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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가 꿈꾸는 그곳 Jun 10. 2019

돌아갈 수 없는 한국의 명산  

#2 그 깊은 산중에 아내와 나 단 둘 뿐이었다 

너무 먼데까지 온 것일까..?


사노라면 등산을 할 때처럼 오르막이 있는가 하면 내리막도 있다. 특히 산행을 할 때 내리막이 나타나면 오히려 두려움(?)이 앞선다. 아직 갈 길이 먼데 당신 앞에 나타난 내리막의 길이는 장차 다가올 오르막을 예비하고 있다고 해도 무방하지 않았다. 우리 앞에 등장한 절경 대승폭포를 즐기는 것도 잠시 잠깐, 땀이 식자마자 다시 길을 나선다. 갈 길이 너무 멀다.




돌아갈 수 없는 한국의 명산  

#2 그 깊은 산중에 아내와 나 단 둘 뿐이었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우리가 장수대탐방지원센터에 주차를 하는 동안에는 산행 차림의 등산객들이 눈에 띄었건만 막상 대승폭포에 다다를 때쯤에는 우리 곁에 인기척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가까운 듯 저만치 거리를 둔 대승폭포의 시원스러운 물소리가 없었다면 마치 꿈속 같은 곳. 귀때기청으로 이어진 산길을 따라 천천히 걷노라니 고온 다습한 공기가 연신 땀을 밀어낸다. 겨우 대승령 꼭대기에 도달했지만 귀때기청까지 가는 길은 이제 시작이다. 


지금부터는 서북능선을 따라 쉬지 않고 걸어야 한다. 서북능선은 능선의 거리만도 18km에 9시간이 소요되는 곳. 등정과 하산을 포함하면 대략 13~16시간이 소요되는 매우 힘든 코스이자 지형이다. 또 능선이 길면서도 굴곡이 심해 체력 소모가 심하고 강인한 인내심을 요하는 곳이기도 했다. 이렇게 힘든 산줄기를 걷는 동안  한여름의 더위와 싸워야 하는 것이다. 그 깊은 산중에 아내와 나 단 둘 뿐이었다. 



어떻게 보면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산행 중에 혹시라도 무슨 사고라도 나면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는 사람은 극히 제한된 것. 두 사람이 서로를 살피며 우리 앞에 놓인 코스를 천천히 점령해 나가는 것이다. 천우신조였을까. 이 같은 상황은 끊임없이 이어졌지만, 우리는 무탈하여 현재 이탈리아 피렌체에 머물며 산행기를 끼적거리고 있는 것이다. 




가끔씩 잠자리에 누워 당시를 생각하면 아찔 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능선의 끄트머리는 마치 칼날처럼 끝이 뾰족하고 좁아서 자칫 발을 헛디디기라도 한다면 중대사고로 이어질 수 있었다. 하지만 산행을 통해 만나는 대자연은 등반자로 하여금 성취감을 안겨줄 뿐만 아니라 세상에서 만나지 못한 또 다른 쾌감을 안겨 주는 곳. 비록 짧은 순간이지만 고행을 통해 세상에서 느끼던 번뇌로부터 저만치 멀어진다고나 할까. 전편에 이 같은 경험을 이렇게 말했다. 



우리에게 설악산은 오래된 친구나 다름없었다. 만날 때마다 세상만사 다 털어놓고 흉허물 없이 지낼 수 있는 곳. 또 인자하신 어른의 품처럼 안기기만 하면 등을 다독 거리며 무슨 이야기라도 다 들어주던 곳. 그래서 설악산은 봄부터 겨울까지 구석구석 짬만 나면 찾던 곳이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어느 때나 갈 수 있었던 곳. 사계절 모두 서로 다른 모습으로 우리를 맞이하던 곳이다. 



#행복의 조건은 0.1%, 마음먹기에 달렸다 


산행을 통해 만나는 색다른 풍경과 식물군은 또 다른 세상을 경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다. 산 아래서는 매시각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싸움이 이어지지만 깊은 산중에 사는 생물들은 보다 넉넉해 보인다. 그들 세계에서도 보이지 않는 다툼이 있을지라도 우리 눈에 비친 그들은 너무 평화롭고 질서 정연하다. 



특히 유월의 설악산 서북능선은 이제 막 봄이 시작되어 발걸음을 옮기는 곳마다 야생화들이 지천에 널렸다. 산행의 여유가 있었다면, 또 장비가 허락했다면 그들의 행복한 표정 전부를 카메라에 담아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싶은 것. 자랑의 이유는 딱 하나. 세상살이가 제아무리 고달파도 행복할 수 있는 조건 0.1%만 찾아내도 행복해질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은 것이다. 산행은 그런 면에서 우리네 삶과 너무 닮았다.



