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06. 12. (월) 언더드릴
1.
선생님들의 휴가로 시간표 임시 변동이 생기면서 마지막 시간대에 언더드릴 수업이 잠시 이사를 왔다. 그에 따라 수업 장소도 3층에서 2층으로 이동되었다. 2층에 도착하니 조명이 거의 다 꺼져있고 몇 개의 촛불만 아른거리며 어둠에 겨우 저항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넓은 공간에 언제나 부지런하고 성실하게 일찍 도착해 몸을 풀고 있는 H가 있다. H와 인사를 나누고 오랜만에 나도 내가 애용하는 자리에 매트를 펼친다.
느릿하고 묵직한 선생님의 카운트를 따라 빈야사에 들어갔다. 언더드릴 수업에서 매번 하는 시퀀스들이지만 다른 공간에서 만날 땐 새로운 느낌이 든다. 공간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있다. 2층에서 주로 하던 수업들의 정취, 내 자리, 내 자리에서 바라보던 전경, 누운 자세에서 바라본 천장의 모양, 낮의 모습과 밤의 모습, 외부 소음, 바닥의 질감과 온도.
2층도 내겐 익숙하고 언더드릴도 익숙하지만 오늘은 익숙한 것과 익숙한 것이 만났음에도 새로운 조합이 되었다.
2.
오늘따라 퇴근시간도 길고 집에서도 너무 졸리고 몸이 무거운 느낌이 들어 샤워도 하고 정신을 깨우고 갔는데도 몸이 쉬이 잘 풀리지 않는 것 같아 수련 때도 금방 지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있었다. 그러나 그런 걱정은 정말 불필요한 생각이었다. 수련을 하면서 서서히 몸이 풀리고 데워지고 땀이 흐르면서 힘들었던 아까의 몸과는 다르게 버겁지 않은 몸 상태로 움직이고 있었다. 내 몸이 기억하는 수련의 시간들이 쌓이고 쌓여서 움직이는 동안 마치 에너지가 생성되는 것 같았다.
사실 그렇지 않았다 해도 뭐가 문제였을까. 나는 무엇이 걱정이었을까. 수련하다 지칠 수도 있고 힘들 수도 있는 거지 그게 뭐 어때서 걱정을 했느냔 말이다. 너는 매번 수련 자체로 충분하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너는 수련하는 동안 그 순간엔 매번 최선을 다하지 않았던가. 그러면서 쌓였다. 나의 시간들이.
걱정은 왜 하는 걸까. 무엇을 위해서 걱정을 하나.
3.
수련을 할 때 이끌어주는 선생님에 대한 신뢰가 있으면 편안하고 집중력 높은 수련이 될 수 있다.
원장님의 수업이 그렇다.
자주 뵙기 때문에 선생님도 수업에 들어오는 사람들의 상태에 대해 잘 파악하고 있는 부분도 있을 것이고, 수련하는 사람들도 선생님에게 마냥 수동적으로 의지를 한다기 보다는 안전하고 집중력 높은 수업으로 이끌어 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각자가 자유롭게 최선을 다하게 되는 것 같다.
오늘 우르드바다누라사나 하면서 두 번째에서 선생님 발목을 잡고 올라가게 되었는데 혼자 할 때보다 흉부를 선생님의 다리 쪽으로 더 밀어내어 보았다. 발목 잡고 올라가는 거 정말 오랜만인데 어깨에 부담이 적고 손목도 덜 아프다. 선생님의 발목이 일종의 도구로 역할을 한 것인데 도구의 도움이 있어 훨씬 수월했다. 이런 도구가 제품의 형태로 있다면 좋을 것 같다는 다소 엉뚱한 생각을 하며 다섯 번의 우르드바다누라사나를 하고 내려오니 숨이 헉헉대며 거칠어져 있고 머리로 흐르던 땀 한줄기가 방향을 틀어 아래로 흘러내렸다. 아.. 땀이 줄줄 흐르는 계절이 돌아왔구나.
곧 여름이 오네. 이번 여름엔 어떤 시간들을 맞이하게 될까 기대된다. 매트에 내 땀이 뚝뚝 흘렀으면 좋겠다.
2023. 06. 15. (목) 하타
1.
수업에 늦을까 봐 허겁지겁 달려왔지만 언제나 캐주얼한 음악으로 수업 전 분위기를 밝혀주시는 선생님의 친절하고 매력적인 센스에 마음이 편안해졌다. 선생님은 본인이 좋아하는 음악을 잘 활용하시는 것 같았다. 그래서 한 번은 낯선 악기 소리가 매력적인 아프리카 음악을 틀어주셔서 너무 맘에 든 나머지 무슨 노래냐며 곡 정보를 물어봤던 기억이 있다. 곡의 원래 길이가 1분 30초 정도로 짧아서 아쉬웠지만 한동안 그 음악을 자주 들었다.
