 이쪽에서 하시죠. 물건은 그대로 두고 와 주세요.”

그래, 여기까지 얼마나 많은 단계를 밟고 왔는데, 또 다른 시련을 주시면 안 되지! 결제할 카드와 마일리지 카드를 들고 직원 분이 안내하는 계산대로 당당하게 걸어갔다.




“마일리지 카드는 휴대전화 앱으로 설치되어 있어야 해요.”

직원 분의 한 마디에 또다시 기운이 빠졌다. 사이트에서 확인할 때 그런 문구는 없었다.

“마일리지 카드 제시하고 비밀번호 누르면 된다고 했어요. 제가 분명히 확인했습니다.”

“휴대전화에 설치된 앱 카드 바코드로 고객 정보가 인식이 됩니다. 옛날 실물 카드는 인식 이 안 돼요!”

직원 분은 단호하셨다. 이젠 내가 포기할 차례였다.

“엄마, 오늘은 마일리지 못 쓰겠네요. 다음에 다시 와요!”




셀프 계산대로 돌아와 결제 버튼을 누르는 것 이외에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임무를 완수하지 못한 채 결제를 하고, 주섬주섬 물건을 장바구니에 담았다. 한 번 더 이곳에 오는 건 어렵지 않겠지만 오늘의 노력이 모두 물거품이 되어 버린 터라 허무하다 못해 슬퍼지기까지 했다. 전화를 받은 순간부터 벌어진 모든 일들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지나갔다.




“맞다! 앱 카드는 설치하면 되잖아!’

일단 가던 길을 멈추고 의자에 자리를 잡았다. 어머니의 휴대전화를 열어서 아시아나항공 앱 설치를 시도했다. 어라, 앱은 이미 설치되어 있었다.

“엄마, 아이디, 비밀번호 아세요?”

어머니는 누가, 언제 그걸 설치했는지 모르겠다고 하셨다. 넘어야 할 관문이 하나 더 있었다.




아이디 찾기! 비밀번호 찾기! 각 단계마다 인증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침에 해 봐서인지 속도가 빨라져 있었다. 일사천리로 아이디를 찾았고, 비밀번호를 변경했다. 무사히 아시아나 앱에 접속했고, 고객 정보 바코드를 휴대전화 화면에 띄웠다. 그렇게 빛나는 바코드는 처음 봤다.




다음 관문은 고객센터였다. 번호표를 뽑고 차례를 기다렸다. 복잡한 설명을 잘할 수 있을지 긴장감이 밀려왔다. 결제 취소하고, 재결제하며 마일리지를 쓰고…….

“띵똥!”

손에 가지런히 펼쳐놓은 번호표의 숫자와 정확히 일치했다. 어머니의 휴대전화, 번호표, 결제 카드를 들고 조심조심 걸음을 옮겼다. 안 좋은 일이 있었는지 직원 분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직원 분께 마일리지 실물 카드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지금 막 앱 카드 바코드를 따끈따끈하게 띄워 놨으니 마일리지를 꼭 쓰게 해 달라고 구구절절 설명했다. 그리고 영수증 금액을 적당히 둘로 나누어서 결제해 주시면 마일리지 사용을 두 번 할 수 있으니 꼭 부탁드린다고 눈을 초롱초롱하게 뜨고 또박또박 말씀드렸다. 직원 분의 표정은 더욱 굳어졌지만 한 단계, 한 단계 거치며 취소와 재결제 진행을 해 주셨다.




“마일리지 비밀번호 네 자리 입력해 주십시오.”

이제 어머니께 임무를 맡길 차례가 되었다.

“엄마, 비밀번호요. 이거 엄마가 누르셔야죠!”

의자에 앉아 하염없이 기다리고 계시던 어머니는 위풍당당하게 걸어오셔서 비밀번호 네 자리를 누르셨다. 딸내미가 일을 대신해 주고 있지만 이 마일리지는 내 것이야!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드디어 요 녀석을 사용하고야 말았다. 직원 분께 몇 번이고 감사의 말씀을 드렸다. 직원 분은 미소 띤 얼굴로 답해 주셨다.




