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냐하면 당신은 고속충전 중입니다.
피드백은 배우는 속도를 높여주는 효과적인 방법이다.
강점을 강화하고 약점을 보완하는 서로가 서로의 스승이 되는 시스템. 시간은 한정적이고 가르치는 사람은 한 명이니 보고 듣는 과정에서 놓칠 수 있는데 피드백은 이것을 보완해 준다. 그러나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습관을 인식하고 수정하는 일은 쉽지 않다. 공부와 수련을 계속하다 보면 어느 순간 스스로 인지하고 수정하게 되지만 그러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
피드백은 그 인지와 수용의 시간을 강압적인 방식으로 줄여준다. 이러한 이점에도 불구하고 충격과 상처를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은 내 이미지에 대한 무의식적인 기대 때문이다. 평소에 생각하고 있던 모습과 다른 나의 모습 그리고 그것을 평가하는 타인. '이만하면 괜찮지'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렇지 않다'라고 말하는 동료 강사와 선생님. 이 간극이 뼈 아픈 것이다.
피드백은 자기 객관화의 잔혹한 시간이기도 하다.
'쪼'와의 사투
짜증유발자가 되면 곤란하잖아.
'쪼'는 그렇다. 말할 때 무심코 흘리는 습관 같은 것.
말투, 억양, 톤은 문신처럼 새겨져 고치는 것이 쉽지 않다. 내 목소리가 분명 들리긴 하는데 대화할 때 내 음성을 상대방처럼 듣는 것은 불가능하다. 뇌는 능구렁이처럼 반응한다.
"듣기 싫으니깐 안 들리는 척 하자."
피드백을 하기 위해 문제점을 파악하기 위해 수업 중에 녹화를 하는데 이걸 다시 보는 일도 쉽지 않다. 뇌는 살아남기 위해 세상을 왜곡하는데 그 세상에 물론 나도 포함이다. 목소리뿐만이 아니라 하는 행동과 타인에게 보이는 모든 면들을 왜곡한다. 상상 속의 나의 음성은 따뜻하고 부드러운 느낌이었다면 녹음된 음성은 필터가 제거된 상태이기 때문에 고음은 도드라지고 밋밋하게 들린다. 또한 감정이 BGM처럼 깔려 분위기 있던 음성은 상상 속에서나 존재했을 뿐 도무지 '제발 내 것이 아니었음 하는' 이질감과 혐오감만 남는 것이다. 주변에 자신의 목소리를 괜찮다고 느끼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는데, 그건 가르치는 선생님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을 엄격하게 평가하는 사람일수록 목소리에도 예민하게 반응한다.
독특한 억양과 말투는 때론 표현방식이 거친 이들에게 조롱의 소재가 되기도 한다. 혹은 예민한 이들에겐 "저 말투 때문에 힘들어." 하는 스트레스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
회원들이 들어주는 것이 황송해 성은이 망극함.
"오른팔 들어주시고,
왼팔 뻗어주시고,
고개 돌려주시고,
앉아주시겠어요?"
"돌려내고, 뻗어내고, 밀어내고, 당겨내다. 언제까지?
수업이 끝날 때까지."
무엇이건 처음이고 한 번이면 문제 될 것이 없지만 문제는 반복에 있다. 언어의 반복은 청각적 피로를 유발하고 수업의 몰입도를 떨어뜨리며 심리적 거리감을 넓히기도 한다. 특히 반복된 어미의 사용으로 주의 집중력이 떨어지는 경우도 생긴다.
강사는 꾸준히 수련하면서 티칭 훈련까지 거친 사람이다. 요가지도자는 단어 그대로 요가를 지도하는 사람이자 안내자인 것이다. 부드럽고 친절할 것, 적절한 높임말의 사용은 필요하지만 때론 힘 있는 음성과 간결한 어미 사용이 효과적일 수 있다. 간결함은 그 자체로 힘이 있다.
"실수를 조용히 넘겨.
안 그러면 실수가 아니라 재앙이 될 거야."
누구나 실수를 할 수 있지만 반복된 실수는 그 강사의 자질논란이 될 수 있다. 실수를 티 나지 않게 매끄럽게 넘기는 것도 기술이다.
뭐니 뭐니 해도 가장 힘든 것은 고쳐야 하는 걸 아는데도 고칠 수 없는 증상(?)도 있다는 것. 그럴 때는 나 자신을 견딜 수가 없다. 몸에 붙은 오물을 보고도 도저히 떼어낼 수가 없는 상황인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또다시 같은 피드백이 들어오면 그것을 공격으로 인식하지 않는 것은 힘든 일이다. 특히나 피로가 누적된 상황이라면 피드백 자체를 나 자신에 대한 평가로 받아들여 가치 없는 사람처럼 느껴지게 만든다. 실제로 누군가의 피드백으로 인해 꽤 긴 시간을 무기력한 상태로 보내는 강사도 있었다.
보이고, 들리고, 알아야 고칠 수 있다.
흔히 고쳐 쓸 수 없는 사람을 무지하다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아침에 눈을 뜨면 거실에 깔린 매트 위에 앉는다.
싱잉볼 명상 음악을 틀고 눈을 감는다.
당신도 나와 더불어 행복하고 고통에서 자유롭기를
당신도 나와 더불어 안전하고 사랑받기를
당신도 나와 더불어 혼란에서 벗어나고 과오를 저지르지 않기를
당신도 나와 더불어 종종 연약하고 외로운 존재임을 느끼기를
위의 글은 사무량심의 기도이다.
마음 챙김에 보면 좋지 않은 감정을 다스리는 방법으로 염원을 담는데,
사무량심은 우리가 쉽게 삼킬 수 있는 캡슐형 알약 같은 것이다.
화가 치밀면 자애의 알약을.
욕망이 솟구칠 때는 연민의 알약을.
질투를 느낄 때는 공감의 알약을.
자만과 무지에 평정의 알약을 삼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