오늘 수업 시작은 중간 밧다코나아사나, 그다음엔 큰 밧다코나아사나, 마지막엔 원래의 밧다코나아사나. 발의 위치에 따라서 골반과 다리에 주는 느낌이 휙휙 달라진다. 밧다코나아사나에 이어 이리저리 골반도 풀고 트위스트도 하고 장요근도 풀었다. 워리어1에서 엉덩이가 삐죽 튀어나가 핸즈온. 조금만 방심해도 틀어져버리는 워리어1의 정렬.
우스트라아사나에서 손 집고 우르드바다누라사나로 갔다가 컴업하여 스탠딩, 다시 드롭백하여 우르드바다누라사나. 어디서 자신감이 생겼는지 선생님이 해보라고 말한 대로 망설임 없이 휘리릭 다 해봤다. 그 시작은 우스트라아사나를 한 후 컴업으로 올라올 때 전혀 힘들이지 않고 올라오게 되면서 오늘은 뭔가 가능할 것 같은 기분에 자신감이 올라온 것 같다. 모양이 어땠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편안한 마음으로 도전하는 날이 되니 기뻤다.
2.
끝나고 라자카포타아사나 이야기하다 다리가 안쪽으로 모이는 것에 대해 조언을 구했다. 우선은 선생님이 제안하는 솔루션은 무릎의 정렬. 무릎이 완전히 바닥을 보게끔. 그리고 배꼽이 바닥에서 떨어지지 않는 느낌으로 다리 접을 댄 몸을 앞으로 숙여서 해보기.
긴 시간이 필요한 아사나이고 서두르지 않기로. 무릎이 당기는 것도, 햄스트링에 쥐나는 것도 모두 그냥 내버려 두기로. 결국엔 방법이 하나인 것 같다. 묵묵하게 바르고 정직하게 계속 수련 해나가는 것.
요가를 처음 접했을 때부터 그렇게 결론을 내렸기에 꽤 몇 년이 흐른 시간 동안 요가를 했지만 어떤 자세에 대해서 선생님에게 적극적으로 질문하거나 하진 않았던 것 같다. 계속해보는 것이 중요하고 수업 중에 선생님들이 하는 말을 귀에 담고 몸에 담으며 그 내용을 내 몸에 복사해서 붙여넣기를 한다고 상상도 했다. 그렇게 지낸 시간들이 있다 보니 지금의 나는 방법적인 면을 모른다기보다는 수련의 반복과 제대로 해보려는 성실함과 정직함이 늘 필요한 것 같다.
3.
그리고 중요한 것은 어떤 것을 완성해야 한다는 생각으로부터 자꾸 멀어지는 연습.
사실 그런 연습 덕분에 예전의 나와 비교하면 지금은 마음가짐이 훨씬 많이 변화된 상태이다. 하지만 사람의 습성이나 근성이 쉽게 변하지 않기 때문에 대충을 싫어하고 잘 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는 이 성향에서 아무 조치 없이 방치하게 되면 요가를 하면서도 기를 쓰고 덤빌 게 분명하니까 항상 염두에 두고 살아야 한다.
안 되는 것은 되게 하라. 이게 원래 나의 습성이라면 요가할 땐 안 되는 것도 있다. 준비의 시간도 필요하다. 내 몸이 하는 말을 존중하라. 뭐 이렇게 변화된 것 같다.
계속될 수 있는 요가.
요가가 과정이고 이야기가 되는 것, 결과로서의 요가가 아니라 수련이 되는 요가.
동작의 완성이나 자기만족을 위해 본인을 채찍질 하기보다는 요가의 여정 자체를 즐기고 내 삶에 일치시키는 것이 훨씬 더 행복에 가깝다.
요가를 생각한다.
내 삶에 요가가 있어서 감사한 마음이 든다.
2023. 06. 23. (금) 아쉬탕가
금요일 하타 선생님 개인 일정으로 휴가를 가시고 오늘은 아쉬탕가 90분으로 진행되었다. 화요일 아쉬탕가 선생님을 금요일에 또 만나니 어찌나 반갑던지. 게다가 90분 수련이라니 기분이 좋았다. 아쉬탕가 수업이 대폭 줄어들면서 아쉬탕가 90분 수업을 정말 오랜만에 했다. 아니나 다를까 선생님도 이때다 싶은 표정으로 오늘 어려워하는 것들을 몇 개 시도해 보자고 예고하시며 몸을 열심히 풀라고 했다.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함께 한숨소리도 함께 깔렸다.
오늘 수련은 한 마디로 주어진 시간을 알뜰하게 탈탈 털어서 쓴 느낌이다. 오랜만에 90분 수련이니까 촘촘하게 최대한 할 수 있는 시퀀스를 실컷 해봅시다. 이런 느낌이랄까.
