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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용호 Sep 23. 2024

불청객은 밤에도 초원과 어울리지 않는다.

 늦은 밤과 새벽의 경계에 레니와 게이드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레니와 게이드가 자리를 잡고 누운 무리의 동쪽 끄트머리에서 경계를 서고 있는 것은 알렌 삼촌 하나뿐이었다. 몇 안 되는 어른 코뿔소 몇이 돌아가면서 밤을 새워 이 넓은 초원을 경계하고 있어야 했기에 경계는 그리 삼엄하지 않았다. 사실, 인간들이 무리 쪽으로 올 때는 밝은 빛과 우렁찬 소리가 함께였기 때문에 경계가 삼엄할 필요는 없었다. 굳이 누군가 무리를 이탈하지만 않는다면. 


 레니와 게이드는 알렌 삼촌의 시야에 잡히지 않기 위해 먼 길을 돌아야 했다. 발걸음 소리가 최대한 나지 않게 먼 길을 돌아 살며시 움직이는 것은 생각보다 힘든 일이었다.


"이쯤이면 알렌 삼촌의 시야에서 벗어난 것 같은데."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눙. 이제부터 속력을 좀 내도 될 것 같다눙."

"좋아 내 뒤로 붙어 오랜만에 신나게 달려보자."

"아니, 내가 앞장 서겠다눙. 넌 달릴 때 지나치게 몰입한다눙, 우리는 지금 인간들한테 뿐만 아니라 맹수들한테도 발견되지 말아야 하는 상황이라눙. 내가 잘 살피면서 먼저 달리겠다눙. "


 오랜만에 초원을 마음껏 달려볼 수 있는 기회를 놓쳐서 아쉬웠지만 게이드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 레니는 바로 수긍했다.


"좋아, 게이드 앞장서!"

"좋아! 간다눙!"


게이드는 먼저 출발했다. 오랜만에 바람을 가르는 코뿔 끝의 감각이 좋았다. 다리에는 힘이 실렸고, 내딛는 걸음마다 땅을 울리는 느낌이 좋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느낄 때가 아니라고 머리를 좌우로 몇 차례 흔들었다. 달리면서도 최대한 넓은 반경을 주시해야 했다. 소리를 들어야 했고, 땅의 진동도 느껴야 했다. 밤의 초원은 인간이 없어도 위험한 곳이었다. 


 게이드가 앞장서고, 레니가 뒤따라 한참을 달려 이전에 인간들을 살펴보던 바위 주변까지 왔다. 레니와 게이드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바위뒤에 몸을 숨기고 인간들의 진영을 살폈다. 천막의 지붕에 매달아 높은 몇몇 개의 전구에서 나오는 불빛이 주변을 밝히고 있었다.  초원에서 어둠을 몰아내기 위해 빛을 뿌리고 있어야 하는 것은 인간 밖에 없었다. 초원의 주인들은 어둠 속에서도 주위를 충분히 볼 수 있었다. 초원의 불청객은 밤에도 초원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트럭이 없는 것을 발견한 레니가 말했다.


"인간들의 트럭이 보이지 않아."

"정말 그렇다눙. 사냥을 나간 건가? "

"그럼 저곳이 비어있다는 말이잖아. 가까이 다가가 보자."

"안돼 위험하다눙! 여기도 들키면 도망갈 수 있을지 모른다눙! 그런데 인간의 소굴로 기어들어가겠다고? 절대 안된다눙! "

"그럼 여기까지 와서 그냥 돌아갈 거야? 여기까지 왔다면 뭐라도 알아 가야지. 이렇게 지켜보고만 가는 건 의미 없어. 우린 여기 어렵게 온 거라고. 걱정되면 여기서 지켜보고 있어."


 말을 마친 레니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바위 밖으로 나가 앞으로 달렸다. 게이드는 말릴 겨를도 없이 뒤따랐다. 레니는 망설임 없이 달려 나갔다. 어차피 주변에 몸을 숨길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럴 땐 빠르게 움직여 노출되는 시간을 줄이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초원에서 평생을 쫓기며 살아온 코뿔소들에게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이었다. 울타리 주변에 도착했을 때 레니는 주변을 살폈다. 천막 뒤쪽으로 빛이 덜 드는 곳에 울타리를 코로 슬쩍 밀어 보았다. 간이로 설치된 울타리라 조금만 무게를 싣는다면 충분히 쓰러질 것 같다고 레니는 생각했다. 게이드에게 눈빛으로 신호를 준 다음 레니는 코뿔로 울타리를 슬쩍 밀었다. 옆에서 게이드가 가세했다. 소리가 나지 않을 만큼 조금씩 울타리는 기울어지면서 밑동이 뽑히고 있었다. 


 레니가 넘어진 울타리를 사뿐히 밝고 안으로 들어갔다. 천막의 주변을 살피고, 아무도 없음을 확인했다.  천막 안을 살펴본 레니는 거침없이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천막 안은 가운데 큰 테이블이 하나 있었고, 그 위로 전구 하나가 방구석구석을 밝히고 있었다. 천막 가쪽으로는 여러 개의 상자가 있었고 한쪽에 인간을 의 총이 여섯 자루 걸려 있었다. 