세상에! 앱이란 존재를 잊고 있었다. 편의점에서 물건을 사면서 앱 카드를 찍고, 낯선 곳에서 맛집을 찾으려고 지도 앱을 켜고, 온라인 커뮤니티에 접속하기 위해 SNS 앱을 여는 시대에 실물 카드를 들고 와서는 어머님의 마음을 무겁게 만든 마일리지 요 녀석을 꼭 쓰고 말겠다고 온종일 설쳤었다. 쓴웃음이 나왔다.




요즘 뭐 하나 하려면 과정이 참 복잡하기도 하다. 사이트에 가입하려면 비밀번호 몇 자 이상으로 해라, 특수 문자, 숫자까지 집어넣어야 비밀번호로 인정해 주겠다, 신분증 촬영해라 등등 넘어야 할 관문이 끊임없이 펼쳐진다. 아날로그와 디지털 시대를 모두 경험한 X세대인 나도 참 힘들고 복잡하다 느끼는데, 어르신들은 얼마나 힘드실까? 문자 하나에 놀라 전화를 하신 어머니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오늘 하루를 돌아보았다. 너의 마일리지는 곧 소멸되니 참고하라고 문자를 보내 준 이가 있었다. 여기에서 쓸 수 있으니 입맛대로 골라서 써라, 이런 걸 가지고 와야 한다며 웹 사이트에 정보를 올린 이도 있었다. 계산대에서 갈팡질팡하고 있을 때 친절하게 도움을 준 직원도 있었다. 모든 정보를 완벽하게 안내해 줬음에도 어리둥절해하는 고객을 위해 최종적으로 도움의 손길을 내어준 고객 센터 직원도 있었다. 그 모든 이들이 각자의 자리에 있었기에 1월 1일 00시 소멸될 마일리지를 알뜰하게 사용할 수 있었다.




저마다 주어진 역할을 해내고 있고, 역할을 정해 준 조직이 있다. 그 조직을 체계적으로 만든 또 다른 누군가가 존재하고 있다. 얼마나 많은 조직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는 걸까? 이 모든 것이 참으로 신기하고, 놀라운 일인데 그동안 너무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 복잡하다고 투덜대기만 했던 것은 아닐까? 마일리지를 사용하기까지의 모든 과정이 참으로 고맙게 느껴졌다. 그리고 어디선가 각자의 역할을 묵묵히 해내는 모든 이에게 미소와 박수를 보내고 싶다.




장바구니에 물건을 가득 싣고 집으로 향한다. 호박볶음, 두부조림, 생선구이…… 어머니는 갖가지 요리 계획을 말씀하고 계신다. 자전거, 차, 버스, 오토바이, 사람들도 모두 다 활기차게 움직이고 있다. 상점의 불빛은 그 어느 때보다 더욱 빛나고 있다.







2023년 12월에 있었던 일입니다.  '아시아나 마일리지 소멸 문자' 한 통으로 시작된 이야기이지요.



 904 마일리지를 허공에 날리지 않고 알뜰하게 썼다 좋아하시던 엄마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904 마일리지를 쓰기 위해  거의 하루종일을 보내다시피 했습니다. 하지만  느낀 점은 참 많았습니다.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누리는 것들이, 실제로는 많은 사람들과 조직이 서로 협업하며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지금 제가 브런치 스토리에 글을 연재할 수 있는 일 역시 마찬가지겠지요. 이곳에는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과 조직이 연결되어 있을까요?



 엄마는 여전히, 수시로  마일리지를 쓰러 마트에 가자고 하십니다.  굳이 비행기를 타지 않아도  아시아나 마일리지를 쓸 수 있다는 것을 머릿속에 확실하게 입력해 놓으신 듯합니다. 덕분에 저 역시 엄마의 마일리지 덕을 톡톡히(?) 보고 있답니다.



 저의 일상을 다시 돌아볼 수 있었던 특별한 경험이었기에 '임무를 완수했습니다 ‘를  "아주 조금 특별한 이야기"의 9화로 연재합니다.



 저에겐 아주 특별한 이야기입니다만!

이전 08화 어느 멋진 봄날을 소개합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