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우리 집의 가장 큰 명절은 아부지 생일이었다. 물론 집안의 제사나 추석, 설 등을 챙기기는 했지만 제사나 차례를 큰집에서 치렀으니 그 날들과 집에서 잔치를 하는 아부지 생일은 성격이 달랐다. 아부지 생일이 명절 바로 담날이라 잊기도 어렵다고만 생각했었는데 이제 와 돌이켜 보니 그에게는 어마어마한 노동의 연속인 날들이었겠다 싶은 것이.
아부지도 아내 통해 효심과 형제애를 발휘한 보통의 남편이었어서, 버스를 세 번 갈아타고야 당도할 수 있는 큰집에 아내에게 제사 비용을 들려서 늘 먼저 보내곤 했었다. 그는 아이 셋을 주렁주렁 데리고 큰집에 도착해서는 바로 제사 음식 준비를 하고 집에 돌아와 곧바로 남편 생일상 차릴 준비를 하곤 했다.
나랑 여동생이 어느 정도 큰 후에는 전이나 타래과 같은 것들은 우리 둘이 맡고 식혜니 잡채니 불고기니 하는 음식들을 그가 준비하기도 했지만. 그렇게 딸 둘이 그의 일을 덜어주기 전까지는 애보기와 저 모든 일을 동시에 그 혼자 감당했을 터이니 그 고단함이 엄청났겠구나 싶어지면서. 크고 나서 보니 그는 살림을 상당히 체계적으로 하는 사람이었는데 아마도 누구의 도움도 없이 자기 살림을 살아내기 위해 나름 고안한 방식이었을 수 있겠다 싶었다.
집안 식구 모두 음력으로 생일을 챙겼는데 나만 유독 양력을 생일날로 정했다. 왜 그렇게 하게 되었는지는 이제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해마다 양력 날짜가 바뀌는 게 번거롭다 생각하기는 했었다. 그는 내 생일상도 늘 떡 벌어지게 차려내주어서 마침 겨울방학이라 집에 있는 동네 아이들 모두 불러 그야말로 아이들의 마을 잔치가 되게 해주곤 했다. 그러니까 그는 태어나서 당신이 돌아가실 때까지 상대적으로 아들을 애지중지했으나, 당신이 할 수 있는 만큼 당신의 방식으로 자식에게 해주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에게 받은 게 있어서, 딸에게 생일을 어떻게 차려주리? 물으면 딸냄은 친구들 불러 피자니 햄버거니 먹고 노래방으로 놀러 가던 초등학생 때의 생일파티가 별로라 해서 그 날이 휴일이든 학교 가는 날이든 딸과 단 둘이 맛난 음식 먹고 딸이 좋아하는 문구류를 맘껏 고르는 날로 삼곤 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생일로 서울까지 진출해서 인도음식을 먹었던 날과 이태리식당에 갔던 날을 꼽는데 학교 파하고 서울까지 가서 저녁을 먹고 광화문 교보나 인사동 화방을 들러 맘껏 구경하고 갖고 싶었던 것들을 살 수 있었기 때문일 테다.
어느 시점부턴가 딸에게 딸이 태어난 날 있었던 일들을 들려주곤 했는데 그래서일 테지만 생일 축하한다 말하면 딸은 엄마도 수고했다고 답하곤 했다. 오늘 자정이 넘은 시각에도 역시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