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이 지나가는 어느 가정사에 부쳐
어느 친구가 문득 카톡에 무슨 번호를 여섯 자리 올리고 별(*)을 쳤다. 나는 일을 하던 중에 그 문자를 스치듯이 보고는 별생각 없이 하던 일을 계속하다가 몇 시간이 흐른 후 그 친구의 전화를 받았다.
일 년 중 두어 번, 아주 가끔만 연락을 하는 친구다.
오랜만에 통화로 건너온 얘기인즉슨, 이혼을 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 의문의 숫자는 남편을 집에 출입하지 못하게 하려고 현관의 키번호를 바꾸었는데
자기도 기억을 못 할 까봐서 내 카톡에 적어뒀다는 것이었다. 60세는 채 넘지 않았으니
황혼이혼이라고 하기엔 이르고 그냥 어중간하다.
다 자란 20대 딸이 하나 있고 크게 여유가 있어 보이진 않지만
그다지 부족하지도 않은 평이한 재정 수준의 가정생활을 그럭저럭 꾸려왔다고 보인다.
부부는 큰 위기 없이 덤덤하게 잘 지내왔던 것 같은데 남편이 바람을 피운 모양이었다.
중년의 한가운데에서 유부남이라는 사회적 타이틀의 잣대만 걷어치우면
그의 입장에선 축제와 같은 이벤트를 맞이한 것으로 보인다.
말투로 보나 내용으로 보나 내 친구는 심리적으로 매우 지쳐있었다.
어제오늘 갑자기 생겨난 일도 아니고 몇 개월 전에 드러난 일로
그간에 많은 감정의 충돌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마음도 몸도 몹시 피곤에 시달린 상태이지만 배신감과 분노로 활활 타오르는 마음이 전화목소리에서 느껴졌다. 놀랍게도 그간의 갈등 속 실랑이 과정에서
딸이 손목을 그어 응급상황까지 겪었다는 얘기였다.
"나 가보지 않은 길을 가려고 해." 라며 운을 띄운 '이혼'얘기에서 나는 놀라기보다는
누구에게든 있을 수 있는 흔한 일이라 "그래, 왜?"하고 다소 심드렁한 태도로 되물었다.
하지만 딸이 그런 행동을 했다는 대목에서는 하던 일에서 손을 뚝 놓을 수밖에 없었다. 한 가족의 비참한 불화의 한 장면 속으로 돌연 감정이입이 되어 딸과 부모의 절절한 괴로움에 공명하며 가슴이 방망이질 쳤다.
내게 있어 '이혼'이라면, 또래 중 이른 시기에 이미 겪어버려서 무슨 옛 시절 먼 나라 이야기 같다.
결혼, 이혼, 졸혼, 비혼 등 혼인에 관한 담론들이 생겨나고 있는 요즈음이지만
부부문제와는 차원이 다른 것이 부모자식의 관계일 것이다.
인간의 관계는 마음살림에 바탕을 둔 것이라 쉽게 맺고 끊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인연의 끈을 놓는다고 해서 놓아지는 것인가? 그럴 수 있다고 믿는 생각은 그걸 진심으로 원하는 사람에게나 그런 것일지. 마음으로부터 놓았다면 그건 끊어진 것이고 마음이 그렇지 않다면 그렇지 않다.
보이는 것은 인간사의 설정이고 보이지 않아도 끈질긴 것이 마음이다.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이 힘이 세다.
나는 친구의 하소연을 들으며 마음속으로 말했다.
'괜찮아. 네가 아쉬울 것 뭐 있어? 가게 내버려 둬. 다 놓아줘버려.'
근데 그 남편, 바람피운 여성과의 애정행각이 기록된 카톡문자가 고스란히 내 친구의 손안에 있는데도
이혼을 요구하며 재산분할을 꿈꾼다고 했다. 이 대목에서 내가 말을 한다.
"그래? 적반하장도 제법이네! 증거 잘 간수해라."
