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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리아 Sep 10. 2020

전원 생활 일기

겨우 1M의 세상

새벽 달콤한 잠을 깨우는 멍멍 소리가 산촌의 조용한 적막을 깨운다. 

밭 일을 하고 피곤한 몸을 뉘이고 새벽 잠의 달콤함에 취했다. 새벽을 지나고 여명의 빛이 창가에 어슴프레 비쳐 들어 올 쯤 아랫집 강아지의 앙칼진 소리가 들린다.  전날 텃밭에 고구마를 욕심을 내어 심었더니 팔과 다리 허리가 다 뻐근하다. 쪼그리고 앉아 하는 일에 익숙하지 못한 탓에 남자 혼자 힘으로 하는 밭 일이 그리 수월치는 않다. 잠은 멀리 사라지고 있지만 피곤한 몸을 조금 더 뉘이고 싶은데 짖어대는 소리가 귀에 거슬린다. 아랫집 아저씨가 이른 아침부터 개를 약올리나 보다. 개 짖는 소리는 그냥 짖는 소리가 아니다. 거의 울부짖음이다. 

아직 잠이 들 깬 반쯤 감긴 눈으로 현관문을 열고 마당을 나섰다. 덥지 않은 시원한 아침이 상쾌하다. 

산촌은 그래도 아침 저녁의 선선함이 무더위에 찌든 몸과 마음을 씻어 준다.  

앙칼진 개소리가 멎었다. 아침에 밥을 주면서 약을 올린 모양이다. 

역시나 대문 없는 마당에는 아저씨가 개가 밥을 먹는 모습을 보고서 있다. 

"아저씨 개밥 주면서 또 개 약올리셨나요?"
아저씨는 웃는다. 개박사 왔어!

내가 개에게 해 주는 행동이 아저씨 기준에는 마땅치 않은 모양이다. 개박사라며 비꼰다. 



아랫집 아저씨는 나이가 70을 바라보지만 혼자 귀촌해서 조요한 여생을 보내고 있다. 경상도 지방에 서울 경기 사투리는 충분히 매력이 있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여기서 서울 경기 말씨는 한 수 먹고 들어 간다. 

동네 아주머니들이 혼자 사는 아저씨 걱정이 이만 저만이 아니다.

아저씨 덧밭이 겨우 10평 될까 말까 하다. 아저씨는 가만히 있으면 고추며 호박 오이 토마토 같은 여름 작물과 배추 무 같은 늦은 가을에 심는 작물까지 늘 꽉 차게 심겨져 있다. 다 동네 오육 십대 아주머니들이 심어 준다. 역시 경기도 사투리는 매력있는 모양새다.

혼자 사는 일이 적적해서 그런지 개를 두 마리 키우고 있다. 흰 털이 복실복실한 작은 강아지 두 마리를 키우고 계신다. 

그래도 집 가까운 곳에 이사를 하고 인사를 하러 간 날 나는 경악했다. 너무나도 개를 정말 개 같이 키우고 계셨다. 

일미터 정도 길이의 개줄에 묶여 줄이 끊어 질들 목이 끊어질 듯 온 힘을 다해 개줄을 당기고 있었다. 

매일 건강을 위해 마을 뒷산에 오른다. 그러나 개를 데리고 산책하는 일은 없다. 

집 앞을 지날 때 혼자 걷기 심심하니 개와 같이 걷는 게 어떠냐고 여쭈면 개는 집을 지켜야지 사람 따라 다니면 안 된다고 말한다. 대꾸할 말이 없다. 

적적함을 핑계대지만 나이가 들어 혼자 있으면 생명의 기운을 느낄 수 없다. 살아 있음을 느끼려고 개를 키우는 마을 어른이 많다. 아랫집 아저씨처럼,아니 그보다 더 짧은 줄에 먹다 남은 잔반에 눈은 눈물인지 진물인지가 흘러 내려 눈물자국이 선명하다. 

측은하다! 불쌍하다!

다른 집 개는 몰라도 아랫집 아저씨 개는 내가 가끔 끌고 다닌다. 개는 내가 오는 순간 반갑게 꾸리 치고 배를 내 보인다. 작은 개의 개 줄은 풀지 못하게 고정이 되어 있어 어쩔 수 없이 조금 큰 개만 데리고 간다. 

