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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부신 날 Oct 09. 2024

(숲속의 빨간신호등 2부)5. 아빠와 딸

환경생태동화

5. 아빠와 딸     


“리초! 얼른 숨어.”

새신랑 따오가 소리치며 들어왔습니다. 리초는 점심 준비를 하다 말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따오를 쳐다 보았습니다. 따오는 숨을 헐떡이며 간신히 말을 내뱉었습니다. 

“사람들을 봤어.” 

“사람이라고?”

리초의 털이 파르르 긴장하며 솟아올랐습니다. 따오도 들어서자마자 몸을 부르르 떨었습니다.

“지금 아래쪽 바위에서 쉬고 있어.”

“지난 번 그 사람들일까?”

“가만, 그러고 보니 좀 이상한데? 아이도 한 명 있고.”

따오가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아이라고?”

리초는 언젠가 숲에서 아이를 만났던 적이 있습니다. 아이는 귀여운 모자를 쓰고 있었고 별로 춥지도 않은데 손에는 장갑을 끼고 있었습니다. 리초는 아이의 울음소리를 듣고 아이가 부모와 떨어져 길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아이는 훌쩍거리다 리초를 보자 울음을 딱 멈추었습니다. 리초는 땅을 향해 코를 몇 번 킁킁거리다가 고개를 들었습니다. 아이는 해맑게 웃으며 리초에게 다가왔습니다. 아이는 솜털같은 손으로 리초의 뺨을 어루만졌습니다. 리초는 아이에게 얼굴을 내맡긴 채 가만히 서 있었습니다. 아이의 손이 파르르 떨렸습니다. 손끝에서 전해지는 촉감은 햇살이 어루만지는 느낌과 비슷했습니다.

“아이도 같이 왔다면 좋은 사람일 것 같은데.” 리초가 혼잣말로 중얼거렸습니다.

“아냐. 사람은 알 수가 없어. 사람이 겉으로는 착해 보여도 속마음은 같아. 언제나 우리 동물을 못 잡아서 안달이지. 싸리 박사를 봐. 결국 다리를 잘라내고 제대로 걷지도 못하게 됐잖아. 절룩거리면서 먹을 걸 구하러 돌아다니는 모습이 얼마나 가슴 아픈지 몰라. 이번에도 올가미인지 하는 덫을 놓으러 왔을 거야. 사람들이 여길 괜히 왜 오겠어.”

따오는 리초가 순진하다며 눈을 흘겼습니다.     

싸리의 첫째 아들 싸아는 아빠 대신 먹을 거리를 구하러 숲으로 나왔습니다. 이웃 어른들이 아픈 싸리를 위해 먹을 것을 아침 저녁으로 갖다주었지만 그것도 하루이틀이지 매일 세 끼 챙기기는 힘들었습니다. 왜냐하면 동물들은 늘 배가 고팠고 배가 고프다고 칭얼대는 새끼들도 많았고 그래서 자기 가족 먹이기에도 늘 시간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여우 가족이 먹는 식사와 다른 이웃 동물들이 먹는 음식이 서로 맞지 않았습니다. 

싸리는 싸아에게 길을 가다 이웃을 만나면 늘 고개를 숙이고 공손하게 인사를 하라고 시켰습니다. 이웃이 없었다면 싸리는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고, 그렇다면 싸아도 굶어죽을 것이 뻔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생명의 은인은 바로 리초네 숲을 함께 살아가는 이웃이야. 특히 우리가 늘 죽이고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었던 들쥐와 토끼가 나를 살려냈다니 얼마나 미안한지.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 싸아야, 이제 들쥐가 쪼르르 달려가는 게 보이거든 반드시 언제나 걸음을 멈추거라. 토끼가 깡깡총총 뛰어가는 게 보이거든 토끼가 사라질 때까지 몸을 감추거라. 들쥐는 우리 그림자만 봐도 기절하고 만단다. 토끼는 우리 냄새만 맡아도 벌벌 떨고 만단다. 그러니 네가 먼저 걸음을 멈추고 다른 곳으로 가. 그래야 우리 이웃들이 안심하고 다닐 수 있단다. 늘 바람결에 흘러오는 냄새를 맡고 들쥐와 토끼 냄새가 나거든 반대 방향으로 가야 한다.”     

