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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여희 Oct 25. 2024

다른 집안 성 씨 속,  며느리들만의 사정으로.

90kg 즈음되어 보이던 건장한 체구의 제부는 그  이후로 맥을 못 추는 미니미 울라프가 되었. 동생은 차디찬 기운만 쏟아내는 눈의 여왕이  었다. 그 가운데에서 안절부절못하던 내가 있었다.


내가 아는 제부의 어머니는, 당사자도 아닌 내가 감히, 굳이 말해보자면... 장례식장에서의 몇 컷으로 판단할 수 있을 그런 분 아니었다.


새벽 버스를 타고 출근하시는 와중에도 밥상보 살뜰하게 덮어, 식구들 아침상 지 않던 아내이자 마.


퇴직 후에도 일하던 습관을 못 버리시고 "앉아서 놀면 뭐 해. 쉬엄쉬엄 일하면 되지." 실하셨던 분,


허리 디스크와 근저족막염 등 질환에도 자기를 위한 경차 한 대를 못 사셨던 분.



제부 어머님 손을 거친 모든 음식들은 특출 나게 개미진 데가 있어 우린 안대로 눈을 감싸 입을 크게 벌려도 제부 어머님 솜씨를 가를 수 있는 지경에 이르렀다.


흑백 요리사 속 급식 요리사 셰프님 손맛처럼

음식 솜씨가 독보적이신 분.


트러플 소금으로 간을 하셨나, 싶은 어머님 표 번데기 볶음. 해발 평균 500m, 일교차가 큰 고원지대에서 유기농으로 키운 여리디 여린 열무로 담그신 건가 싶은 아삭한 열무김치. 샤프란 향신료도 넣으신 겐가, 깊은 풍미가 느껴지는 볶음 등.


제부 어머님을 얼굴로 뵌 횟수보다 손맛으로 느낀 횟수가 더 많았던 터라 늘 감사하다는 마음뿐이었다. 시어머니라는 입장과 위치에서 말로 표현할 수 있는 서운함 들이나 싫은 소리 대신 정성과 애정, 푸근함, 걱정하는 마음만 묵묵히 담아 챙겨주시던 음식들이어서 더 그랬다. 덕분에 우리 아버지도 아프신 와중에 잃었던 입맛을 몇 번이나 찾으셔서.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온전히 아빠를 잃은 슬픔에 사로잡혀있다 분노에 들끓던 며느리 앞에서 시어머님 편을 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에도 오들오들 떨며 자체 검열에 힘쓰는 중)


광산 김 씨 집안 만의 고집과 신념으로 십수 년을 살아오신 며느리인 어머님의 결정과 선택이었을 테다... 김해 김 씨 며느리 아버지이자 사돈의 장례식장을 못 간 시어머니의 어려운 결단을 우린 존중해야 한다...라고 말 할 수 없었다. 제사를 한 번도 지내지 않았던 집안의 우리가 이해 못 하는 다른 사정이 있었을 테다, 다독일 수 없었다. 그 장황한 말들이 입 밖으로 나오기도 전에, 꽁꽁 얼어버린 지경이었으니까.


나는 이해하라는 말 대신, 침묵을 택하기로 했다. 다만 그 분노가 안 그래도 충분히 슬프고 아픈 동생을 집어삼키지 않기만을 바랐다. 그리고 우리 딸들 못지않게, 살뜰히 아픈 장인을 챙기고 모셨던 효자 사위, 제부에게까지 불똥이 튀지 않기만을.


버티는 사람은 목적이 분명하다
목적이 분명하지 않다면
그토록 버틸 이유가 없을 테니까.
그 목적이 무엇이든 간에
버틸만한 가치가 있다고 믿기에 버틴다.
힘겹게 버티고 있는 사람에게
즐기면서 살지 왜 바보같이
참고 있느냐고 말하는 것은
그 삶에 대한 모욕이다.
림태주 <관계의 물리학>


동생 또한 우리 가족 누구보다 힘겹게 버티고 있던 사람이라, 더 말할 수 없었다.


참으라고,

이해하라고,

각자의 사정이 달라서일 거라고.


지금도, 나는 말하는 중이 아니다.


우린 결혼 후, 우리가 가진 고유의 성 씨가 아닌 다른 성 씨의 며느리로 저마다 눈치껏 선택을 하고 산다.


아빠는 아마도 그 선택을 존중하셨을 것이다. 아빠의 세대는, 우리의 세대와 또 다르므로. 그리고 딸의 마음만 살폈을테다. 말없이.


https://naver.me/F6lcug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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