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 오후 3시다. 지하철에서 내리자마자 매미소리가 귀를 찌를 듯이 울린다. 터덜터덜 계단을 오른다. 오늘따라 집에 가는 길이 더 멀게 느껴진다. 5분 정도 걷자 등은 땀으로 축축하다. 찌는듯한 아스팔트에 몸은 더 퍼진다. 불현듯 냉장고에 있는 라거 맥주가 떠오른다. 이틀 전에 편의점에서 4개를 사놓았던 기억이 난다. 2캔 정도는 남아있을 것이다. 맥주를 마셔야겠다. 나는 걸음을 재촉한다.
집에 들어선다. 냉장고가 보이지만 욕실로 향한다. 먼저 찬물로 땀을 씻어내야 한다. 맥주를 맛을 느낄 새도 없이 벌컥벌컥 마시고 싶지 않다. 몸의 열기가 살짝 식고 난 뒤 마셔도 충분할 것이다. 몸을 대충 닦고 냉장고로 다가간다. 차가운 맥주를 꺼낸다. 선풍기 앞에서 뚜껑을 연다. 한 모금 마셔본다. 시원한 탄산이 목을 타고 들어온다. 역시 여름엔 맥주다.
처음부터 내가 맥주를 좋아한 건 아니었다. 사실 맥주보단 소주였다. 처음 술을 마셔봤던 대학교 1학년. 술자리에는 항상 소주가 등장했다. 싸다는 장점밖에 없는 알코올. 그것이 술에 대한 나의 첫인상이었다. 친구들은 처음부터 소주를 싫어했지만, 나는 그렇게 싫진 않았다. 가끔 달게 느껴지기도 했다. 술은 어차피 맛을 위해 마시는 게 아니라는 인식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시작을 소주로 배워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한동안 맥주에 입을 대지 않았다. 배도 불렀고 가격도 비쌌다. 가장 큰 이유는 맛이었는데, 보리음료에 탄산과 소주를 섞은 맛이 났다. 굳이 맥주를 마시진 않았고 1,2년이 지났다.
학교 근처 술집 중에 다른 곳보다 고급스러운 호프집이 있는데 친구에 이끌려 가게 되었다. 그곳에서는 레드락이라는 생맥주를 팔았다. 친구는 여기서만 파는 맥주라 꼭 마셔봐야 한다며 레드락 4잔을 시켰다. 멋스러운 로고가 세겨진 두꺼운 맥주잔에는 붉고 투명한 것이 담겨있었다. 보통의 노란색과는 달랐다. 짠을 하고 한 모금을 마시니 맛이 제법 좋았다. 묵직하고 고소한 맛이었다. 목 넘김은 부드러웠고 진한 맛에 깊이가 있었다.
'아, 맥주가 이렇게 맛있는 거였구나'
마실 때마다 예전에 마셨던 맥주와 차이를 깨달을 수 있었다. 대부분 치킨집의 500CC 맥주였는데, 그 밍밍한 맛이 싫었던 것이다. 그 맛 때문에 나는 쉽게 맥주와 친해지질 못했었다. 그 이후 나는 나에게 맞는 맥주 맛을 하나씩 찾아 나갔다. 애정 하는 맥주 브랜드도 몇 개 생겼다.
이후 당연한 듯이 라거 맥주를 찾는다. 크래프트 전문점이 유행하고, 수많은 에일맥주가 나와도 나는 여전히 라거만 고집한다. 목에서 느껴지는 탄산감은 맥주를 마시는 이유 중 하나다. 향긋하고 부드러운 맥주 맛을 좋아하는 이도 더러 있지만, 나는 묵직한 탄산만 마신다.
매해 쓰는 버킷리스트에는 '3대 맥주축제 가기'가 적혀있다. 독일 뮌헨 옥토버페스트, 일본 삿포로 오도리 비어가든, 중국 칭다오 맥주축제는 꼭 가보리라 다짐한다. 여행을 떠날 때도 근처에 맥주공장 견학코스가 있다면, 꼭 여행 코스에 포함시킨다.
나이가 들면 변할지도 모른다. 입맛은 한결같지 않다는 것을 아니까. 하지만 한동안 무더운 날이면 가장 먼저 찾게 되는 건 라거 맥주가 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