 레니는 가쪽에 있는 상자로 다가가 냄새를 맡고, 코뿔로 툭툭 건드려 보았다. 반응이 없자 조금씩 세게 건드려 보았다. 답답했던 레니는 코뿔로 상자롤 쓰러뜨리더니 앞발로 상자의 옆 윗부분을 발로 밟고 무게를 실었다. 상자가 버티지 못하고 한쪽 면이 부서졌다. 상자 안에서 쏟아진 것들을 보고 놀란 레니는 자신도 모르게 입 밖으로 소리가 새어 나왔다.


"엇!!"


 밖을 주시하고 있던 게이드는 레니에게 주의를 주기 위해 돌아보다가 상자 안의 물건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엇!!"

 

 레니와 게이드는 상자에서 쏟아진 것들을 한참 쳐다보고 있었다. 분명 코뿔소의 코뿔이었다. 인간들이 코뿔소를 사냥하고 뿔을 가져간다고 듣기만 했었다. 이렇게 직접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태어나서 한 번도 코뿔소에게서 떼어져 있는 코뿔을 본 적이 없었다. 당연히 코뿔소에게 붙어 있어야 하는 것이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늘 봐왔던 코뿔이지만 이렇게 코뿔소의 몸에서 떼어져 있는 코뿔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처음에는 놀라움 그리고 이내 두려움이 그들을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레니와 게이드의 눈에서 눈물이 고였다. 억울함이 몰려왔다. 그리고 이내 그 자리를 분노가 채웠다. 


 레니는 흥분했다. 코뿔로 테이블을 뒤집어 버렸고 상자들을 닥치는 대로 들이받았다. 레니의 흥분을 보고 게이드도 말려야 했지만 이번에는 같이 분노하고 있었다. 게이드도 총이 걸려있던 장식장을 넘어뜨렸다. 총들이 바닥에 쏟아져 내렸다 게이드는 총들을 마구 짓밟았다. 레니는 천막 안에 있던 모든 것들을 들이받고 뭉개 버렸다. 게이드도 질 수 없었다. 눈에 보이는 것은 닥치는 대로 들이받고, 뭉개고, 물어뜯었다.


 두 마리의 코뿔소는 멋대로 날뛰었다. 마치 인간들이 초원을 멋대로 뭉개 놓은 것에 대해 앙갚음 하는 듯 보였다. 천막 안이 엉망진창이 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게이드가 날뛰다 천막의 기둥을 들이받았다. 천막은 기울어지며 쓰러졌다. 천막이 쓰러지면서 천막 안에 있던 종이 뭉치에 불이 붙었다. 전구가 깨져서인지 대충 묶어 두었던 전선에서 합선이 발생한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종이에 옮겨 붙은 불은 테이블로, 천막으로 옮겨 붙고 있었다. 입구 쪽에 있던 레니는 가까스로 빠져나왔다. 게이드는 천막이 덮친 채 안에 갇혀 우와좌왕하고 있었다. 불길은 천막으로 옮겨 붙고 있었다. 레니는 소리 질렀다. 


"게이드 이쪽이야!"

 게이드는 뭐라고 소리를 질렀지만 무슨 소린지 알 수 없었다. 게이드는 바깥의 상황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레니는 불이 붙은 반대쪽 천막을 들치고 얼굴을 들이밀고 아까보다 더 큰 소리로 소리쳤다. 


"게이드 불이야! 이쪽으로 와야 해!!"


 게이드는 레니의 목소리를 따라 움직였다. 맞는 방향인지는 몰랐지만 일단 움직였다. 레니가 고개를 들이면 곳에서 몇 발자국 오른쪽으로 게이드는 나왔다. 천막 안으로 고개를 들이밀고 있는 레니를 발견한 게이드는 레니 옆으로 가서 소리쳤다.


"나왔다눙!"


 게이드의 소리를 들은 레니는 고개를 빼고 게이드를 쳐다봤다. 여기저기 다친 곳이 없나 빠르게 살폈다. 


"무사해서 다행이야!"

"응 근데 이제 도망쳐야 겠다눙. 인간들이 이 불길을 보면 몰려올 거라눙!"


게이드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바닥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분명 이전에 인간들에게서 도망칠 때 느꼈던 그 진동이었다. 다만 진동이 있은 지는 꽤 되었다. 게이드를 걱정하느라 느끼지 못하고 있었을 뿐. 이제 진동은 제법 가까워졌고, 어렴풋이 트럭의 소리도 들렸다. 트럭은 불길을 알아채기라도 한 듯 더 큰소리로 울부짖으며 더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늦었어 뛰어"


 레니가 외치면서 천막 뒤쪽, 뭉개놓은 울타리를 향해 뛰었다. 게이드도 바로 뒤쫓았다. 두 마리의 코뿔소는 뭉개놓은 울타리를 넘어 전속력으로 아까 몸을 숨겼던 바위 쪽으로 달렸다. 트럭도 코뿔소를 발견한 듯 뒤쫓아 달렸다.



<8화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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