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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여희 Dec 20. 2024

김장은 제가 쭉 해보겠습니다.

그런데, 김장날 네일아트하고 간 며느리

김장을 앞둔 며칠 전, 아이의 학교 같은 반 친구의 엄마와 커피를 한 잔 마시게 되었다. 아직 존댓말을 나누는 걸로 봐선 알게 된 지 얼마 안 되는 사이.


(김장은 하셨어요?)


겨울철, 주부들이 흔히 나누는 대화의 첫인사이자 안부만큼 아이스 브레이킹하기 좋은 주제가 또 있을까.


아이 친구 엄마는 김장을 하는 시댁까지 3시간은 족히 걸리는 거리인 데다... 중간에 휴게소까지 들르고 뭐 좀 먹고 가고 하면 가는 데만 다섯 시간 걸리는 거리라... 결론은, 안 간다고 대답하였다.


그러면서, 내년이면 결혼한 지 10년 즈음되어 가는 내가 코로나가 한참 유행이던 시절 마침 코로나가 걸리고 말았던 해, 딱 한 번만 빼고 모두 김장에 다녀왔다는 사실에 놀라워했다.


(그럼, 제사도 가세요?)


(시어머님이 대부분 준비하시고, 저는 전 5종이랑 소고기 전 해서 6가지 전만 준비해 가요.)


(대단하시네요. 전 제사도 안 가요.)


김장도 안 가고 제사도 안 가도... 김장 김치는 택배로 받고 제사는 남편만 1박 2일로 다녀온다고 말하던 그 엄마는 연신 의외라는 반응이었다.


(나중에... 전 혼자서라도 김장은 할 것 같아요)


(대단하시네요.)


혼자 중얼거리다시피, 나온 내 말에 그녀는 살짝 감탄까지 한 듯했다. 그녀의 한쪽 눈썹이 찡긋 올라간 걸로 봐서는. 박수까지 살짝 친 걸로 봐서는. 하지만 그 끝엔


(뭐, 그렇게까지...) 줄임말이 숨겨져 있던 느낌이다.


안 그래도 독일에서 첫 김치를 담그기 시작했다는 막내 동생과 그런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내가 독일에 나와서 김치를 담그고 있을지 누가 알았겠어. 난 나중에 언니가 담근 김장 김치만 얻어가려고 했는데 말이야.)


나중에 우리 둘이 김장김치를 버무리고 있을 장면을 상상하며 우리는 키득키득 웃었다.


막 쪄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찐 고구마에, 우리가 '싱건지'라고 부르는 아삭하고 시원한 물김치를 먹는 조합을 좋아하는 나로선. 어머님이 담가주신 얇은 나박김치에 베인 깊은 맛에 자주 감탄하는 나로선. 가위로 자르는 김치 대신 결에 따라 쫙쫙 찢어 한 입 가득 먹는 생김치를 먹는 걸 좋아하는 나로선. 어떤 요리에라도 묵은지를 넣으면 묵은지 마법이 이루어진다는 걸 잘 아는 나로선. 친정 엄마의 김치와 시어머님의 김치 사이, 각각 다르지만 둘 다 맛있는 맛을 동시에 경험해 볼 수 있는 복을 가진 나로선. 겨울날의 김장으로 한 해가 여러모로 두루두루 맛있어질 수 있는 행운을 놓칠 리가 있나. 그리고 매번 양가에서 김치 찬스를 누리다 보니 사 먹는 김치엔 내 지갑이 열리지 않았다. 아무리 장인의 김치라도 하더라도. 우리 집에 김치 명인이 둘이나 있습니다만! 하는 자신감이 양 어깨에 장착되어 있었달까.


하지만 막상 김장 현장에 도착한 며느리는 네일아트를 지우지 못한 채로, 도마와 칼 앞에 섰다. 새벽 5시 50분.

5시 30분 즈음부터 들리던 시어머님의 칼질 소리에, 알람 없이도 눈이 저절로 떠지던 아침. '더 자고 이따 와도 되는데...' 다음에 이어지는 김장날의 굿모닝 인사는

김장하는 날에, 왜 네일 아트를 하고 왔어

였다.


(죄송해요. 미리 못 지웠어요...)


네일아트를 하게 된 경위와 못 지우고 오게 된 숱한 변명들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나, 변명 대신 칼을 잡았다. 더 열심히, 소로 넣을 갓과 미나리, 대파, 쪽파 등을 쫑쫑 어볼 요량으로.


평소 때와 다른 없이 재료를 잡은 손가락의 손톱이 보이지 않도록 손을 안으로 오므려 모았다. 하지만 눈치가 없었는지, 긴장한 탓인지, 삐져나온 손톱 끝자락 한쪽이 썰려졌다.


(악!!!!!)


도마 한쪽, 선명하던 민트색 네일 한 조각.


(눈치 없이, 왜 가만히 있지를 못하니!)


젤 네일 한 조각을 서둘러 쓸어 담았다.


진땀이 나면서 손 끝이 흔들렸다. 이런 자세로, 김장을 해보겠다고!


김장날 훨씬 이전부터 어머님과 아버님이 준비해 오신

한 망의 생마늘에서 벗겨지고 썰려진 간 마늘과 영광에 손수 가 사 오신 액젓류들, 순창까지 가서 사 온 고춧가루를 넣어 방앗간에서 갈아온 양념들, 찹쌀에, 멸치 다시마 육수를 넣어 만든 찹쌀풀들이 일제히 한 마디씩 하는 듯했다.


(김장 전부터 준비해야 할 게 얼마나 많은데... 네일아트 하나를 못 지우고! 우린 순창에서 온 고춧가루! 영광에서 온 액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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