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이터에서 노는 아이들을 지켜보는 건 좋아하지만 아이들을 지켜보는 동안 동네 엄마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은 좋아하지 않는다.아이들에게 신나는 놀이터지만 엄마에겐 곤욕스러운 쭈뼛쭈뼛의 시간.
내 첫 장거리 여행은 캐나다 밴쿠버를 경유해 토론토까지 가는 경로. 밴쿠버에서 토론토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처음 만난 외국인과 내내 수다를 떨었던 나는 어디로 갔나.
토론토에 짐을 푼 다음날, 비행기에서 만난 사람과 친구가 되어 가족 식사에 참여하였던 나의 옛이야기를 들춰보자면... 난 아마도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것 같다.
놀이터에서 좀처럼 뿌리내리지 못하는 나의 사교성이란.
하지만 위에서 아래로 훑어내리는 듯한 외부의 시선이 불편하다. 외모로, 두르고 있는 명품 따위의 것들로, 스캔당하고 싶지 않다. 어느 집 아이의 학원 코스를 생동감 있게 따라다니고 싶지 않다.얼굴도 모르는 다른 집 남편, 시댁 이야기들에 관한 정보에 관심도 없다. 나와 내 주변의 것들로도 숨 막히게 벅차, 놀이터와 동네 카페에서 타인의 사생활을 공유하는 일이 피로하다.
엄마들 틈 바구니에 섞여본 적도 없으면서 어떻게 그 피로감을 아느냐고 물으신다면!
얼떨결에 합류하게 되었던 사사로운 수다에서 쏟아지던 숱한 정보들 앞에 소름 끼친 적이 있어서 그렇다. 유치원 등원시키는 버스 태우러 오면서 무슨, 무슨 명품을 두르고 나왔더라... 어느 집 아이는 방학땐 외국으로 어학캠프. 테니스를, 펜싱을 가르친다더라, 누구네는 시어머니가 애들을 다 봐주신다더라, 반찬까지 해주신다는데 며느리는 퇴근 후 운동까지 마치고 온다더라...맞벌이 가정의 직장맘의 루틴까지.
시어머니에서 며느리까지 이르는 관계도까지 브리핑되던 수다들은 방대하면서도 얄팍하기 그지없었다. 그 몇 번의 대화로, 카카오톡 단체 대화방속에서 오가는 사사로운 대화들을 짐작하고 미루어 예견해 볼 수 있었다. 마트 정보에서부터 남의 집 사생활까지 촘촘한 관계망 속에그 누구도 끼워주지 않았지만 발을 내딛고 싶지도 않았다.
여름의 그 사건 이후, 불과 한 계절 앞도 예측할 수가 없는 불안한 일상 속에 산 지, 1년이 넘었다. 그저 하루하루만 열심히 살다, 그다음 날 아침 별 일 없이, 별 탈없이 눈 뜨는 아침에 감사하는 날들을 살아내 고나니... 세상의 모든 이슈와 사건, 사고들에 소진할 에너지 따위 없어졌다. 거대한 사연 속에 갇힌 채 아무렇지 않은 듯 공백을 메우며 살다 보니 불필요하게 더해지는 덧칠들에 화가 났다.
내 짐 하나 덜어줄 거 아니라면 조언은 삼갑니다. 뼈 아픈 조언이든, 안쓰러워서 건네는 위로든.
내 하루를 말로, 메우려고 하지 마세요.
나이가 들어갈수록 시간에는 가속도가 붙는 데다, 예측할 수 없는 이슈들은 속절없이 휘몰아쳐서... 불필요한 인간관계 속에서 할랑 할랑 댈 여유가 있다는 게 행운이다 싶었다.그 여유를 누리는 시간들에 질투가 났다.
그런데 자의로든, 타의로든, 군더더기 없이 담백하게만 꾸려가고 싶던 어느 날 커피 한 잔을 나누게 되었다.
모두들 고정 멤버가 있는 와중에, 어찌어찌 일회성으로 끼게 된 자리였는데... 그 넷 중에 세 명이 신경안정제를 처방받아 복용하고 있다는 걸 우연히 듣게 되어 놀랐다.
그 모임의 특별 게스트와도 같았던 나는 신경안정제와 수면 유도제를 처방받은 적은 있지만 복용한 적은 없던 1인.
신경안정제 고백을 시작으로, 저마다의 사연들과 고충들을 얼떨결에 듣고 나니... 지극히 얕고 얄팍한 관계들이라며 제대로 겪어보지도 않고 벽을 치고 다녔던 게 미안해졌다. 임신, 출산, 육아를 거쳐 초등학생 학부모로 입문하게 된 그들에겐 저마다의 우울감과 스트레스들이 다닥다닥.
제각기 다른 원가족의 사연들 속에, 아이들을 양육하는 와중 어린 시절부터 서려있던 트라우마를 마주해 당혹스럽고. 점점 희미해져 가는 자아에, 현실적으론 경력 단절까지 겪어내려 하니 스스로가 볼품없고. 고충은 알아주는 이 없이, 전업 주부라는 초라한 단어가 서글프고. 흔들리는 와중에, 아이들을 이렇게 키우고 교육하는 게 맞나 의구심에 불안한 육아동지들.
신경안정제 한 알로 버티기엔 남모를 이슈들은 더 많은 것처럼 느껴졌지만 내 마음속은 얄상하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아무리 그렇다 할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사연을 아는 이들은 친한 친구들마저도 없어, 철저하게 비밀 아닌 비밀이지만.
브런치북에 남 모르는 글도 쓰며 어찌어찌 활자로, 맺힌 가슴을 쏟아내고.
혼자 산책길을 걷고 뛰고 계단을 오르면서 흘린 땀으로 치유받고.
값비싼 쇼핑은 안 해도 나만을 위한 아로마 오일에, 운동기구에, 향긋한 운동 시간으로 스트레스를 날려 보내기도 한다고.
정신의학과에서 처방받은 수면 유도제 대신 아이들을 인형 삼아 베개 삼아 깊이 숨을 들이쉬고 내쉬고.
하루에도 몇 번씩 아이들을 품에 안으며, 안기며 내 안에서 나온 작은 것으로부터 매번 큰 위로를 받는다고.
사사로이 친구들과 브런치 모임을 즐기진 않아도, 미술심리 자격증 수업 들으며 정신의학과 상담 그 이상의 것들을 얻고 누리고 있다고.
말하고 싶었다. 말은 못 했다. 그저 듣고 추임새를 넣어주었을 뿐. 말이 많지 않았던, 약속이 예정되어 있지 않았던 객원 게스트. 말로 다하지 않았지만 친애하는 나의 육아 & 학부모 동지들에게 응원을 담뿍 담는다.
지금도 애쓰고 있는 당신.
엄마, 아내, 딸, 며느리라는 단어만 앞세우느라
소소한 일상의 기쁨을 찾는 노력을 잊지는 말길 바랍니다.
하루 24시간 동안의 작은 것들중에서, 꼭 자기만을 위한 시간들을 촘촘하게, 꼬불쳐놓기 바랍니다.
흔들리고 방황하며 실패할지라도 인생은 공평하게 불안정한 것이니 움직이고 계속 가되, 고유의 빛을 잃지 마시길.
의무만을 말하는 사람들에게 휘둘리지 않고 권리를 용기 있게 말하는 것을 잊지 않고. 나만의 빛을 내고 색을 낼 붓질도 잊지 말고. 스스로에게도 관대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