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배경 성장기 단편소설
중학교 배경 성장기 소설
날씨가 어두워서 그랬는지, 용산이라는 지역 자체가 어두운 건지는
모르겠는데 안 좋은 일이 일어날 것 처럼 공기는 무거웠다
둘이서 한참 언덕을 올라가는 와중에
예상했던 첫 번째 필연이 나타났다
이태원에서 처음으로 만난 깡패의 인상착의는
바짝 민 옆머리와 젤을 잔뜩 발라 위로 솟은 잔디는 광택이 났고
두꺼운 담배를 (시가?) 피우고 있었다
저런 담배가 있는 줄은 처음 알았다
“야, 야, 이리 와봐 “
가로수 아래 어둠 속에서
우리를 향해 정조준한 목소리를 거역하기에는
길 위엔 달랑 우리 밖에 없었다
깡패의 시선이 제헌이형을 붙잡았을 때
나도 모르게 못들은 척하고 계속 걸어갔다
너무 쫄아서 나온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멀찍이 떨어져 제헌이형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몇 마디의 대화가 오고 가고
제헌이형은 아무 일 없이 돌아왔다
제헌이형은 나를 나무라지 않았고
대화 내용을 말해줬다 깡패 왈
“ 너 돈 있지?”
“ 조금요..”
“ 뭐? 없다고? 꺼져-“
싱거웠다
“병신 주머니 속에 십만 원 들어있는데 ㅋㅋ “
생글생글 웃고 있는 제헌이형의 표정엔 다행이라기보단
한방 먹인 쾌감을 느끼고 있었다
깡패 쪽을 돌ㅇ보니 다른 두 명이 걸려서 대화를 하는 중인데
길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저 둘 덕분에 우리가 무사했는지도...
작은 해프닝과 도보의 시간 후에
드디어 이태원 시장에 도착했고..
길은 언덕 길 만큼 어두웠지만 에너지는 완전히 달랐다
우리가 오기만을 기다린 삐끼들이 활기찬 인사로 환영했다
“ 필요한 거 있어?”
“ 찾는 거 말해봐 ”
“ 일단 들어와봐 다 있어 ”
가출한 고등학생 같은 인상착의를 한 형들이
같은 말투와 같은 표정으로 우리를 향해 호객했다
호객이 너무 능동적이다 보니 되려 우리는
수동적인 태도가 되어 머뭇거리고 있는데
밝게 탈색된 헤어와 친절한 말투를 가진 삐끼의
소프트한 접근은 대화로 연결되었고
어떤 결정이 내려진지도 모르게 밝게 탈색된
뒤통수를 따라가고 있었다
우리는 큰 길에서 골목길 안으로 끌려들어 가는 모양새였지만
부푼 기대감으로 들떠있었고 내심 탈색머리 삐끼를 믿고 있었다
맨 콘크리트로 된 계단 수십 칸을 내려가고
갈라진 틈으로 물이 새어나오고 그 위로 검은 이끼가 핀 콘크리트 벽을따라
철근이 노출된 담 사이를 건너자
어느 건물 철 문 앞에 도착했다
정신없이 걷고 있을 땐 몰랐는데
걸음을 멈추자 우리가 메인 길에서 상당히 멀리 들어온 것과
이 삐끼가 딴 맘먹으면 난처한 상황이 벌어질 가능성이 있었다
좁은 미로 안이라서 도망칠 수 있는 방법도 없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와중에
탈색한 머리 삐끼는 쇠로 된 열쇠를 열심히 돌려 잠긴 문을 열고 있었다
문이 열리자 자연히 우리는 쇠문 안으로 들어갔고
내 등 뒤에서 문이 닫혔다
'깜빡 깜빡 깜빡'
콘크리트 천정위에 맨 몸으로 붙어있는 형광등 불이 켜지자
어둠이 걷히고 반전이 일어났다
철문 안에 펼쳐진 가게 내부의 광경은
내가 바라왔던 모습 그 자체였다
내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내가 이태원에 대해 들었던 모든 소문들이
그대로 구현되어있었다
나의 구체적이고 디테일한 바람을 완벽하게 만족시키는
온갖 브랜드의 옷들이 콘크리트 벽을 빽빽이 채우고 있었고
나무 막대기로 된 옷걸이 위에
아는 브랜드, 모르는 브랜드의 티셔츠들이 뺵뺵하게 채워져 있었고
다른 모퉁이에는 바지, 그 위에는 점퍼 그 아래는 신발이 ...