스탠딩 무난하게 흐르고 싯팅에서 자누시르사아사나도 오랜만에 A,B,C와 마리챠사나도 A,B,C,D를 다 했다. D 왼편에서 끙끙대며 고군분투하자 선생님이 곁에 와서 같이 잡아주셨다. 마리치아사나 C,D는 할 때마다 몸이 뜻대로 되지 않지만 땀이 많이 흐르고 몸이 뜨끈뜨끈 해지니 그거 믿고 마음껏 비틀 수 있는 용기가 생겨났다.
역시나 그냥 지나치지 않고 숩타쿠르마아사나도 연습하고 다리도 걸어봤다. 한 다리씩 걸었다가 두 다리 모두걸기에 도전을 했는데 오른쪽 다리 거는 것은 선생님의 도움을 받아 어깨 겨우 빼내고 티티바와 바카아사나로 가는 전환도 시도. 털석하고 다리가 풀리고 힘이 없어 또 훌러덩 거렸지만 그래도 뭔가 성취한 기분이 드는 건 아마도 정말 오랜만에 하는 아사나임에도 어설프게나마라도 도전할 수 있었음에 그 이유가 있는 것 같다. 피니싱 거쳐 우트플루티히까지 집중해서 거쳐가고 개운하게 사바아사나를 하며 붙어있던 남은 기운을 다 털어냈다.
마치고 선생님과 또 다른 회원님 한 명과 짧게 스몰토크를 나누고 꾸준한 수련의 힘을 이야기하며 꾸준한 것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지으며 인사를 나누었다. 오랜만에 불이 붙는 느낌이 들었다. 내일 비록 근육통이 찾아오더라도 오늘의 수련에 열심히 몰입하여 온몸을 불태웠다.
타고난 자리엔 재가 남는 게 아니라 쉬이 꺼지지 않는 숯이 거기에 있을 것이다,
이런 게 아쉬탕가 요가의 매력이니까.
2023. 06. 27. (화) 아쉬탕가
1.
화요일 선생님의 마지막 아쉬탕가 수업이었다.
목요일 아쉬탕가가 없어지면서 다른 수업으로 채워지고 유일하게 하나 남은 수업이 화요일 60분 아쉬탕가였는데 그마저도 없어지는 것이다. 정확하게는 아쉬탕가 수업 자체를 잠시 중단하는 것이다. 원장님의 결단이었다. 일주일에 딱 한 번만으로는 아쉬탕가 수련의 연속성을 유지하기 어렵다는 것이고 잠시 중단하고 여건을 마련하여 다시 시작하기로 한 것이었다.
나도 거기에 동의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에 원장님 결단의 의도와 의의를 존중했다. 시작부터 끝까지 쉼 없이 계속 이어져야 하는 흐름을 가진 아쉬탕가의 특성 상 한 번의 구색처럼 존재하는 것은 아쉬탕가 수련의 의도를 찾아가기엔 무리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요가는 모두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 내 믿음이니까 아쉬탕가 수업이 중단된 것에 대해서는 생각을 깊게 하지 않기로 마음을 먹었다. 하타가 있어야 빈야사도 있고, 빈야사를 이해해야 아쉬탕가 빈야사의 지속성을 유지할 수 있을 것 같다. 어떤 수련도 좋으며 그대로 충분하다는 것을 받아들일 때 깊은 호흡과 오랜 머무름의 의미를 찾아가게 되고 어느 순간엔 비로소 명상의 단계에도 초대를 받게 되는 것 같다.
어쨌든 오늘은 기념 같은 아쉬탕가 수업이 되었다. 그것도 60분이라는 제약된 시간 안에서.
2.
그렇지만 화요일 선생님의 수업을 듣지 못하는 것은 또 다른 이야기였다. 수련하면서 같이 호흡하고 격려 받고 도움받고 하면서 쌓은 정이 있어서 아쉬움이 존재했다. 나의 아쉬움은 그게 컸다. 선생님과의 호흡을 이어나가지 못하는 것. 영영 헤어지는 게 아니지만 말이다.
나 같이 잘 우는 사람은 '마지막'이라는 것에 너무 집중하거나 의미를 두면 금방 콸콸 눈물을 쏟게 되니까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어떻게든 평소와 다름없는 수련이라고 생각하고 평소처럼 했지만 마지막 종료 빈야사에서 약간 울컥했다. 선생님의 마음은 과연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다가 감정선에 조준사격을 해버렸다. 겨우 호흡으로 진정시키고 사바아사나. 까만 밤처럼 조명을 모두 소등시켰다. 왠지 우리들의 머리 위로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것만 같다.
선생님과 작별 인사는 안했다.
마지막 같지 않아서 일부러 수고하셨습니다 와 같은 것조차 아무 인사도 하지 않았다. 곧 다시 만날 것 같아서.
즐거운 아쉬탕가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간다.
수업이 재개되는 그날까지 매일의 수련 또한 즐겁고 행복하게 하다가 다시 만나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