작은 개가 가끔 목줄을 이리저리 빼고 어디로 가버리는 모양이다. 나부터도 탈출하고 싶을 것이다. 

결국 동네 분들의 신고?에 의해 개는 다시 잡혀 오고 두 어번 일이 있고 나서는 아예 고정시킨 모양이다. 개 줄을 자르지 못하면 풀 수 없게 해 놓았다. 

큰 개와 산책을 하거나 우리 집 마당에 풀어 놓는다. 시간이 조금 생겨 두어시간 개와 놀아 주면 개의 불안한 눈빛이 안정되어 보인다. 다시 아랫집에 가야 할 시간이 되면 개는 안절부절하지 못한다. 가고 싶지 않은 행동을 한다. 한 번은 앉은 자세에서 일어나지를 않았다. 억지로 달래고 간식으로 달래서 데리고 간다. 

고개를 숙이고 다시 자기 자리에 앉는 강아지의 눈빛 때문에 더 놀다 가라는 아저씨의 말도 뿌리치고 집으로 횡하니 온다. 

정말 1M 줄 안에 갇힌다. 뒤도 돌아 보지 않고 가는데 두 마리가 낑낑거리며 마당을 뱅글뱅글 돈다. 

아저씨는 무시한다. 

내 개가 아니다 하고 말하는 내 발걸음이 무겁다. 

개나 사람이나 자유롭게 태어났건만 저렇게 죽을 때까지 묶여 있는 모습이 안타깝다. 

만약 어떤 존재에 의해 인간이 그런 모습으로 인다면 어떨까?

아니면 묶여 있지는 않터라도 자유를 구속당한 인간이 움직이는 한정된 공간에 갇혀 있다면 어떤 기분일까?

개의 모습을 보면서 반추 해 본다. 


인간의 역사는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투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원시 인간이 누리던 짧은 시기를 제외하고 늘 지배와 피지배 억압과 폭력이 늘 따라 다녔다. 

지금도 억압과 폭력에 맞서 투쟁을 한다.

오늘 새벽 강아지의 짖는 소리는 전보다 더 앙칼졌다. 새벽에 내린 비에 흐린 날씨 때문인지 그 소리가 더 사람을 괴롭힌다. 마치 자신의 괴로움을 온 몸으로 하소연하는 듯 들린다. 

 아랫집에 혼자 사시는 어르신에게는 개 두 마리가 있다. 두 마리 모두 소위 잡종이라고 부르는 믹스견이다. 

내가 이 곳에 자리 잡을 때 거의 새끼 강아지나 다름없었던 개가 9년이라는 세월 동안 어른 개가 되었다. 

처음 자리 잡고 별 할 일이 없어 이웃인 아랫집에 놀러 가 개를 데리고 산책도 하고 먹을 간식도 사주고 했지만 자리를 잡고 나도 살아야 하는 삶의 무게에 개를 보러 갈 여유가 없었다. 

가끔 아랫집에 놀러 가기는 했지만 퍼질고 앉아 놀 여유가 없으니 잠깐잠깐 개를 쓰다듬는 일이 전부였다. 

언제부터 인지 개 짖는 소리가 날카로워지기 시작했다. 어떤 날에는 애절하고 구슬픈 소리로 들리고 어떤 날에는 신경이 곤두서 날카로운 비수가 숨겨져 있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밭 일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 늘 길에 아랫집 마당으로 눈길이 간다. 보이는 마당에는 겨우 팔 하나 정도의 개줄에 묵인 개가 나를 보는 순간 애절한 눈빛을 나에게 던진다. 마주친 눈빛을 바라보기 힘들어 눈길을 돌리는 순간 개는 대지를 찢어 버릴 듯한 목소리로 짖어 댄다. 개를 어찌할 수 없는 나는 그저 무심히 지나친다.  짧은 목줄이 야속하다.  

개는 뒷다리로 지탱하고 서서 애원하듯 모은 앞다리로 허공을 휘젓는다. 

그 커다란 눈망울에 눈물이 촉촉이 젖어 있다. 

내 개도 아닌데 뭐 하며 애써 외면하고 빌길을 돌리지만 그 짧은 목줄에 매인 개의 답답함이 그대로 내게 전해져 온다. 순간 숨이 막힐 듯 가슴이 조여 온다. 

