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주 오던 할머니가 내쪽으로 달려오며 다급한 목소리로 묻는다.
나는 주위를 빠른 속도로 찾아본다. 마주 걷던 내 쪽으로는 개가 오지 않았다. ‘그렇다면 옆길로 샜다는 소린데’하며 쳐다본 길가 나무. 그 빽빽한 나무 사이에서 땅바닥에 머리를 박고 있는 회색 개가 보인다. 바로 할머니 개다.
개를 확인한 할머니가 안도의 숨을 내쉬며 말을 내뱉는다.
할머니가 개 쪽으로 향하는 모습을 확인하고 가던 걸음을 계속한다.
나는 이 할머니를 안다. 물론 할머니의 개도 잘 안다.
둘은 항상 나와 비슷한 시간에 나와 운동을 한다.
다리가 기형적으로 얇은 할머니는 한 손을 골반에 두고 걷는다.
남들보다 세 배 가까이 느린 속도. 한 다리를 먼저 내디뎌 지탱하고 그다음 다리를 끌고 오는 방식이다.
한 다리에 문제가 있어 보인다. 회색 머리카락의 할머니는 비슷한 색의 반려견과 함께 운동한다.
개도 아픈 줄 알았다. 기운 없이 축 처져 매일 할머니와 함께 걸었기 때문이다.
처음엔 개도 다리를 다쳤나 생각했다. 할머니처럼 걷는데 힘들어 보였기 때문이다.
이 인상 깊은 커플은 처음에 좋은 인상을 주지 못했다.
반려견과 외출할 때는 목줄을 매는 것이 예의다. 지나가는 행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서다.
그런데 할머니는 개 목줄을 풀고 다녔다. 그것도 작은 개가 아닌 큰 개를, 인상도 예쁘지 않은 무섭게 생긴 개를 말이다. 그래서 항상 마주칠 때마다 신경 쓰여 최대한 멀찌감치 떨어지려고 했다.
그런데 한 달 가까이 만나면서 나는 이 개가 너무나 사랑스러워졌다.
알고 보니 개는 할머니의 속도를 맞춰주고 걷는 것이었다. 앞에서 걸을 때는 할머니를 힐끔힐끔 뒤돌아보며 속도를 맞췄고, 뒤 따를 때는 할머니만 바라보며 일정 거리를 유지했다.
할머니가 힘들면 같이 쉬고 할머니가 속도를 내면 같이 속도를 냈다.
개는 18살이라고 했다.
할머니가 여든 살 가까이 된 듯해 보이니 인간으로 치면 얼추 비슷한 나이다. 할머니와 개 중 어느 쪽이 노쇠한 것인지 가늠하기 힘들 정도다. 확실한 것은 둘은 동반자다. 서로를 지켜주며 걷는다. 서로를 의지하고 있다는 것은 걷는 모습만 봐도 알 수 있다.
걷기 운동을 하다 보면 개 산책을 나온 사람들이 3분의 1은 된다.
외출금지령에도 개인 운동과 개 산책은 가능하기 때문이다. 본인의 운동보다 개운동이 더 중요한 사람들도 많아 보였다. 개 걸음에 맞춰서, 개가 뛸 수 있도록, 개가 변을 볼 수 있도록, 개가 멍 때릴 수 있도록 정성을 들였다. 개들은 귀엽고 충성스러운 얼굴로 주인을 만족시켜 줬다. 무심결에 쳐다본 개 표정이 어찌나 귀엽든지 6피트 거리를 유지하라는 규정을 어기고서라도 다가가서 만지고 싶었으니.
노처녀라는 것을 밝히면 사람들은 내게 고양이나 개를 키우지 않냐고 물었다. 아니 묻지도 않고 당연히 키운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았다. 혼자 사는 노처녀에게는 고양이나 개는 마치 한 세트 같아 보였나 보다.
나는 그럴 때마다 한마디 했다.
맞는 말이다.
편안함을 위해 결혼도 안 하는(못하는) 나는 누군가를 돌봐줄 기력은 없었다.
그런데 그런 내 생각이 조금씩 바뀌고 있었다.
가족을 잃은 듯한 표정의 할머니를 봤을 때, 가족보다도 더한 배려를 하는 할머니의 개를 봤을 때, 그런 환상적인 조합이 가능하다면 개를 키워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운동을 마치고 집에 가서 유튜브에서 귀여운 개 동영상이나 봐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생각한다.
(이 글은 코비드 19로 외출 금지령이 내려진 미국 조지아 주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2020년 3월과 6월 사이 100일 동안 걷기 말고는 할 것이 없었던 한 여성의 '처절한'이야기입니다.)