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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작가 Jul 26. 2018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

마음의 문을 연다는 것, 상대방과 보폭을 맞춰 함께 걷는 일.

어린날 매일 찾아가던 강아지가 있었다. 그땐 유기견이란 단어도 생소했을 때였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 강아지는 유기견이나 다름없었다. 유기견이 별건가. 방치되고 버려지면 유기견이지. 철창 안에서 힘없이 앉아있는 녀석을 쭈그려 앉아 한참을 들여다봤다. 여기저기 몸이 성한 데가 없었다. 언제 상처 났는지 오래된 피딱지도 있었고 원래 털 색깔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떼가 묻기도 했다. 이 아이는 한쪽 앞발을 들고 덜덜 떨고 있었는데 자세히 살펴보고자 해도 역부족이었다. 가까이 다가가려 하면 누런 이빨을 한껏 드러내 보였으니까. 긴장을 한시도 늦추지 않고 나를 한껏 경계했다. 좀처럼 그 아이와 나 사이의 거리를 좁힐 수 없었다.


- 뭘 봐!? 

그 시절 상처투성이였던 나를 지긋한 눈으로 봐준 아이가 있었다. 혼자 앉아 있던 나에게 오랜만에 느껴지는 따뜻한 시선이었는데… 그 호의를 아니꼽다는 듯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단 두 글자로 내동댕이쳤다. 가시 돋친 말을 형상화하자면 딱 그때 나의 표정이었을 것이다. 따뜻한 눈빛이었음을 그때도 알고 있었다. 모르는 게 아니었다. 다만 너무 잘 알아서 문제였달까. 그 온기를 온전히 받아들이기엔 나는 여전히 겁에 질려있었다. 오히려 그 따뜻한 시선이 몸서리치게 싫었더랬다. 

‘너도 내가 불쌍해?’
‘왜 그딴 눈으로 쳐다보는 거야?’

동정심 같았달까. 나를 불쌍히 여기는 눈빛. 누구에게도 초라해 보이고 싶지 않았기에 그 따뜻한 시선이 끔찍했다. 돌아보면 그 아이는 그저 위로를 건네고 싶었을 뿐인데. 단지 그때의 나는 마음이 옹졸해 그 맘을 받아들일 여유가 없었더랬다. 슬프다.  


하굣길이면 늘 그 강아지를 찾아갔다. 딱히 뭔가를 해주는 것도 없었다. 모두에게 벽을 치고 있는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건 그저 옆에 있어주는 것뿐. 나는 왜 그 녀석 곁에 있어주고 싶었던 걸까? 으르렁대는 아이의 울음이 슬프게 들렸기 때문일까? 마음의 문을 닫아버린 아이에게서 나를 본 것일 수도 있겠다. 배만 볼록하게 튀어나온 아이. 눈은 쾡하고 털은 색을 잃은 지 오래돼 보였다. 집에서 밥을 챙겨 와 멀찌감치 놔두었다. 언젠가부터 밥그릇이 비워지는 날의 주기가 빨라졌다. 이 말은 우리 사이가 가까워지고 있음을 의미했다.  


눈빛에도 마음이 있다. 분노에서 경계심 그리고 반가움으로 변할 때까지. 수일이 걸렸더랬다. 왜 이 아이를 보고 눈물이 났을까. 내가 원한 것도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부러움. 누군가 나에게 이렇게 다가와주었으면 좋겠다 하는 막연한 기다림. 내 마음이 열리기를 보채지도, 부담을 주지도 않고 그저 언젠가 마음 열릴 그날을 묵묵히 기다려주는 사람을… 






사람이 누군가에게 마음을 연다는 건 실로 놀라운 일이다. 나를 내보이는 일. 이때 내 마음이 열린 정도와 상대의 그것을 비교하며 재는 것은 금물이다. 마음이 열리는 데에는 사람마다 속도 차이가 있다. 마음의 문에 비밀번호가 단순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이는 복잡한 사람도 있는 거니까. 상처가 채 아물지 않아 여전히 아파하는 누군가에게는 그 속도가 더 느리다.


사람을 알아간다는 건 함께 걷는 것과 다르지 않다. 상대와 함께 걷기 위해 속도를 맞추는 것이 필요하다. 두 손을 맞잡고 보폭을 맞춘다. 평상시 걷던 나의 습관은 잠시 뒤로 하고 상대의 걸음걸이에 온 신경을 기울인다. 처음엔 우스꽝스럽던 그들의 발걸음들이 차츰 ‘우리만의 걸음’이 되곤 한다. 


나에게도 그런 사람이 있었다. 굳이 내 마음의 문을 억지로 열려고 노력하지도 않고 생각보다 녹슨 문 탓에 삐그덕거려도 차분함을 잃지 않던 사람. 그는 자칫 나에게 부담이 될까 자신의 마음을 보이는 정도도 조절하기도 했더랬다. ‘사랑해’라는 말에 ‘나도 사랑해’라 대답하지 못할 때의 죄책감 혹은 당혹스러움을 이해하는 사람이었으니까. 


처음엔 ‘저는 친구 없어요’로 시작했다. 

이후 ‘중학교 때 친구 몇이 있어’가 되었고 

‘안경 쓴 애랑 가게 한다던 애 얘기해줬지?’가 되더니 

결국, ‘그 친구 가게에 같이 가볼래?’가 되더라. 


그 사람은 내 마음의 문 앞에서 얼마나 바라봐 주었던 걸까.   

오늘은 얼마나 열렸으려나, 그럼 나도 이만큼만, 조금씩. 


그는 오늘도 마지막 한 숟갈을 남겨놓고 애꿎은 반찬들 사이를 헤집었다. 그 행위가 밥 먹는 속도가 느린 나를 위함이었다는 걸 알아차렸을 때, 나는 다시 한번 그에게 반했다. 다 먹고 멍하니 기다리는 자신 때문에 급하게 먹을까 일부러 식사의 마무리를 미루는 사람. 이 날 내 마음의 문이 한 뼘 더 열렸더랬다. 


그렇다. 누군가에게 마음의 문을 연다는 건 나 혼자만의 일이 아니었다.

나를 내보이기에 용기를 낼 수 있도록 기다려준 사람.

이 사람의 마음을 보고 내 마음을 돌아본다. 

내가 저 사람에게 전보다 더 큰 마음을 주고 있구나, 하고.  

거울을 보듯, 저 사람을 보니 내 마음이 보인다.


걸음이 느린 사람을 다독이며 함께 걷는 일.

보폭을 맞춰 걸을 줄 아는 기다림.

그 희생과 배려가 사랑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시 사랑이다.




@YogurtRad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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