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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소도 Oct 17. 2023

각자의 슬픔은 각자가

아마도 엄마는 몇 날, 몇 달을 내내 울었을 것이다. 전화를 걸면 울먹이는 목소리로 받는 날이 허다했다. 통화 중에 우는 건 예삿일이었다. 


일주일 출장만 가도 내 베개를 끌어안고 냄새를 맡는 엄마였다. 시집을 오고 난 후에는 친정집에 남겨둔 내 베개를 끌어안고 자기도 했다. 이제 베개에서 내 냄새가 안 난다며 서운해하는 것이 엄마의 속성이었다. 


엄마는 아빠와의 짧은 연애 끝에 스무 살에 나를 낳았다. 성인으로서 본인의 세계를 가져보기도 전에 자식과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세상의 전부가 된 사람이었다. 당신 인생의 서글픔을 자식으로 위로하는 게 엄마의 가장 큰 보람인 것 같았다.


그런 엄마 밑에서 나온 나는, 어려서부터 엄마의 슬픔을 알아차렸다. 아마도 내 키가 엄마의 어깨에 닿기 전부터였을 것이다. 우는 엄마를 안아주면 뜨겁고 축축한 숨소리가 내 몸을 휘감았다. 


엄마를 안아 줄 사람은 엄마 인생에 나뿐이었다는 걸, 너무 일찍 알아버렸다. 엄마의 슬픔을 잠재워주는 게 내 인생의 사명 같았다. 


하지만 진단 후부터는 내게도 그럴 여력이 남아있지 않았다. 나도 자식과 남편이 생기고 보니 가정 안에서의 내 역할만 감당하기에도 버거웠다. 엄마가 자신의 바다를 헤엄쳐 나오지 못해도 건져 올려 줄 수가 없었다. 


진단 후부터 지금까지, 따뜻한 말 한마디를 해주지 못했다. 내게 슬픔이라도 쏟아놓을라치면 퉁명스럽고 무뚝뚝한 말만 튀어나왔다.  "아 됐어 끊어~"가 내 주된 답이었다. 


엄마는 내가 암에 걸리고 난 후에야 회한했다. "그게 꼭 어디 아빠 혼자만의 탓이었겠냐, 혈기를 못 참은 나에게도 잘못이 있다"라고 했다. 좀 더 지혜롭게 대처했거나 이혼을 결심했었어야 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때린 놈은 따로 있지만 맞는 놈이 좀 더 지혜롭게 맞았어야 됐다는 이야기인가...? 듣고도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물론, 그건 엄마 잘못이 아니라는 대꾸는 하지 않았다. 그런 말로 엄마에게도 면피할 기회를 주고 싶지는 않았다. 내 심보도 놀부 뺨치는 심보였다.


엄마는 본인이 선택한 남자와 계속 살기로 결정해 겪는 풍파였다. 그럼 나는? 내게는 부모를 택할 권리도 부모로부터 분리될 선택권도 주어지지 않았다. 나만이 일방적인 피해자였다. 오직 나만이 가족 구성원들 중에서 자식'됨'이라는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는 것 같았다. 


나는 너무 이해하려 애쓰는 세월을 살아왔다. 그냥 둬야 하는 슬픔도 있다는 걸 견디지 못했다. 어떻게든 엄마의 슬픔 속으로 뛰어 들어가 엄마를 안아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엄마를 그 슬픔의 바다 밖으로 밀어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아빠로 인한 허무를 채우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효도란 효도는 다 해댔다. 잠시 몸을 말리고 선 엄마를 보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내 몸은 허우적거리고 있을지언정 그렇게 있는 순간만은 덜 불안했다. 엄마가 어떻게 돼버릴 것만 같은 불안감을 잠시나마 덮을 수 있었다.  




진단을 받은 뒤에도 나는 혼자 있을 때에만 울었다. 크게 소리 내며 한참을, 여러 번 울었다. 슬픔은 가실만하면 터져 나왔다. 이쯤 슬퍼했으면 이제 떨칠 수 있겠다 싶은 후에도 터져 나왔다. 


잠든 아이들과 남편을 볼 때면 마음이 아렸다. 세상에서 아무도 내가 운 사실을 알면 안 되는 사람처럼, 숨어서만 울었다.


나는 내 슬픔의 몫'만'을 감당하기로 했다. 이제 엄마의 슬픔은 엄마가 알아서 할 일이다. 그것이 회한이던 자기 연민이던, 이제는 상관없다. 만약 내가 길게 살아 80까지 산다 해도 나는 내 인생의 절반을 엄마의 슬픔을 나누는 일에 바쳤다. 만약 자식에게 부모의 슬픔을 지고 가야 하는 분량이 있다면, 나는 이미 차고도 넘쳤다고 확신한다. 


아무도 내게 매정하다는 말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 세월을 쪼개고 쪼개 밤낮없이 불안에 떨던 그 어린아이를 본다면 말이다. 


하지만 엄마는 아직도 가끔, "넌 어쩜 그렇게 애가 매정하냐"며 쏘아붙인다. 나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다행이라는 생각을 한다. 엄마가 내 슬픔의 크기를 모르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싶다. 


그래야만 엄마가 덜 슬플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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