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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로잉업 Feb 29. 2024

그녀와의 첫 만남

함께 일했던 그 시간이 아련하다.



졸업을 하고 첫 사회생활을 시작했던 20대.

병원 영양과에 입사를 했다. 내로라하는 큰 병원에 인턴영양사로 출근을 하게 된 나는 모든 것이 낯설고 잘해 낼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고, 잔뜩 주눅이 들어 있었다. 병원은 로비부터 호텔처럼 번쩍번쩍했고, 정신없이 돌아가는 분위기라 어리바리했던 나는 한순간도 긴장을 풀 수가 없었다. 처음 업무에 투입이 되었지만 할 일은 해야 했기에 선배님이 한번 일을 알려주시면 질문을 해 가면서 익힐 분위기가 아니었다. 선생님들은 모두 상냥하고 친절하게 알려주셨지만, 그 시절의 나는 한번 배운 것은 어떻게든 알아서 해야 할 것 같고 잘해야 한다는 생각이 꽉 차 있었다.


영양과 옆 사무실에는 급식실이 따로 운영되고 있었다. 영양과는 질환별 임상영양사가 환자들의 식이교육이나 영양관리와 관련된 컨설팅을 하는 업무가 주였다면, 급식실은 실제로 제공되는 환자식을 전담하는 부서였다. 같은 영양사이지만 임상파트와 급식파트가 완전히 분리되어 있었고, 소속 또한 달랐다. 나는 주로 영양과 선생님들로부터 교육을 받고 필요한 업무를 수행했었다. 반면, 인턴영양사여서 급식실과 연관된 관리감독 파트는 나의 중요한 업무 중 하나였기 때문에, 내 자리는 급식실에 배치되어 있었다.




영양과이면서 급식실 선생님들 틈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았고, 영양과 선생님들의 교육이나 업무 지시가 있으면 병동에도 올라가고 미팅도 해야 하니 마치 두 집 살림을 하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며칠을 잔뜩 얼어붙은 채로 출근을 하고 있었는데, 주말을 보내고 출근한 월요일 아침 그녀를 처음 만났다. 며칠 동안 휴가를 다녀왔다고 하며, 나를 보자마자 그녀는 스스럼없이 말을 걸었다. 급식실에서 가장 막내지만, 입사한 지 일 년이 넘은 그녀는 애송이인 나에 비하면 사회생활의 달인처럼 느껴졌다.

"선생님, 몇 학번이세요?"

"저랑 같은 학번이시네요."

"저 여기서 제일 막내인데, 앞으로 잘 지내요. 선생님"


그녀는 서글서글하고 유머가 있어 선생님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고향이 서울인 데다 집에서 출퇴근을 하는 사람이라 자취생활을 하는 나와는 크게 접점이 없어 보였다. 그럼에도 같은 학번이라는 이유로 원래 알고 지냈던 친구처럼 편안하게 대해 주었고,  사회초년생이라 잔뜩 얼어붙은 나를 오며 가며 츤데레처럼 챙겨 주었다.




자취생활을 했던 나는 아침시식을 하는 업무가 참 좋았었다. 병원 식단이 훌륭해서 업무라기보다 맛있는 밥을 공짜로 먹는 보너스 같은 시간이었다. 특히, 그녀가 아침 담당인 주간에는 한바탕 바쁜 아침업무를 끝내고 밥을 같이 먹으며 대화를 하던 그 시간이 참 좋았다. 그렇게 조금씩 나도 사회생활에 익숙해지고, 조직에 뿌리를 내리며 자리매김을 할 수 있었다. 사회에서 만났으니 서로 존대를 하면서도 같은 학번이라는 이유로 힘들 때는 슬쩍 뒤에 가서 말을 걸 수 있는 동기 같은 존재였다.


나는 1년 동안 그녀를 따라다니며, 퇴근 후에 같이 노래방도 가고, 다른 선생님의 집들이에도 같이 가고, 회식에도 즐겁게 끼였다. 엄연히 다른 팀인데도 그녀 덕분에 나는 급식실 선생님들과 친하게 지낼 수 있었고, 선생님들은 나를 한 식구처럼 대해 주었다. 그녀는 다른 이들과의 관계를 연결해 주는 징검다리였고, 내가 편안히 말을 꺼내놓을 수 있도록 멍석을 깔아주는 그런 사람이었다.




풋풋했던 그 시절의 우리는 거기까지의 인연으로 끝이 나고 헤어질 운명이었다.  

1년의 직장생활이 끝나갈 무렵 나는 수능준비를 하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경제적인 이유로 바로 퇴사하지는 못해 이듬해 여름까지 출근을 했지만, 수험생활을 병행했던 나는 더 이상 여유를 갖기 어려워 업무 이외의 이야기는 나누지 못하고, 가끔 얼굴을 보면 안부만 물으면서 지냈었다. 당시 삐삐라 불리던 무선호출기만 있던 시절이었으니 그녀와는 근무시간 외에는 안부를 묻고 사적인 대화를 나눌 기회가 전혀 없었다. 그렇게 우리는 나의 퇴사로 인해 헤어졌다.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나의 첫 사회생활은 그녀 덕분에 즐거운 추억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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