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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혼이 점점 말라간다.

이제는 정말 괜찮은 거뉘?

by 환오

결혼 1주년이 다돼 가서야 시댁 근처에 산다는 이유로 아니, 원래부터 이 집 장남역할은 형이 아니라 내 남편이란 걸 뒤늦게 깨달았다.

시고모 한분은 우리 내외가 오빠(시아버지) 집 근처에 살아서 다행이라는 말도 하셨다.

우리가 이 집 장남이구나.. 온 식구 모두가 내 남편의 듬직함을 칭찬하면서 완장을 차 주었다.


큰아들은 제사 때 늦어도 잔소리 한 번을 안 하시는 시아버지.

물론 당신도 속상하신지 가끔은 속마음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때가 있다.

언젠가 같은 차를 타고 이동 중인데 큰아들 내외가 마음에 안 드셨는지


“똑같은 것끼리 만나 가지고...”


혀를 끌끌 차셨다.


시아버지도 알고는 계셨던 거다. 당신 아들이 얼마나 철이 없고 이기적인지, 그리고 그런 당신 아들보다 더한 며느리를 데려왔다는 것도 말이다.


시아버지는 항상 무언가가 필요할 때면 둘째인 내 남편을 찾으셨다.

뭐가 안될 때도 건너와서 봐달라, 전화로도 30분 통화는 기본..

아. 안다. 부모자식 간에 충분히 그럴 수 있다.

부모가 도움이 필요할 때 손을 내밀면 자식은 당연히 그 손을 잡아드려야 한다.


시아버지는 분명 온 힘을 다해 두 아들을 보란 듯이 남부럽지 않게 키우고 싶으셨을 터다.

하지만 그 사랑이 큰 아들에게는 이 되었다.

사랑으로 키운 게 아니라 ‘돈’으로 자식을 키우면 자식에게는 ‘독’이 된다.

그 ‘돈’으로 형은 우리 아빠가 이 정도 위치인데, 언제나 아빠의 든든한 사회적 직함과 재력으로 그 잘난 ‘아빠’ 없이는 아무것도 못하는 바보가 된다는 걸 왜 모를까.


이 사실은 나를 포함 시댁 식구들 모두가 아는 사실이지만 누구 하나 바른 소리를 하는 걸 보지 못했다. 나는 점점 이 이상한 나라의 시짜들이 이해가 가질 않는다.


내 성격은 그랬다.

잘못된 걸 보면 그냥 넘기기가 어려웠다.

바로 잡고 싶었다.

하지만 이 집에서 내 위치는 가장 최하위계급이었다.

인도의 카스트 제도로 치자면 나는 피라미드에서 제일 아래에 있는 수드라(노예)였다.

나무위키 제공 : 카스트

그리고 무엇보다 힘들었던 건 이런 내 마음을 보듬어주지 않는 남편이었다.

연애 때는 몰랐던 남편의 모습이다.

무슨 일이 생겨도 나를 지켜줄 거 같던 왕자님은 내가 그린 환상이었나.

남편은 당시 형수에 대한 불만도 처음에는 내가 잘못 본 거라며 부정하고 이런 말 자체를 듣고 싶지 않아 했다.

소위 중간다리 역할을 남편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아내의 행복지수가 달라지는데..


그런 점에 있어서 내 남편은 그야말로 ‘꽝’이었다.

융통성 없고 부모님한테 ‘네네’만 해오던 남편이었으니..

그에 반기를 들으려는 내 모습이 달갑지는 않았겠지.


힘들게 신혼생활을 이어가던 우리는 1주년 기념으로 이태리로 여행을 가기로 했다.

지난 1년 동안 심적으로 힘든 마음 이렇게 여행이라도 기분 전환을 해보자 남편과 나는 행복한 여행만을 꿈꿨다.


하지만 여행을 가서도 매일 전화드리는 그의 모습과 그 와중에 형내외 선물을 사 오라는 아버지의 지시에 나는 그만 폭발하고 말았다.


“작년에 형 괌 갔을 때 뭐 사 왔어? 우리 안 받았잖아.”

“그걸 꼭 따져야 해?”

“그니까 왜 맨날 우리가 챙겨야 하냐고!!!”


이태리 까지 비행기 타고 건너가서 선물 사 오라는 시아버지 때문에 우리는 또 부부싸움을 하고야 말았다.


우여곡절 끝에 적당한 선물을 사들고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짐을 풀고 시댁으로 향했다.

시댁에는 당시 형내외가 건너와 있었다.

집을 매매하고 인테리어 중이라 시댁에서 지내는 중이라고 했다.

쌍둥이를 임신한 그녀는 입덧이 심했는지 방에서 나올 생각을 안 했다.


30분이 지났다. 나오지 않는다.

한 시간쯤 되어서야 그녀가 방에서 나온다.

여행 간 우리 내외가 부럽다며 아직 나오지도 않은 배를 어루만진다.

‘형님도 작년에 괌 갔다 왔잖아요. 일본도 가고. 해외여행 잘 다니면서..’


그녀는 어른들 앞에서 내게 곧잘 존댓말을 했다.

어느 날인가 시아버지는 존댓말을 하는 그녀를 보고 우리에게(표면적으로는 우리였지만 정확히는 나에게) 크게 호통을 치셨다.


“너는 윗사람이니까 편하게 반말하고 너는 아랫사람이니까 깍듯이 형님 대접을 해야지!”


아.. 시아버지 잘못 알고 계세요.

그녀는 나와 둘이 있을 때 반말 잘한다고요.


아직도 기억난다. 시골에서 명절 때 시어머니가 내려가지 전에 나한테 일러두신 말이 있었다.

큰애가 일을 잘 안 하니까 너랑 있을 때 그냥 똑같이 시킬 테니 너는 그런 줄 알아


응? 그니까 나는 잔소리 들을 일이 아닌데 큰며느리한테만 잔소리할 수 없으니 너도 같이 들어라 이 말?

무슨 짜고 치는 고스톱도 아니고 그녀의 기분이 상하지 않도록 이토록 배려를 하십니까..

아..... 도대체 나는 이 집에서 존재가 뭘까? 그냥 동네북? 아님 꿔다 놓은 빗자루?


선택권이 네게 있다면, 너는 탓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선택권이 네게 없다면, 너는 누구를 탓하고자 하는가. 원자들인가 신들인가. 어느 쪽을 탓하든, 그것은 정신 나간 짓이다. 탓하지 말라. 할 수만 있다면, 그 일에 책임이 있는 자를 바로 잡으라.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그 일 자체를 바로 잡으라. 그것도 불가능하다면, 네가 탓한다고 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아무 소용도 없는 짓은 하지 말아야 한다.(주1)


시골에서 시어머니는 땅콩 한 자루를 주시더니 너네 집집마다 똑같이 나눠라 이 말씀을 하시고 돌아섰다.

어머니가 돌아서자마자 그녀가 피식 비웃는다.

“형님, 이거 어떻게 나눌까요?”

“아 그냥 대충 해~”


아직도 그녀의 표정이 생생히 기억에 남는다.

귀찮다는 듯이 아랫사람에게 하대하는 말투.


그렇다. 그녀는 이렇게 나랑 둘이 있으면 편하게 반말도 잘한다.

어른들이 계실 때면 애매하게 존댓말을 해서 나에게 빅엿을 맥이지.

속된 말로 회사에서 원수를 만난다고 하더니, 나는 시댁에서 원수를 만났다.



(주1) 명상록/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박문재 옮김/ 현대지성








*독자님들의 따뜻한 댓글은 저에게 글을 쓰는 원동력이 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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