닭가슴살을 푹 삶았다

by rosa

복돌이가 이유식 초기단계를 무난하게 넘어가는 중이다.

육아 교과서 권장시기보다 빠르게 이유식을 시작하며 걱정도 있었다. 그러나 기대한 대로 복돌이는 폭풍성장을 했다. 이유식을 일찍 시작한 것은 잘한 결정이었다. 본격적으로 중기단계를 준비할 때가 되었다.

닭 가슴살을 손질해서 푹 삶았다. 불순물 거품들을 거두어내고 베보자기에 육수를 걸렀다. 고깃덩어리만 삶아 그런지 육수에 진한 맛은 없었다. 믹서에 삶은 고기와 육수를 넣고 갈았다. 뽀얀 에멀전이 만들어졌다. 얼음 트레이에 담아 냉동실에 고이 모시면 복돌이 이유식용 '닭 육수 큐브'가 완성. 여기에 쌀, 양송이버섯을 추가해서 푸드 스타일러 이모에게 패스한다. 윙윙 기계음 요란한 삼십 분 동안 끓이고 갈고 젓는 조리가 자동으로 이루어진다. 닭 가슴살 양송이 죽이 뚝딱 만들어진다.

웜 그레이 쇠고기 육수와 다르게 뽀얀 닭 육수 이유식이 고소한 냄새를 풍긴다. 복돌이를 유혹한다.


"할머니 빨리빨리 주세요."

두 팔을 파닥이며 아기가 재촉해도 깐깐 할미는 아직 남아있는 루틴을 거행한다.

복돌이를 식탁의자에 앉히고 실리콘 앞치마를 둘러준다.

적당한 온도로 맞춰진 이유식 그릇을 아기 손 닿지 않는 위치까지 이동, 입 닦을 손수건까지 준비하고 나서야 겨우 할머니가 옆자리에 앉는다.


"성부와 하자."

하루 두 번 이유식시간마다 빼먹지 않는 식사기도는 필수 코스이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주님 은혜로이 내려주신 이 음식과 복돌이에게 강복하소서. 아멘."

호두 알 만 한 두 주먹을 하나로 모아 식전기도까지 마치면 먹을 준비완료. 비로소 아기 입술에 오늘 이유식을 살짝 묻혀 맛보게 한다. '딱딱' 입맛 다시며 만족하는 외 손주 보다 할미가 더 신났다.

오늘도 성공이다.

지구별의 구성원으로서 첫 번 음식을 먹는 일은 신성한 의식과 한 가지이다. 식재료를 선택하고 손질하는 행위 하나하나에 할미는 제사장 같은 정성을 쏟았다.


처음에는 쌀만 갈아서 이유식을 만들었다. 의외로 ‘쌀 알레르기 반응이 흔하다’ 고하여 긴장한 시작이었다. 두 번째는 쌀에 단호박, 세 번째 쌀에 고구마, 이후로도 한 가지씩 쌀과 채소를 섞어 이유식으로 만들고 먹였다. 모두가 처음 먹는 음식이라서 어떤 재료에서 알레르기반응이 나타날지 몰랐다. 항상 조심스러웠다.


채소 테스트가 어느 정도 끝난 후 쇠고기 테스트 차례가 왔다.

처음 고기에 쌀을 섞어 먹였을 때 복돌이 반응은 시원치 않았다. 투플러스 한우면 무엇하나. 간을 하지 않은 쇠고기가 맛이 나길 바라는 것이 욕심이지. 쇠고기에 알레르기 반응 없음을 확인하고 바로 고기에 쌀과 고구마를 섞어서 이유식을 만들었다.


"할머니, 이렇게 맛있는 걸 이제서 준다고요!"


동그랗게 뜬눈으로 시위하듯 이유식 그릇을 낚아채는 복돌이가 할미보다 빨랐다. 이후부터 그릇을 한 뼘 더 멀리 두었다. 맛을 알아버린 복돌이가 이유식에 홀릭한 그날부터 할미 즐거운 이유식놀이가 시작됐다.


농사짓는 동생이 새로 도정한 쌀을 보내왔다. '이유식 많이 먹어라, 쌀은 외삼촌 할아버지가 책임질게.' 복돌이 덕분에 할미도 한여름에 새 쌀 맛을 보게 됐다. 좋구나.


"아이고 우리 아기 잘도 먹네, 아이 예뻐라."

신나는 할미 노래에 복돌이가 벙긋 미소로 장단을 맞춰주면 나의 노랫소리가 더욱 커진다.

이제 오 개월 어린아이 입속에 죽 한술 넣으면서 이렇게 행복한데…….




"일어나 밥 먹어야지, 학교 늦겠다."

엄마는 새벽부터 상다리 부러지게 차려놓고 나를 깨웠다.

'오 분만', '일 분만' 이불 잡고 매달리며 매일아침 버텼다.

"학교 가아자 아아아"

매일아침 십 리 길을 걸어서 등교하는 J가 나를 데리러 오면 그제서 고양이 세수하고 후다닥 뛰어나갔다. 중학교 3년 내내 그랬다.

통학 버스시간 늦었다고 그냥 뛰어나갔다. 고등학교 3년 내내 그랬다.

화장하고 머리 하며 거울 앞에 꾸물대다 늦었다고 뛰어나갔다. 대학교 3년 내내 그랬다.

매일 새벽 부엌에서 땀 흘린 엄마는 빈속으로 뛰어가는 딸의 뒷모습만 보았다. 젊은 시절 내내 그랬다.


오 개 월짜리 복돌이도 잘 먹어서 할미를 기쁘게 하는데……. 철부지 할미가 이제서 깨우쳤다.


청춘 그렇게 다 보내고 부엌조차 밀려난 늙은 엄마. 늦게 철든 딸이 엄마 밥상 한번 차려야겠다. 그 시절 엄마를 따라갈 수 없겠지만. 시금치나물에 미안함 조물조물, 쇠고기 미역국 고마움 크게 한 국자 떠서 우리 엄마 젊은 밥상에 놓아드리면 "아이고 우리 딸 잘했네, 아이 예뻐라." 해 주시려나.

고맙다. 아직 나에게 엄마밥상 차릴 기회가 있어서 참 다행이다.


오늘도 제 그릇을 싹 다 비운 복돌이. 내일은 어떤 이유식을 먹일까나?

쌔근쌔근 잠든 아기 들여다보며 오동통한 손등을 눌러본다.

철없는 할미 혼자 흐뭇한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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