청바지 엉덩이에 큼지막히 붙어있는 켈빈클라인도 보였다
시선은 잠시 그 곳을 머물렀고
이내 화려한 각양각색의 물건들에 시선을 뺏기고 있었다
여기에 오기 전엔
꼭 캘빈클라인이어야만 했지만
이제는
꼭 캘빈클라인이 아니어도 된다는 마음도 들었다
대충꼽혀있는 형광등 불빛 아래
탈색머리 삐끼의 얼굴에 칼자국인지 깊게 패인 여드름 자국인지
아까는 보이지 않았던 피부의 디테일이 새삼 보였으나
이미 삐끼형에 대한 두려움은
믿음으로 덮어버린 지 오래였다
“하나 골라봐”
삐끼 형의 차분한 한마디에
제헌이형과 나는 고삐 풀린 고객이 되어
온 가게를 구석구석 샅샅이 뒤지고 있었다
나의 마음을 얻은 삐끼형은 정신없이 디깅을 하는 우리를
방해하지도 않고 ‘니가 좋으면 나도 좋아’
미소를 지은채 일관성있게 굴었다
내가 경험한 지상의 가장 멋진 장소에서
나의 선택은 결국 캘빈 클라인 블랙진이었다
처음엔 다른 가능성도 열어두려 했으나
초이스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은
버스를 타고 지나쳐온 압구정 갤러리아 맞은편 상가에
걸린 큰 현수막이었다
“블랙진이 돌아온다”
캘빈클라인 광고 카피였는데
블랙진에 미래를 걸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제헌이형도 하나 골랐다.
시그날이라는 브랜드로 나는 모르지만
제헌이형 왈 이 브랜드가 이태원에 있을 거라곤 상상 못 했다며
이 방면 전문가 다운 안목으로 레어템을 골랐지만
나의 선택엔 지장을 주지 않았다
이제 계산해야 할 시간이 다가왔다
내 수중의 버짓보다
더 비싸거나, 더 싸거나.
우리는 이태원의 시세를 몰랐고
제헌이형이 먼저 얼마냐고 물어봤다
언제 시켰는지 짜장면을 먹고 있던 삐끼형이,
짜장 면발을 끊고 천천히 구석에서 나와 우리를 바라보며
“싸게 줄테니까 가져가 “
너희가 먼저 불러보라는
의미있는 신호탄을 쐈다
제헌이형은 과감하게
15000원 !!!
을 불렀고
나라면 저렇게 못했을 텐데..
과감한 제헌이형의 선방이 멋져보였다
삐끼형의 편한 표정이 험악하게 굳을까 걱정도 했지만,
표정 변화 없이
“3000원 만 더 쓰자..
개당 1.8 에 줄게
들여온 값에 주는겨”
삐끼형의 설득은 간결했고
나로선 흥정할 의지가 별로 없었다
감당할 만한 금액이었고
18000원에 팔아서 남을 거라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나름 만족스러운 금액이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가게 한 켠으로 물러나
신발을 벗어 양말 속의 배춧잎(만원지폐) 2장을 꺼냈다
땀을 흠뻑 먹고 무거워진 2장은
달라붙어 잘 떨어지지 않았다
발바닥 모양의 아치가 생긴 눅눅한 2만 원을 받은 삐끼형은
가운데가 반쯤 찢어져있는 천 원짜리 두장과 함께 바지가 들어있는
수십 마리의 학이 비상하고 있는 검은색 비닐 봉지를 건냈다
건네받는 순간 눈시울이 촉촉해졌다
우여곡절 끝에 찾은 기쁨을 만끽하며
문득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이라는 멋진 표현이 생각났다
내일 아침 CK 로고가 붙어있는 블랙진을 입고 등교할 것이며
아는 놈은 알아볼 것이고 못 알아봐도 그만이다
우린 각자가 이룬 무언가를 들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다음날 학교에서 갔더니
바지를 의식한 친구는 다름아닌
패션에 민감한 영호였다
누나 바지를 입고 다닐 정도로 패션에 극성인 친구였다
다리가 긴 영호가 내 바지를 보며 아는 척을 했다
“얼 - CK 샀네-?”
나는 장난치듯이
“이거 짭이야”라고 말했다
최영호는 자세히 들여다보더니
“진퉁인데?
왜 진퉁을 짭이라고 해? ”
‘장난친 거지 인마’
라는 듯한 표정으로 말없이 웃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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