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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커피탄 리 Jun 01. 2024

P군의 한산한 하루

소품집

 열차가 승강장에 오기가 무섭게 사람들은 벌떼처럼 승강문 앞으로 모여든다. 열차 문이 열리면, 사람들은 내리는 승객들은 생각도 하지 않고, 그들을 밀치며 안으로 몸을 욱여넣는다. 열차 안에 들어가자마자 쇠 냄새가 확 올라온다. 열차는 빛과 입김을 내뿜으며, 곧 떠나버릴 사람처럼 무언으로 승객들을 재촉한다. 무심한 기관사가 문을 닫으면 열차는 곧 출발한다.


 열차 안의 사람들은 모두 무표정하다. 그들은 손에 모두 무언가를 잡고 있는데, 대부분이 스마트폰이다. 그들은 머리를 스마트폰에 박은 채, 엷은 미소를 짓거나 음울한 표정을 짓는다. 대롱대롱 매달린 열차 손잡이는 외롭게 덜컹거린다. 열차는 그렇게 굴러간다. 나는 객석 구석 자리에 앉아서 책을 펼친다. 열차는 동매, 신평역을 순식간에 통과한다. 신평역은 지상철 구간이다. 우거진 수풀 사이사이에 있는 컨테이너 박스 더미들이 보인다. 따사로운 햇살이 긴 통유리창을 통과해 내 어깨로 내려온다. 나는 나른해진다. 책을 넘기던 내 눈이 감겨온다.


 “이번 역은 자갈치….”
 20분여 분이 지나자 열차는 어느새 자갈치를 통과하고 있다. 난 자갈치에서 무사히 내린다. 자갈치역에는 벌써부터 사람이 북적거린다. 대부분이 등산복 차림의 노인들이다. 자갈치역 특유의 물비린내가 벌써부터 코에 물씬거린다. 조명 불빛이 가판대 위로 내려와 사탕 봉지들을 내리비춘다. 나는 사람들 틈을 벗어나 자갈치역 출구로 올라간다.


 광복동에도 햇살이 쨍쨍하다. 사람들은 모두 이마를 가리고 거리를 지나다닌다. 몇몇은 인상을 찌푸리고, 몇몇은 모자와 양산을 쓰고서 지나다닌다. 나는 대로변에서 볕이 덜 드는 골목으로 꺾어 들어간다. 골목에는 공사판이 펼쳐진다. 요리조리, 도로 위까지 침범한 공사판을 지나, 부평 족발 골목 쪽으로 올라간다. 족발 골목으로 가기 전, 한 서점에 들른다.


 서점에서 이 책 저 책 기웃거리며 30분을 쓴다. 내 관심사는 세계문학전집에 있다가, 외국 작가들의 현대문학 작품으로 옮겨간다. 발터 뫼르스, 움베르트 에코의 작품을 뒤적이다가, 다시 나쓰메 소세키, 도스토예프스키 쪽으로 옮겨간다. 그러다가 다시 한국 문학 쪽으로 넘어온다. 30분을 실랑이한 끝에 난 간신히 배수아 작가의 책을 두어 권 꺼내온다. <훌>과 <작별들 순간들>이다.


 계산대에서 계산을 하고 나는 서점에서 독서용으로 비치해 놓은 긴 원목 책상에 앉는다. 나는 왼쪽 끝자리로 가서 앉는다. 오른쪽 끝자리에는 아까부터 책을 읽던 남자가 있다. 내가 들어올 때부터 읽었으니까, 적어도 40분은 읽은 것이다. 그러고도 남자는 한참 앉아 있다. 책을 펼치기도, 수첩에 메모를 하기도 하면서, 또 일어서서 가판대 쪽으로 가서 신간들을 뒤적이기도 하면서. 난 남자의 행동을 유심히 보곤 남자가 나와 같은 부류의 인간이라는 걸 알아차린다.


 ‘친해지고 싶다. 다가가고 싶다.’


 하지만 내가 다가간다면, 남자는 이상하게 쳐다보거나 부담스러워할 것이다. 내가 이상해서가 아니라, 그렇게 다가간다는 것 자체가 이 사회에서 이상한 행동이기 때문이다. 피차 이상하기 때문에 – 대낮부터 서점에서 책을 읽고 있기 때문에 – 상관없을까? 아무튼, 난 남자에게 어떤 제스처도 취하지 못한 채 책장을 넘긴다. 한 장 두 장 넘어갈 때마다, 남자를 힐끔거린다. 난 그가 떠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가 떠나면 저 넓은 의자는 텅 비게 될 것이다. 그럼 나는 거기 묻은 그의 흔적을 좇을 것이다. 그의 모습을 기억하고, 그림자를 좇을 것이다. 어디로 떠났는지도 모를 그의 뒷모습을 바라볼 것이다. 그의 가방 안에 담긴 책들을 상상할 것이다. 이런 인연은 좀처럼 만나기 쉽지 않다.


 나는 얼마간 책을 읽다가 그 자리를 벗어난다. 광복로를 걸어간다. 광복로에는 평일임에도 사람이 많다. 특히 깃발을 든 가이드들을 따라다니는 외국인들이 많다. 이제 막 고등학생이 된 듯한 아이들이 보인다. 엄마의 손 없이 광복동에 나온 아이들도 보인다. 기계에서 나오는 음악 소리가 소란스럽다. 난 그들을 보며 광복로의 수많은 포장마차들을 지난다. 이제 햇살은 어느 정도 세기가 기울고, 찢어놓은 닭백숙처럼 흩어진 엷은 구름들이 푸른 하늘에 흩날리고 있다. 10분 정도를 걸어서 용두산 공원 앞에 도착한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하늘에 떠 있는 공원으로 올라간다.


 몇 달 만에 용두산 공원에 온 건지 모르겠다. 아름드리나무들이 줄지어 서서 공원의 둘레를 장식하고 있다. 선선한 바람에 나뭇잎들은 살살 허리춤을 흔든다. 기분이 좋다. 나는 공원을 돈다, 몇 바퀴. 그러다 정자 아래의 한 할머니를 본다. 햇빛이 조용히 조심스레 내려와 정자와 할머니를 비추고 있다. 그 아래에서 과자를 먹고 있는 비둘기도. 할머니는 뭐라고 말씀을 하시고 계시는데, 그 목소리가 꼭 노랫말 같다. 나는 그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본다.


“내가 여기 다시 올라온 지 50년이 됐다. 그래서 주는 기다.”


 할머니는 그 말씀을 연신 반복하시며, 비둘기들에게 새우깡을 뿌려주신다. 이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 보인다. 세상에는 이런 아름다움 풍경이 종종 보이는데, 나는 이 중 하나를 광복동에서 본다.
 나는 걸음을 돌려 용두산 공원 아래로 내려간다. 다시 쨍한 햇빛이 거리에 쏟아지고 있다. 사람들은 햇살을 가리며 가던 길로 바삐 움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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