아버지와 함께 어린 시절에 본 영화 '대탈주'가 생각 난다. 마지막 장면에 탈출에 실패하고 다시 독방으로 들어 가는 스티브 맥퀸의 모습이 머리 속을 맴돌다 눈에 아른 거린다. 그 실패 한 뒤 다시 독방으로 향하는 그의  절망스러운 표정을 애써 감추며 웃는 모습으로 걸어 간다. 그에게 야구 글러브와 공을 건내는 동료의 표정이 더 근심스럽다. 그는 애써 웃음을 띄지만 독방 문의 자물쇠가 채워지는 순간 벽에 다시 공이 맞아 튕기는 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를 듣고 잠시 멈춰 서는 독일군 간수의 표정이 오히려 그에게 경의를 표하는 듯한 장면이 스친다. 

갇혀 있는 사람보다는 죽음을 맞이 할지라도 자유를 누리고 싶은 인간의 모습을 잘 그렸다. 

인간과 동물 특히 개는 크게 다르지 않다. 기원 잔 2만 년 전부터 개와 인간은 함께 살아 왔다. 유전적으로도 80% 정도 유사하다고 한다. 그리고 개도 감정이 있다. 종종 뉴스나 보도에서 개가 주인을 찾아 먼 길을 여행했다거나 죽은 주인 때문에 슬퍼 우는 모습을 종종 본다. 

내가 초등학교를 다니던 시절에는 아파트가 많지 않았다. 잘살건 못 살건 작은 마당이 딸린 주택에서 살았다.

도둑도 막을 겸 개를 키우는 집이 많았다. 나도 어릴 적 개가 있었다. 그 시절 개들은 아이들과 함께 놀았고 당시에 한창 부자집에서 키우던 세퍼드를 제외하면 지금의 바둑이 수준의 개들이었다. 뭐 묶을 때도 있고 풀어 놓을 때도 있다.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오는 길에 바둑이가 멀리서 나를 보고 달려 온다. 뱅글뱅글 내주위를 맴돌며 반갑다고 꼬리 친다. 학교 마치는 시간을 안다. 개는 그렇게 사람과 함께 교감하고 산다. 

아랫집 아저씨는 개를 한 번도 풀어 주지 않았다. 개는 갇혀 있다. 겨우 1m 정도의 짧은 줄의 반경이 그의 유일한 세계다. 

그 대문을 지나면서 개는 뒷다리로 서 있고 앞다리는 마리 간절히 애원하며 두 손을 모으고 기도 하는 사람처럼 앞다리를 모으고 나를 향해 흔든다. 눈에 촉촉이 젖어 오는 검고 큰 눈이 더 슬퍼 보였다. 

감겨 있는 목줄은 목을 죄고 있어  거의 쉰 목소리가 난다. 

애잔함에 애써 외면하며 그 집 앞을 얼른 벗어난다.

뒤로 힐끔 쳐다보니 개는 다시 낡은 개집 안으로 힘없이 발길을 돌린다. 비록 개지만 감정이 가슴 속을 파고든다. 갑자기 한 단어가 머리를 스쳐 지나간다.

자유!

아랫집 개는 아마 주인이 바뀌지 않는 한 죽을 때까지 그렇게 묶여 있을 것이다. 

얼마나 달리고 싶을까?

얼마나 새로운 세상을 보고 싶을까? 

얼마나 자유로움에 행복을 느낄까?
내가 저렇게 자유를 구속당하고 어딘가에 묶여 있다면 상상조차 하기 싫다. 

어딘가에 얽매이고 어딘가에 구속된다면 작은 공간에 갇혀 희망이 없는 삶이 얼마나 절망적 일지 소름이 돋는다.  그 절망감에 미치지 않을까!

언젠가 TV프로에 시골 개들에 대해 하는 방송을 보았다. 

아랫집 개처럼 그 짧은 개 줄에 묶여 그저 할머니나 할아버지가 주는 먹다 남은 음식찌꺼기를 받아먹으며 죽을 때까지 그러고 사는 모습을 보고 너무 측은 했다. 

방송에 나오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그렇게 밉게 보인 적이 없었다. 

