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단락에서는 기업 변환이 일어나는 사례를 삼성전자의 시스템-반도체 사업을 들어서 설명했다. 기업에서 변환은 크게 4가지 단계로 볼 수 있다. [가]는 새로운 틈새시장을 발견하는 것이고, [나]는 기존의 제품군 일부를 다른 제품군으로 대체하는 것이다. [다]는 변형(transformation)이다. [라] 재배치(re-alignment)이다. 이 가운데 변형은 제품을 구성하던 요소나 재료들을 부분적으로 혹은 전체적으로 형질 전환하는 것이다.
형태가 아닌, 질료의 상태 변화가 제품 전체의 변화로 나타난 것이 변형이다. 사실 변형이야말로 변환이 이루어지는 개체화 과정을 잘 보여준다. 변환은 구성 성분인 질료의 상태 변화에 의해 일어나는 새로운 구조화이기 때문이다. 주로 이 ‘변형’을 추구하는 단계에서 혁신적인 기술이 창조되며 새로운 기술을 적용한 제품군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기업 변환 가운데 ‘변형’ 단계를 잘 보여주는 사례로서 글로벌 패션기업 구찌(Gucci)의 친환경 소재 기반 제품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기후위기 등으로 지속가능한 소재에 대한 관심이 높이지는 친환경 의류 시장에서 가장 관심을 갖는 것은 재활용(Recycle)과 업사이클링(Upcycling)이다. 한정된 자원에서 가치를 찾아내는 일은 점점 더 주목받고 있다. 친환경 신소재는 공정 과정이 까다롭기 때문에 다른 소재들 보다 가격이 비싼 편이다. 하지만 구찌는 각각 친환경 윤리를 따르는 럭셔리 소재를 새롭게 개발하여 2021년 말부터 런칭하였다.
구찌가 새롭게 선보인 친환경 Pet 패션
1) 질료적 조건
2021년 봄 구찌는 지난 2년에 걸쳐 자체 연구개발(R&D) 끝에 품질, 부드러움, 내구성이 탄탄하면서 친환경 소재로 만든 데마트라(Dematra) 가죽을 선보였다. 데마트라는 77%의 목재 펄프에 Biscos, 재활용된 스틸, 밀과 옥수수에서 검출한 바이오 기반의 폴리우레탄을 합성해 만들었다. 나아가 재생 가능한 바이오 자원에서 유래한 비동물성 원료로 만들어서 비건(Vegan) 인증을 받았다. 기존의 스니커즈 질료인 합성섬유를 친환경 섬유로 거의 대체한 것이다.
2) 에너지적 조건
그렇다면 과연 어떤 동력으로 인해 구찌는 친환경 소재를 직접 개발하기로 결정한 것일까? 모 언론사 인터뷰에서 구찌 CEO인 마르코 비자리(Marco Bizzarri)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구찌의 100주년에 있어서, 데메트라는 구찌의 품질과 미학적 기준을 고스란히 담아낸 새로운 소재입니다. 발전하는 미래를 위해 구찌의 전통적인 기술과 제작 노하우를 활용하죠. 데메트라는 업계에 손쉽게 확장할 수 있고 대체 가능한 선택지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비동물성 솔루션에 대한 요구에 응답하는 보다 지속 가능한 소재이기도 합니다.” 이 말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데메트라 = 100주년 + 혁신 열망 + 전통 기술 + 품질 + 미학+ 식물성
구찌 CEO의 말을 좀 더 해석하자면 다음과 같다. 구찌 는 동물 원료의 가죽으로 신발을 만드는 전통 기술을 가진 장인들이 존재해왔다. 그들 덕분에 오늘날 구찌는 100주년을 맞이할 수 있었다. 이들이 끊임없이 품질을 개선해왔으며 디자이너들은 구찌 고유의 미적 기준을 높이고자 노력해왔다. 그러나 시대 흐름이 식물성 원료, 그리고 재생가능한 소재를 선호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으니 이런 원료를 통해 비건 가죽을 만들기로 한 것이다.
Marco Bizzarri_구찌 CEO
3) 외부적 조건 (우연)
하지만 시대적 당위만으로 2년여의 기술개발이 소요되는 자본 투자를 결정했을 리 없다. 구찌 CEO의 답변을 좀 더 들여다보면, 두 가지 힘이 존재하고 있음을 유추해볼 수 있다. 먼저 CEO는 전통 기술과 제작 노하우를 언급함으로써 동물 가죽의 제작 노하우를 가진 전통 장인들을 고려한다. 하지만 다음 문장에서는 데마트라가 비동물성 솔루션과 지속가능한 소재임을 강조한다. 즉, CEO의 발언은 조직 내부에 존재하는 ‘새로운 비건 기술자’과 ‘전통적 가죽 기술자’를 모두 고려하고 있다. 이들의 암묵적인 갈등 관계도 자연스럽게 유추해 볼 수 있다.
변환 과정은 이러한 상반되는 대립자들이 공존할 때, 우연적 사건이 계기가 되어 상태 변화가 시작된다는 것을 기억하는가. 우연적 사건이란 바로 ‘구찌 100주년’이다. 구찌는 100주년이라는 우연적 사건을 기회로 삼아 필연적 전환을 시도한 것이다. 이처럼 기존의 힘과 새롭게 도입된 힘 사이의 모순과 차이에는 변환이 일어날 수 있는 에너지 조건이 잠재되어 있다.
Deamtra 소재로 만든 핸드백
구찌는 데메트라 소재를 선보이면서 이를 적용한 최초의 구찌 제품인 3종의 스니커즈 모델을 함께 출시했다. ‘구찌 배스킷(Gucci Basket)’, ‘구찌 에이스(Gucci Ace)’, ‘구찌 롸이톤(Gucci Rhyton)’ 스니커즈로, 발등 부분과 안감의 대부분에 데메트라가 활용됐고 동물성 소재 대신 오가닉 코튼, 재활용 스틸 및 재활용 폴리에스터가 사용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