우리의 삶이 틀에 박힌 듯 정형화되어가는 건 최근의 일과 다름없다. 과학의 발달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희망 대부분을 앗아간 지 오래다. 휴대폰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는 순간부터 스스로 부처님이 된다. 세상이 당신의 손바닥 위에 있는 것. 무엇이든 원하는 키워드를 누르기만 하면 휴대폰은 도깨비방망이로 변한다. 호기심이 없어진 세상, 미래가 너무 빤히 들여다 보이는 세상에서 인간들은 방황한다. 인간들 스스로 걷어차버린 판도라의 상자 때문에 마지막 남은 희망 조차 아슬아슬한 상태. 판도라의 상자에 얽힌 신화는 이랬지.. 



태초의 세상에, 제우스는 대장장이의 신 헤파이스토스를 불러 여자 인간을 만들라고 했고, 판도라라는 여자 인간이 탄생하였다. 제우스는 판도라의 탄생을 축하하며 상자를 주었고, 절대 열어보지 말라는 경고를 주었다. 판도라는 신 프로메테우스의 동생과 결혼하고 행복하게 살았지만, 어느 날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결국 상자를 열고 만다. 그 상자 안에는 온갖 욕심, 질투, 시기, 각종 질병 등이 담겨 있었으며, 이것들은 판도라가 상자를 여는 순간 빠져나와 세상 곳곳으로 퍼졌다. 평화로웠던 세상은 금세 험악해지고 말았다. 판도라는 깜짝 놀라 급하게 상자를 닫았으나 상자 안의 나쁜 것들은 이미 전부 빠져나온 뒤였다. 그러나 그 안에 있었던 희망은 빠져나가지 않아서, 사람들은 상자에서 빠져나온 악들이 자신을 괴롭혀도 희망만은 절대 잃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Il mito
Per vendicarsi di Prometeo, il titano che aveva donato il fuoco agli uomini rubandolo a Zeus, il re degli dei decide di regalare la donna – Pandora – agli uomini. Si tratta di una sottile vendetta perché Pandora, resa bellissima da Afrodite, a cui Era aveva insegnato le arti manuali e Apollo la musica e che era stata resa viva da Atena, è destinata a recare la perdizione al genere umano.
Secondo il racconto tramandato dal poeta Esiodo ne Le opere e i giorni, il "vaso" (pithos, πίθος in greco antico) era un dono fatto a Pandorada Zeus, il quale le aveva raccomandato di non aprirlo. Questo vaso, che dovrebbe contenere il grano, contiene invece i mali che affliggono l'uomo e che sono fino a quel momento separati da lui.
Pandora, che aveva ricevuto dal dio Ermes il "dono" della curiosità, non tardò però a scoperchiarlo, liberando così tutti i mali del mondo, che erano gli spiriti maligni della "vecchiaia", "gelosia", "malattia", "pazzia" e il "vizio". Sul fondo del vaso rimase soltanto la speranza (Elpis), che non fece in tempo ad allontanarsi prima che il vaso venisse chiuso di nuovo. Aprendo il vaso, Pandora condanna l'umanità a una vita di sofferenze, realizzando così la punizione di Zeus.
Prima di questo momento l'umanità aveva vissuto libera da mali, fatiche o preoccupazioni di sorta e gli uomini erano, così come gli dei, immortali. Dopo l'apertura del vaso il mondo divenne un luogo desolato ed inospitale, simile ad un deserto, finché Pandora lo aprì nuovamente per far uscire anche la speranza e il mondo riprese a vivere.
Con il mito del vaso di Pandora la teodicea greca assegna alla curiosità femminile la responsabilità di aver reso dolorosa la vita dell'uomo. Vaso di Pandora



판도라의 상자에 얽힌 신화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 사노라면 쉽게 잊고 사는 게 이 같은 진리이다. 판도라의 상자로부터 쏟아져 나온 것들 때문에 우리는 매일같이 지지고 볶고 울고 불고 난리를 치는 것. 행복할 시간적 여유 조차 찾기 쉽지 않은 세상이 됐다. 우리가 문명사회에서 얻은 이기를 누리는 순간부터 점점 더 불행해졌다고나 할까. 


우리가 걸어왔던 길을 뒤돌아 보니..