싸아는 아빠의 잔소리가 듣기 싫었습니다. 아무리 죽을 뻔한 목숨을 살려줬다고 저렇게 비굴하게 해야할까 싶었습니다. 까루 같은 녀석은 한입꺼리도 안 될 건데 그냥 살려두라니 심통이 났습니다. 게다가 아빠가 아직도 아기 취급하는 것도 싫었습니다. 싸아는 태어난 지 어느새 6개월이나 됐습니다. 다른 친구들은 벌써 사냥에 성공했다고 자랑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하지만 싸아는 아빠를 돌보느라 2개월이나 사냥 연습을 하지 못했어요. 이제는 아빠가 사냥을 가르쳐줄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다리는 곧 나을 거야. 그러니 조금만 기다리렴. 아빠가 사냥하는 방법을 가르쳐줄게.”

싸리는 누운 채로 다리 상처에 약잎을 붙이고 있는 싸아에게 말했습니다.

싸아는 멍한 눈으로 아빠의 다리를 쳐다보았습니다. 다리를 잘라내지 않으면 썩은 피가 온몸을 썩게 만들어 금방 죽고 말았을 거라고 했습니다. 아빠 다리로는 사냥은커녕 제대로 걷지도 못할 것입니다. 갑자기 슬퍼졌습니다. 갑자기 불행해진 것만 같았습니다.     

“아빠, 꽃사슴을 봤다고 한 곳이 여기야? 그때 꽃사슴 만난 얘기 다시 해 줘.”

여자 아이가 아빠에게 졸랐어요. 아이는 레이스가 아래로 치렁치렁 매달린 노란 모자를 쓰고 있었어요. 등에는 빨간 풍뎅이가 커다랗게 그려진 작은 가방을 메고 있었습니다. 멜빵에 반바지를 입고 있었고 기다란 양말이 바지 바로 아래까지 길게 올라와 있었습니다. 머리는 길게 등허리까지 찰랑거렸습니다. 아이는 성큼성큼 걷는 아빠를 따라 가느라 종종 걸음을 쳤습니다.

“하늘아. 그럼 저기서 잠시 쉬었다 갈까? 물도 한 잔 마시고 말이야.”

아빠는 아이 손을 크게 흔들며 말했습니다.

“좋아. 아빠. 나도 사실 목이 좀 말랐거든.”

아이는 폴짝 뛰어 작은 바위 위에 올라갔습니다. 등에서 가방을 벗어내 가슴 앞으로 가져왔습니다. 빨간 풍뎅이를 손으로 한번 쓰다듬고는 가방 속에 들어 있던 작은 물병을 꺼냈습니다. 이미 많이 마셨는지 물병에 물은 반 정도밖에 차 있지 않았어요.

“그럼 아빠도 물을 마셔볼까?”

시원한 푸른색 외투를 입은 아빠는 큰 걸음으로 성큼성큼 걸어와 아이 옆 바위 위에 걸터 앉았습니다. 아빠는 바지 뒷주머니에서 푸른 손수건을 꺼내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습니다. 아빠도 등에서 가방을 벗어내고 물병을 꺼내들었습니다. 캬. 시원하게 물을 마셨습니다. 

“하늘아 잘 들어봐. 아빠가 차를 타고 여기 아래에 있는 길을 운전하고 있었어. 아빠가 출장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잖아.”

“맞아. 아빠. 그때 내가 아빠한테 전화하고 있었잖아. 그때 아빠가 갑자기 하늘아! 하늘아! 하고는 말을 못했어.”     

“너무 놀라서 말을 못했던 거야. 아빠가 맨 앞에서 봤거든. 그 꽃사슴이랑 눈이 딱 마주쳤는데 눈동자가 얼마나 예뻤는지 몰라. 아빠가 늘 숲에서 살고 싶다고 했잖아. 오늘 하늘이랑 이렇게 같이 숲에 온 건 하늘이에게도 아빠가 보여주고 싶어서 그래. 숲을 사랑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동물과 함께 살아가는 게 얼마나 행복한지.”

