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애의 양면성새벽의 거울
오늘도 거울 앞에서 한참을 멈췄다.
아침 출근 준비하면서 열다섯 분. 회사 화장실에서 다섯 번. 엘리베이터 문에 비친 내 모습 확인하기 수차례. 퇴근하고 집에 와서 세수하며 또 한 번.
언제부터 이렇게 내 얼굴을 자주 보게 됐을까.
스마트폰 앞면 카메라가 생긴 이후? 아니면 인스타그램을 시작하면서부터?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어느 순간부터 '나'를 확인하는 게 하루의 루틴이 됐다.
친구 K가 농담처럼 던진 말이 아직도 맴돈다.
"너 나르시스트 아니야?"
그때는 웃으며 넘겼다. 아니라고, 그냥 머리 정리하는 거라고. 하지만 집에 돌아와 생각해보니 찔렸다. 내가 정말 나를 사랑해서 그러는 걸까? 아니면 불안해서 그러는 걸까?
그리스 신화를 다시 찾아봤다. 나르키소스. 물에 비친 자기 얼굴에 반해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죽은 미소년. 그런데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나르키소스가 사랑한 건 정말 '자기 자신'이었을까?
물은 거울과 달리 완벽한 상을 보여주지 않는다. 바람이 불면 일렁이고, 빛에 따라 왜곡된다. 어쩌면 그가 사랑한 건 자신이 아니라 '물이 만들어낸 환상'이었을지도 모른다.
현실의 자신보다 더 아름답게 보이는, 흔들리는 그 이미지.
핸드폰 갤러리를 열었다. 최근 한 달.
삭제한 것까지 합치면 셀카만 500장은 넘을 거다. 그중에서 실제로 올린 건 단 세 장. 497장은 뭔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버렸다.
각도가 이상해서, 표정이 어색해서, 조명이 안 좋아서...
아니다. 솔직해지자.
'내가 생각하는 나'와 달라서 지운 거다.
심리학 실험 하나가 떠올랐다. 사람들에게 자기 얼굴 사진 여러 장을 보여주고 고르게 했더니, 대부분 거울에 비친 것처럼 좌우가 반전된 사진을 선택했다고. 이유는 단순했다. 그게 익숙하니까. 매일 거울로 보던 그 얼굴이 '진짜 나'라고 믿으니까.
그럼 남들이 보는 내 얼굴은?
회사 워크숍에서 찍은 단체 사진을 다시 봤다. 내 얼굴이 낯설다. 이게 나라고? 동료들은 매일 이 얼굴을 보고 있다는 건가?
갑자기 등골이 서늘해졌다.
"자기 PR 정말 잘하시네요."
지난주 회의가 끝나고 과장님이 던진 말이다. 칭찬인지 비꼬는 건지 애매했다. 하지만 그 '자기 PR'이라는 단어가 계속 걸렸다.
나는 단지 내가 한 일을 설명했을 뿐인데.
아니, 정말 그랬을까?
발표 자료를 다시 봤다. 은연중에 성과를 부풀렸다. '참여했다'를 '주도했다'로, '도움을 받았다'를 '협업했다'로. 작은 차이지만 인상은 완전히 달라진다.
이것도 일종의 '필터'인가.
인스타그램 필터만 문제가 아니었다. 우리는 매일 보이지 않는 필터로 자신을 편집한다. 이력서에서, 자기소개에서, 일상 대화에서도.
데카르트가 말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하지만 그 '생각하는 나'마저도 포장된 건 아닐까? 내가 나에 대해 생각하는 것조차 일종의 자기 검열을 거친, 보정된 이미지는 아닐까?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고 했다.
쉬워 보이는 이 말이 왜 수천 년 동안 회자될까. 어쩌면 그만큼 어려워서가 아닐까. 나를 아는 것. 필터 없는, 편집되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나를 마주하는 것.
프로이트는 자아를 세 개로 나눴다.
이드(Id) - 욕망하는 나 자아(Ego) - 현실적인 나
초자아(Superego) - 이상적인 나
우리가 사랑하는 건 어떤 나일까? 거울 속에서, 셀카 속에서, 남들의 시선 속에서 우리가 찾는 건 어떤 나일까?
어쩌면 우리는 모두 나르키소스다.
진짜 자신이 아닌, 우리가 만들어낸 이미지를 사랑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이미지를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거울을 들여다본다. 확인하고, 수정하고, 또 확인한다.
불면증이 심해진 지 두 달째다.
오늘도 새벽 세 시에 눈이 떠졌다. 화장실에 가려고 일어났다가 세면대 앞에서 멈췄다. 불 꺼진 화장실, 희미한 빛에 비친 얼굴.
부스스한 머리. 다크서클. 각질 일어난 입술.
이상하게도... 마음이 편했다.
낮에 그토록 신경 쓰던 그 모든 것들이 무의미해지는 순간. 아무도 보지 않는 이 시간, 아무것도 꾸미지 않아도 되는 이 모습.
'이게 나구나.'
처음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인스타그램에 올릴 수 없는 이 얼굴. 회사에서 보여줄 수 없는 이 모습. 그런데 이게 가장 진짜 나에 가까운 것 같았다.
자기애(自己愛).
한자를 뜯어보면 '스스로를 사랑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우리는 정말 '스스로'를 사랑하고 있을까? 아니면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만들어진 나'를 사랑하는 걸까?
심리학자 에리히 프롬은 구분했다. 건강한 자기애와 병적인 나르시시즘을.
건강한 자기애는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 나르시시즘은 과장된 자기 이미지에 집착하는 것.
새벽 세 시의 거울 앞에서 깨달았다.
진정한 자기애는 더 나은 모습을 보여주려 애쓰는 게 아니라, 못난 모습까지도 인정하고 품는 것이라고. 497장의 실패한 셀카도, 과장님 앞에서 더듬거리던 모습도, 새벽에 홀로 잠 못 드는 이 시간도.
다 나다.
신화를 다시 읽었다.
나르키소스의 비극은 자기를 너무 사랑한 게 아니었다. 자기를 제대로 사랑하지 못한 거였다. 물에 비친 환영만 쫓다가 진짜 자신은 돌보지 못했다. 먹지도, 자지도 못하고 그저 그 이미지만 바라봤다.
우리도 비슷하지 않을까.
인스타그램 피드를 채우느라 진짜 일상을 놓치고, 완벽한 이미지를 만들려다 진짜 관계를 잃고, 남들에게 보여줄 모습을 고민하다 자신이 진짜 원하는 게 뭔지 잊어버린다.
거울은 도구일 뿐이다. 문제는 우리가 거울에 비친 상을 진짜로 착각할 때 생긴다.
오늘 하루, 거울을 볼 때마다 물어보기로 했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건 나일까, 내가 만든 이미지일까?"
그리고 가끔은 거울을 끄기로 했다. 핸드폰 화면도, 쇼윈도의 반사도, 남들의 시선이라는 거울도.
그냥 나로 존재하기로.
못나도, 부족해도, 어설퍼도.
그게 사랑의 시작 아닐까.
'무리 속의 고독'으로 찾아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