이 같은 일은 젊을 때는 잘 모르는 법이다. 젊음이 마냥 지속되는 줄 알기 때문이라고 말하면 꼰대 취급하겠지만, 나 또한 그맘때 그랬던 것을 생각하면, 가끔씩 문명의 이기로부터 멀어지는 연습을 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하루아침에 휴대폰을 버리고, 하루아침에 컴퓨터를 사용하지 말라는 게 아니다. 지금 현재 당신의 좌표가 어디쯤인지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지는 즉시 새로운 희망을 발견하게 될 것. 정신없이 바쁘게 사는 동안이라도 판도라의 상자가 말하는 교훈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는 말이자 주장이다. 



그 깊은 산중에 아내와 나 단 둘 뿐이었다. 그 깊은 산중의 어느 능선에 서면 바라보이는 건 하늘과 구름과 첩첩산중. 그리고 가끔씩 목덜미를 훔치는 바람 한 점. 능선에는 숲이 없어서 내리쬐는 볕이 어깨를 따갑게 만들곤 한다. 뒤를 돌아보니 저만치 우리가 맨 처음 올랐던 대승령이 보이고, 발아래로 한계령을 관통하는 44번 국도가 용트림을 하는 곳. 아내는 사진 몇 컷을 촬영하는 동안을 기다리지 못하고 저만치 앞서 걷는다. 이유가 있었다.



"너무 힘들어서.. 뒤를 돌아다볼 힘도 없어서.. 그저 앞만 보고 걸어..!"



아내 곁에 다가서 물으면 대답은 한결같았다. 성격상 무엇 하나 미룰 줄 모르는 성미에, 시작하면 끝을 봐야 하는 성미의 아내는 산을 좋아했다. 무슨 이유도 없었다. 그냥 산이 좋다는 것. 그냥.. 마냥 좋다는 산행은 전국의 명산도 모자라 지구별의 명산까지 다 가보고 싶다는 사람. 그래서 떠난 지구별의 명산 중에 다시 가 보고 싶은 명산은 딱 두 군데. 설악산과 파타고니아의 피츠로이(Il monte Fitz Roy)였다. 



하지만 이제 두 번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산이자 넘봐서도 안 되는 산으로 변했다. 우리에게 남은 기회가 많지 않다는 것을 너무 잘 안다. 설령 우리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설악산은 쉽게 오를 수 없는 체력의 한계를 실감하고 있고, 우리가 마지막으로 다녀온 공룡능선은 꿈에서나 가능한 일로 바뀌고 있는 것. 그 어떤 미련도 회한도 남아있지 않다는 게 신기할 정도랄까. 



세상의 숲에서 사노라면 많은 사람이 필요치 않다. 이 깊은 산중에 버려진 듯 두 사람밖에 없다는 건 시사하는 바 적지 않다. 친구나 어버이처럼 당신의 모든 것을 아는 사람과 서로 나누고 돕고 또 지지고 볶고 사는 동안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 아내는 그 사람이 당신일 것이라며 산을 가리키고, 나 또한 당신일 것이라며 산을 품었는지 모를 일이다.




유월의 귀때기청



너무 먼데까지 온 것일까..


이 깊은 산중에 아내와 나 단 둘 뿐이라니..


설악산 서북능선의 주릉에는 이제야 철쭉이 꽃잎을 내놓고 있었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소리 소문 없이 살아가고 있는 철쭉..


이들에게도 시련이 없었던 건 아니었다. 바람이 얼마나 거세게 불었으면 귀때기가 떨어질 것 같다고 해서 '귀때기청'이라 불렀을까. 불어오는 바람에 저항하지 않고 허리를 낮춘 소나무들이 대견스럽다.


따가운 햇살이 내리쬐는 유월의 귀때기청은 말이 없는 대신 만고풍상을 겪은 숲과 뾰족한 봉우리를 곳곳에 드러내고 있었다. 저 멀리 봉우리까지 또 하산길까지는 갈 길이 멀다.



명산이란 그런 것일까.. 피렌체에서 끼적거리는 산행기를 통해 자꾸만 설악산에 다시 한번 더 가고 싶은 욕망이 꿈틀거린다. 아내에게 물었더니 "죽기 전에 설악산과 피츠로이에 다시 한번 더 가 보고 싶어..!"라며 아쉬움을 담아 말한다. 너무도 사랑한 탓이다. 사람들은 두 사람이 힘을 합치면 세상에 이루지 못할 일이 없다고 말한다. 그 깊은 산중에 아내와 나 단 둘 뿐이었지.. 


귀때기청봉과 서북능선 1580m 
귀때기청봉(1,577m)  - 설악산 산행 코스
Taesŭng-nyŏng_Guiteghi-cheong
Le montagne delle Seolak con Mia moglie
Foto di yookeun Chang_Geograf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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