“알아. 아빠. 그래서 아빠 따라서 왔잖아”     

싸아는 산 중턱 바위에 가만히 엎드려 있었습니다. 배가 고파 움직일 힘도 없어 엎드려있긴 했지만 사실은 아까부터 갑자기 나타는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싸아는 이제 사람이 오면 냄새로 알아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싸아는 아빠의 사고 이후 사람이라면 무조건 미워했습니다. 아빠 다리를 못 쓰게 만든 사람. 숲에는 사람이 얼씬도 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사람이 오는 순간 숲은 파괴되고 말 것입니다. 사람을 미워하는 걸 아는 친구들은 일부러 싸아 앞에서 갑자기 ‘사람이다’ 소리쳤습니다. 싸아는 입에 거품을 물고 으르렁거렸습니다. 친구들은 웃으며 싸아를 놀렸습니다. 이번에는 진짜입니다. 친구도 없고 아빠도 없지만 이대로 물러설 수 없습니다. 진짜 사람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우리 가족을 불행하게 만든 사람. 가만히 둘 수 없어. 싸아는 가만히 몸을 일으켜 세웠습니다. 바람을 등에 지고 사람이 앉아 있는 바위쪽으로 살금살금 내려갔습니다.     

앞쪽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습니다.

“아빠! 꽃사슴인가 봐. 내가 가볼게.”

아이가 벌떡 일어나 앞쪽으로 달려갔습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멀어졌습니다. 아이는 소리를 따라 안쪽으로 더 깊이 들어갔습니다.

“하늘아. 너무 멀리 가지 마.”

아빠가 일어나 소리쳤습니다.     

싸아는 일부러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내며 벼랑쪽으로 아이를 몰아갔습니다. 아이는 모르고 있었지만 숲 안쪽에는 깊은 골짜기가 숨겨져 있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싸아가 갑자기 수풀을 헤치고 밖으로 뛰어나왔습니다. 몸을 잔뜩 세우고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렸습니다.

“아악, 아빠.”

아이는 깜짝 놀라 뒷걸음질을 했습니다. 뒤를 돌아본 아이는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움직이지 못했습니다. 발 밑에서 자갈들이 골짜기 아래로 떨어졌습니다.     

겁에 질린 비명 소리가 조팝나무를 뚫고 리초네 집으로 들어왔습니다.

아이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게 분명했습니다. 리초는 집 밖으로 뛰어나갔습니다. 따오가 리초를 불렀지만 이미 리초는 바위쪽으로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리초가 수풀을 헤치고 들어가자 으르렁거리고 있는 싸아가 보였습니다. 싸아 앞에서 아이는 겁을 잔뜩 집어먹은 채 울먹거리며 서 있었습니다. 리초가 모습을 드러내자 싸아는 말릴 틈도 없이 아이에게 달려들었습니다. 아이는 너무 놀라 뒷걸음질을 쳤고 그대로 미끄러져 골짜기 아래로 떨어졌습니다. 싸아는 씽긋 웃으며 몸을 돌려 숲 안쪽으로 달아났습니다.

“안 돼!” 리초는 앞뒤 재지 않고 골짜기로 뛰어내렸습니다. 그러나 이미 늦었습니다. 리초는 비탈진 계곡에서 중심을 잡지 못하고 주르르 미끄러졌습니다. 몸이 빙글빙글 돌았습니다. 어릴 때 엄마가 사슴은 앞다리가 짧아 내리막길에 약하니까 늘 조심해야 한다고 했던 말이 떠올랐습니다. 오른쪽 앞다리가 배밑으로 깔려들어갔습니다. 그 상태로 계속 미끄러져갔습니다. 앞에 커다란 바위가 길을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피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리초는 앞다리를 접질린 채 그대로 바위로 돌진했습니다. 눈을 질끈 감았습니다. 쿵 소리와 함께 하늘이 노랗게 변하면서 리초는 정신을 잃고 말았습니다. 엄마. 리초가 마지막으로 내뱉은 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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