그러나 할아버지 할머니도 변명거리는 있었다. 혼자 지내기 무섭다거나 적적해서 혹은 마당이 휑해서 라며 그래도 개가 있어 움직이면 황혼의 쓸쓸함이 채워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개도 생명이 있고 살아 움직인다. 감정도 있다. 싫다 좋다도 구분한다. 

그런 개가 묶여 있다. 

사람도 자유를 위한 투쟁이 역사 속에 고스란히 숨어있다. 결국 인간의 역사는 억압과 압제에 맞서 자유를 향한 역사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사람도 그러한데 아무리 말 못 하는 동물이지만 그렇게 짧은 줄에 묶어 놓을 수는 없다. 

내가 동네 토박이도 아니고 이제 오십 대 중반을 넘어가는 나이에 70이 다 된 아저씨에게 어떻게 이야기할까?

아침 시간에 배도 고프고 그리고 시골이다. 아침부터 술 한잔 먹었다고 나무랄 사람없다. 

냉장고 일하면서 목마르면 한 잔씩 하려고 넣어 든 막걸리가 있다. 유리 잔에 연거푸 두 잔을 부어 마시고 스술 기운이 퍼질 때까지 마당을 뱅뱅 돌았다. 술기운이 좀 퍼져야 용기가 날 듯 했다. 

엉성한 나무로 얼기 설기 만든 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니 그렇게 짖던 개가 나를 보고 반가워 한다. 역시나 뒷다리는  세우고 앞다리는 마치 사람이 팔을 아래 위로 흔들 듯 흔들고 있고 옆에 있는 작은 개는 덩달아 꼬리를 흔들고 엉덩이를 내쪽으로 보이며 꼬리를 격하게 흔들고 있었다. 

"아고 이놈 시키들이 주인에게는 막 짖어 대고 객이 오니 얌전하네!" 하며 

손에 쓰레기 태울 때 쓰는 작은 막대를 흔들며 언성을 높였다.

약간 취기가 돌 뿐 술마신 흔적도 없다. 그래도 나보다 연세가 많다. 

공손히 인사를 했다.  이른 아침에는 한 번도 그 집을 간 적이 없다. 아저씨는 어쩐 일이냐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 본다. 

사실 내가 유별난지 모른다. 겨우 스무 가구 될까 말까 한 동네 귀촌자는 딱 두 사람이다. 그리고 동네에 개들 이 집 처럼 다 묶여 있었다. 뭐라 해봤자 들을 사람도 아니다. 

"뭐 안개 타고 마당에 연기가 모락모락 피길래 그냥 와 봤어요!"

크 내가 말하고도 내가 참 부끄럽다. 개에게 자유를 좀 주라는 말이 목젖까지 올라 왔다가 넘어간다. 

내 개도 아니데 주제 넘은 소리다. 어울려 살려면 튀어서는 안된다. 

아저씨는 '허허' 쓰레기를 태우고 있다. 있는 것 없는 것 다 태운다. 펫트병이나 비닐 타는 냄새가 역하다. 

재활용 쓰레기나 쓰레기 봉투로 버리는 사람은 동네에 나 뿐이다. 

그냥 다 태운다. 나는 오늘도 그 두 강아지의 애절한 눈빛을 외면했다. 도시에 살 때나 시골에 살 때나 방관자의 모습은 변하지 않는다. 

소 키우는 동네 아저씨 내외가 감치를 수북히 담은 스테인레스 그릇을 들고 마당에 들어 선다. 고추가루가 시뻘걷게 묻은 김치가 손에 들려 있다. 

"오 마친 잘 됐네. 김치하고 같이 아침 묵자! 된장찌개는 어쩨 끓여 놓았데이."

시뻘겋게 충열된 강아지의 눈과 김치가 섞여 보인다. 

작은 꼬쟁이를 들고 와 개의 머리를 톡톡친다. 개는 꼬리를 잔득 감싸고 약하게 낑낑거리고 짖는다. 

"어서 드세요 저는 아침 먹었어요"

그리고 인사를 하고 어른 그 집을 벗어난다. 귀가에 

"아이 김치랑 된장찌개하고 한 그릇 하고 가"

하는 말을 뒤로 하고 집으로 걸어 갔다. 개들의 슬픈 짖음이 그들의 밥먹고 가라는 소리에 묻힌다. 


오늘도 여전히 아랫집 개 두마리는 그 슬픈 목소리로 자신을 울부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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