이 전화대화를 한 지도 두 달이 훅 지나갔다. 지금쯤 어찌 되어 가고 있는지. 가을이 되면 한번 만나기로 했는데 아직 연락이 없다. 많이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을 터. 만나게 되면 가능한 만큼 위로를 해 주어야겠다.
부부관계라는 것이 뭐 그리 대단하게 견고한 프레임이라고 세상사람들은 호들갑을 떠는지!라고
내가 말한 다면, 행복한 가정을 지속하고 있는 인류로부터 엄청난 빈축을 살 것 같다.
이솝우화의 '여우와 신포도'에 비유할지도 모르겠다. 포도의 달콤한 맛을 보고 싶은 여우가 넝쿨에 매달린 포도를 따려고 했으나 실패하고 나니 "흥, 저 포도는 너무 시어서 맛도 없을 거야!"라고 하며
마음을 접는다는 이야기에 빗대어도 볼 터이다.
여우가 포도를 '시어터진 맛'이라고 해서 스스로 마음의 평안을 찾기 위한 방편을 삼듯이
"네가 일찍이 결혼생활을 접었으니 '결혼관계는 허상이다'라고 하고 싶은 것이야."라고
내게 핀잔을 줄 수도 있다.
그런 말을 들어도 반박할 방법도 없고 응수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 주위만 둘러보아도 부부라는 이름으로 서로를 묶고 있는 사람들이
모두가 진정한 연대감으로 살고 있지는 않은 것은 사실이다.
저 부부는 참 바람직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구나! 하는 모습을 분명 발견할 때도 있지만
'네가 옆에 있어도 나는 외롭다!' 혹은 '제발 가까이 오지 마!' 하며
여러 가지 이유로 공허하게 법률적인 관계만 지속하는 부부도 많다.
인간이 한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을 관습화하고 질서를 세우는 건 필요하기도 하다.
하지만 그 트랙을 벗어났다고 아글타글 애태우거나 마음을 졸이며 괴로워한 어리석음은 떨쳐내었으면 한다. 아픈 감정은 몸에 병을 쌓는다.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는 옛 노래 구절은 젊은 청춘들에게나 약이 되는
적당한 위로이고 중년 이후의 마음앓이는 육신을 물리적으로 갉아먹는다.
신중년은 아픈 만큼 죽어갈 수 있다는 사실에 주목을 할 일이다. 그래서 우리 인간은 젊을 때 고생을 겪었다고 스스로 생각된다면 거기서 상처받지 않도록 마음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난 무엇으로 인해 어떤 감정이 마음의 주된 흐름을 이루고 있는지 알아보는 것이다.
늙어갈수록 마음을 편하게 가지고 살 수 있는 준비를 그렇게 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그리고 젊거나 어린 세대에게 이런 것을 전하고 싶다.
얼마큼이나 설득력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부모의 갈등을 겪은 어린 마음에게 주는 삶의 지침서
그래, 세상은 편안하지 않아.
하지만 알고 보면 편안하지 않을 이유가 없어.
무엇을 알아야 편안할 수 있나요?
이렇게 또는 저렇게 하기로 되어있다고
정해져 있다고 말한 어른들의 약속을
다 믿지는 말아.
어른들도 이걸 다 알지 못한단다.
다 믿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어른들의 어른들이 말한 약속을
굳게 믿어 버리다 보니
사는 게 도무지 편안하지 않아.
알고 보면 편안하지 않을 이유가 없어.
다 믿지 않아도 된다는 걸 알고 보면 말이야.
다 믿지 말아.
다 믿지 말아.
불편한 옷을 굳이 장착하고 사니까
고생을 벌어들이지.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는 게지.
매우 섬세한 감각과 마음작용을 동반한
매우 정교한 기계와 같은 육신 속에 깃든 나.
숨이 들고 나는 기적에서 홀로 평안을 느껴보렴.
그러니 아이들아,
어른들 다투는 데에 신경을 꺼라.
너희는 어른과 달라.
이유는 묻지 말고 기쁨으로 빛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