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인생에 큰 씨앗을 뿌리다

by 서빈

지난주는 요가 지도자 과정(TTC) 교육의 마지막 수업 날이었다. 끝날 무렵, 선생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다. 6개월의 과정을 돌아보면, 각자 아쉽고 후회되는 것들이 분명 있을 테지만 이 시간을 여러분의 인생에 큰 씨앗을 뿌리는 과정이라고 생각하면 좋겠다고. 아쉽고, 후회되는 것들은 각자의 마음속에 새겨 앞으로 조금씩 빈칸을 채워가라고. 그 두 마디의 말이 내겐 큰 위로가 됐다. 교육 과정은 겨울, 봄, 여름, 이 세 계절을 통과하는 긴 시간이기도 했지만 늘 그렇듯 시간이 너무도 빠르게 흘러갔다. 그 때문에 생각만큼 많은 걸 얻었는가를 자꾸만 되돌아보고 있던 나였다.



나는 내 안에 어떤 씨앗을 품게 되었을까. 그러고 보니 교육을 결심하고, 새로운 요가원을 등록한 1월이 떠오른다. 당시 한 겨울만큼이나 내 인생의 구간 또한 최강 한파였다. 작년 하반기 내내 수정에 몰두한 미니시리즈 계약이 최종 불발되고, 갑자기 시간이 붕 떴었다. 근데 이상하게도 ‘그럴 수도 있지 뭐. 차라리 잘 됐어.’하는 이상한 안도감이 들었다. 그리곤 누군가를 원망하거나 나 자신을 비하하며 괴롭히기 보단, 그동안 대본 작업 때문에 미뤄왔던 일들을 실행하기 시작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요가 지도자 교육이었다. 그리고 그 과정을 매주 한 편의 글로 SNS에 연재하기 시작했다.


미국 뉴욕의 공원 ‘Bryant Park'


드라마 대본은 당분간 쓰기 싫고, 그래도 뭐라도 글은 계속 써야 한다는 마음에 시작한 이 연재 과정이 돌아보면 참으로 감사하다. 시작했을 땐 매주 한 편의 산문을 쓰는 것도 처음이고, 어떤 이야기를 쓸지는 그 주 교육을 들어봐야 알 수 있기에 내가 과연 끝까지 완주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하지만 막상 지르고 보니, 다음 주 연재를 위해 교육 시간에 좀 더 집중할 수 있었고 수련 또한 꾸준히 나갈 수 있었다. 무엇보다 약속이 가진 엄청난 힘을 알게 되었다. 익명의 독자와 나는 매주 한 편의 연재를 약속한 셈이었고,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나는 6개월 간 단 한 번도 빠짐없이 브런치와 인스타그램에 원고를 업로드 했다.



대본 작업도 결국 마찬가지 아닌가. 그렇게 많은 드라마 작업 과정에 참여하고서도 왜 내가 직접 선두에서 노를 젓는 그 과정에 겁을 냈을까. 일이 파토 났을 때, 난 왜 불평보단 안도를 했을까. 그건 두려움 때문이지 않았을까 싶다. 내가 과연 16개의 대본을 제대로 잘 뽑아낼 수 있을지, 나조차도 나를 의심했던 것이다. 다행히 연재가 중반부에 접어들 무렵부터는 다시금 드라마 대본도 쓰기 시작했다. 초심으로 돌아가 오랜만에 단막극 대본 작업을 했다. 작업이 마음처럼 안 될 때는, 이것조차 완고하지 못하면 이제 정말 그만 둬야 하는 거 아닌가 생각하면서.


미국 뉴욕 '자유의 여신상(Statue of Liberty)'


마음이 바닥 저 끝까지 내려갔다온 덕을 본 것인지, 단막극 원고에 마침표를 찍을 수 있었다. 이 또한 이제부터가 시작이란 걸 안다. 초고를 최종 완고처럼 뽑아내는 능력자가 아닌 나는 보고 또 보며, 덜어내고 채워가는 긴 수정 과정이 필요하다. 근데, 변태같이 나는 이 과정이 참 좋다. 작가로서 누군가와 비교할 때 나의 현재 가치는 형편없다. 하지만 내가 가진 능력 중엔 글쓰기가 우위를 지녔다. 더 잘 할 수 있는 다른 능력이 있다면, 나도 정말이지 그 일을 하고 싶다. 지난 6개월은 내가 다시금 내 앞에 놓인 걸 받아들이는 시간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이를 계속해서 이어갈 수 있게 함이 ‘요가’임에 안도하는 오늘이다.



얼마 전, 식사 자리에서 이런 말을 들었다. 작가로 성공하려면 오기가 좀 있어야 하는데, 내 얼굴은 너무도 편안해 보인다고. 그러니 오기를 좀 가지라고. 이야기가 길어질 것이 뻔해 대답을 꾹 삼키고 돌아온 그날 밤, 나는 생각했다. 꼭 그 놈의 오기가 있어야 하나. 글을 쓰는 덴 다 나름의 이유가 있고, 그게 그 사람만의 작품색이 되는 거 아닌가. 비록 조금 더 시간이 걸릴지라도 꾸미지도 보태지도 않은 나를 닮은, 나 같은 드라마를 쓰고 싶다. 그리고 쓰는 그 하루하루 매트 위에 서며 감사해야지. 다시금 미니시리즈 작업에 들어간다. 이후의 생애 계획 또한 틈틈이 그려 놨다. 아마 그게 내가 품게 된 인생의 큰 씨앗이 아닐까. 부디 무럭무럭 자라 누군가 쉬어갈 수 있는 그늘이 되기를 바랄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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